343. 용혈의 주인 (4)
한빈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어찌나 내공을 담았는지 쓰러진 선주의 몸이 들썩일 정도였다.
모두는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선 채 아무 말 하지 못했다.
“…….”
모두가 눈만 끔뻑거리고 있자 한빈이 말을 이었다.
“당연히 주인이 없겠지. 이걸 보고 주인이라 자처하는 자가 있다면 단칼에 그자의 목을 베려고 했네.”
한빈의 말에 정의맹 무사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진짜 마교의 물건이었습니까?”
“마교는 무슨……. 내가 잃어버린 물건인데, 이걸 보고 주인이라고 하면 그건 바로 도둑이지.”
한빈은 주위를 둘러보며 진득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웃음에 무사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주변을 둘러봤다.
모두가 뒤로 한 발씩 물러서는 중이다.
정의맹의 무사가 심호흡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절대 저희 것은 아닙니다.”
“그래, 아니어야 하지. 잘못하면 오늘 필요 없는 피를 흘릴 수도 있으니까. 중요한 건 그 피가 내 피는 아니라는 점이지. 정의맹에서 나왔는가?”
“네, 그렇습니다.”
“누군가 자네를 도와줄 거로 생각하나? 혹시 저기 있는 신창양가의 고수가…….”
한빈은 말끝을 흐리며 양예신 쪽을 바라봤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양예신에게 모였다.
갑자기 모두가 자신만을 바라보자 양예신은 순간 멍해졌다.
싸움에 끼어든 것 자체가 어찌 보면 오해였다.
그런데 슬쩍 보니 하북팽가의 사 공자와 관계된 일이었다.
자신이 무가지회로 가는 것이 누구 때문이던가.
한빈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의맹 무사들이 배고픈 강아지처럼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측은지심이 들 정도의 눈빛에 양예신이 멍하니 있자 설화가 그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정의맹 무사들이 애들도 아니잖아요. 자기 일은 자기가 해야죠.”
“아.”
양예신은 그제야 정신이 번뜩 든 듯 눈을 크게 떴다.
한빈은 자신의 은인이었다.
어차피 다 이유가 있어서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한빈이 속해 있는 하북팽가 자체가 정파가 아니던가.
여기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한빈에게 맡겨야 했다.
양예신이 말했다.
“나는 이 일과는 관계없소!”
양예신의 외침에 주변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웅성거리는 진영이 달랐다.
이번에는 사도련의 무사들이 활짝 웃었다.
“그러기에 내가 뭐래?”
“그러게, 저분은 사파의 고수가 분명해.”
“그러게 말이야.”
그때 한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사파라고?”
그 말에 사도련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나섰다.
“어, 어르신 사파의 고수가 아닙니까?”
“내가 언제 사파의 고수라고 했나?”
“그럼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그럼 정파의 고숩니까?”
“내가 언제 정파의 고수라고 했는가? 나는 누구에게도 내 사문을 밝힌 적이 없거늘…….”
한빈이 말끝을 흐리자 사도련 무사뿐 아니라 정의맹의 무사들도 마른침을 삼켰다.
그때였다.
한빈은 목청에 기를 모았다.
‘허장성세.’
용린검법의 초식을 떠올린 한빈이 힘껏 외쳤다.
“모두 물러나라!”
갑자기 터져 나온 기세에 모두가 넋이 나갔다.
가장 앞에 있던 사도련의 우두머리는 그 기세를 직격으로 맞았는지, 석상이 된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넋이 나간 채 석상처럼 서 있던 무사들이 서서히 눈동자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사도련의 무사들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들 중 하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한빈을 가리켰다.
“지금의 모습, 아무래도 익숙해.”
“자네도 그 생각이 났나?”
다른 사도련의 무사들이 맞장구쳤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탄성을 흘러나왔다.
그때 누군가가 말했다.
“적룡대협.”
“맞아, 바로 그분이야.”
“적룡대협!”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똑같은 말을 외쳤다.
동시에 그들은 한빈이 말한 대로 멀찌감치 물러났다.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적룡대협을 향한 존경심에서 그의 말을 따르는 것이었다.
그들의 동작은 실로 일사불란했다.
멀찌감치 떨어져 전열을 가다듬은 채 마른침을 삼키고 있었다.
