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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338화 (338/621)
  • 338. 용린검의 비밀 (5)

    주양개가 입을 벌리고 있을 때,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붓을 들