언제든 적룡대협의 지시가 떨어지면 목숨이라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는 듯.
그 모습에 사도련의 무사들은 찝찝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때였다.
이번에는 한빈의 신호를 받은 설화가 움직였다.
설화는 한빈에게 배운 구걸십팔보를 밟으며 그들의 앞으로 이동했다.
그 모습이 그들의 눈에는 경이로웠다.
눈 한 번 깜짝일 때마다 점점 가까워지는 설화의 속도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그 모습에 누군가가 물었다.
“누, 누구십니까?”
“알아맞혀 보세요.”
설화가 웃자 정의맹 무사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하얀색 무복을 입고 있으니 설산파와 관계가…….”
“설산신녀!”
누군가가 외치자 옆에 있는 무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선녀가 아니고?”
“선녀라고 하기도 뭐하고 신선이라고 하기도 뭐하니 신녀가 낫지 않을까?”
“설산신녀라, 입에 딱 붙는군.”
“그러게 말이야. 설산신녀가 맞아.”
그들의 목소리를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았다.
하지만 설산신녀라는 단어는 점점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저 하얀 무복의 고수님이 설산신녀래.”
“설산이라면 정파가 아닌가?”
그들이 웅성거리는 목소리에 설화가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살수로 자라서 지금은 신녀라는 칭호를 듣고 있다.
뭔가 새로 태어난 기분이었다.
기분이 좋아진 설화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러분들도 멀찌감치 떨어지세요.”
“멀찌감치라면…….”
“사도련 무사들이 물러난 만큼 떨어지세요. 여긴 위험하니까요.”
설화의 말에 정의맹 무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표정은 비장하기까지 했다.
자신들의 편이 생겼다고 하니 갑자기 울컥해진 것이다.
누군가가 외쳤다.
“설산신녀님이 우리를 이렇게 신경 써 주신다니!”
“그러게 말이야. 역시 신녀님이야.”
졸지에 설화의 별호가 생긴 순간이었다.
설화는 자신의 별호가 듣기 좋은지 연신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제 모두가 떠나고 상황이 정리되자 한빈은 붉은색 검신을 들고 무진과 영아 부녀가 있는 곳으로 갔다.
영아는 용린검을 안은 채 조용히 자고 있다.
한빈은 옆에 있던 청화에게 말했다.
“저 아이가 깨게 되면 달래 주어라.”
“네, 알겠습니다.”
“그래, 부탁한다.”
말을 마친 한빈은 용린검을 빼내었다.
그러고는 붉은 검신을 그 안에 넣었다.
검신이 검집에 빨려들어 간다.
스르륵.
모든 것이 한빈의 예상대로였다.
암제와의 대결에서 얻은 깨달음은 단순한 무공의 지식만은 아니었다.
비급의 글귀가 던진 문제에 대한 해결 방법도 어렴풋이 보였다.
그때 깨달음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용린에 관한 것이었다.
용린이란 무엇일까?
단순한 용의 비늘이 아니었다.
용린은 용린검법을 쓴 붓에 해당했다.
그렇다면 붓만 가지고 비급을 쓸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했다.
나뭇가지로 바닥에 끄적일 수는 있지만, 후세로 남길 책을 쓸 수는 없었다.
필요한 것은 먹물.
그 먹물이 바로 용혈이었다.
용린검법은 용의 피로 쓴 비급.
한빈이 수집하는 구결이 용의 피로 쓴 글자가 분명했다.
그 용혈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자는 세상에 딱 한 명밖에 없었다.
그것이 용린의 주인인 한빈이었다.
구결을 제법 흡수한 한빈의 몸에는 용혈이 남아 있다고 해도 되었다.
한빈은 용혈이란 단어를 왜 떠올렸을까.
온전한 검을 만드는 데 필요한 것이 바로 용혈이었다.
한빈은 조용히 용린검을 바라봤다.
이제부터는 토막 난 용린검을 붙여야 했다.
대장간이 아닌 바로 이곳에서 말이다.
도구는 필요 없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한빈의 피였다.
용린검을 바라보던 한빈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한빈은 남은 용린검을 맨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힘껏 잡아당겼다.
스윽.
날은 뭉툭했지만, 한빈의 기가 담긴 검날은 잡고 있던 자신의 손을 베기에 충분했다.
한빈의 피가 용린검에 묻자 변화가 일어났다.
나머지 용린검도 붉은색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빈은 나머지 용린검의 토막을 검집에 밀어 넣었다.
화룡편으로 만든 검집에 용린검의 조각이 다 모인 것이다.
순간 한빈의 눈앞에 기다리던 글귀가 나타났다.
[용린검이 완성되었습니다.]
[용안으로 용린검을 확인하십시오.]
용안이라?
한빈은 조용히 용린검을 검집에서 뽑았다.
스릉.
검집에서 나온 용린검의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넣을 때 붉은색을 띠던 검신이 다시 먹빛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전과는 조금은 다른 먹빛이었다.
거무튀튀한 먹빛이 아니라 비싼 묵을 갈아서 쓴 것 같은 색을 띠고 있었다.
한참을 보던 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자세히 보니 이 검이 먹빛인 이유가 있었다.
검의 표면에 세필로 적은 것 같은 글자가 적혀 있었다.
[진룡출세(眞龍出世)]
[조일중원(照一中原)]
나머지 문자는 뭉개진 것처럼 흐릿해서 당장은 알아볼 수 없었다.
‘진짜 용이 세상에 나왔으니 중원을 비춘다.’
이것이 문장의 뜻이었다.
이것이 구결?
한빈은 눈을 가늘게 뜨고 문장을 계속 바라봤다.
그때였다.
검의 표면에 있던 글귀가 빨려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먼지처럼 둥둥 떠다니던 글자가 한빈의 눈으로 빨려 들어왔다.
뭐, 구결도 이런 식으로 흡수했으니 놀랄 일은 아니었지만, 그 대상이 사람이 아닌 검이라는 것이 신기할 뿐이었다.
글자가 눈을 통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닌다.
동시에 스치는 글귀.
[용혈지체에 한 걸음 다가섰습니다.]
[나머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용혈이 필요합니다.]
그 글귀와 함께 눈앞에서 빛이 번쩍였다.
너무도 밝은 빛에 한빈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 빛을 본 것은 한빈만이 아니었다.
주변의 모두가 그 빛을 확인했다.
가장 먼저 한빈에게 달려온 것은 설화였다.
설화가 주변을 향해서 외쳤다.
“다들 호법 좀 부탁드려요!”
동시에 양예신이 재빨리 뛰어와 한빈의 북쪽을 맡았다.
편육랑아와 흑의살풍도 달려와 서쪽과 남쪽을 맡았다.
청화가 막 일어났다.
“저도 도울게요.”
그 모습에 설화가 손을 저었다.
“아니야, 너는 영아를 맡아라. 동쪽은 내가 맡을게.”
그들은 하나가 되어 한빈의 호법을 서기 시작했다.
한빈을 둘러싸고 경계를 하고 있던 양예신과 편육랑아의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서로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둘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양예신이었다.
“혹시 말입니다…….”
양예신이 말끝을 흐리자 편육랑아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다른 때라면 상대의 귀청이 떠나가라 말했겠지만, 지금은 조심스러웠다.
“말해 보슈.”
“혹시 그쪽이 말한 그분이라는 게 사 공자였습니까?”
“헉, 그걸 어떻게 알고 있…….”
편육랑아는 당황했는지 말을 맺지 못한 채 양예신의 아래위를 훑어봤다.
그 모습에 양예신이 답했다.
“아, 그랬군요. 당신도 은공과 인연이 있었군요.”
“그럼 당신이 말한 그분이란 게 팽 공자였다는 말이오?”
“네, 제 가문의 은공이십니다.”
“허, 어떻게 그럴 수가…….”
편육랑아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뜰 때 옆에 있던 설화가 속삭이듯 말했다.
“아저씨들 좀 조용히 해 줄래요. 우리 공자님 깨달음에 방해되잖아요.”
설화의 말에 편육랑아와 양예신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사실 그들보다 더 놀란 것은 사도련과 정의맹의 무사들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그들의 눈에도 황금빛 광채가 보였다.
그들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평생 가도 보기 힘들다는 것이 깨달음을 얻는 모습이 아니던가.
그런데 누군가의 깨달음을 목격하는 것도 신기한데, 그를 사파와 정파의 고수가 동시에 호위하고 있었다.
이건 놀라움을 떠나서 상서롭게까지 느껴지는 광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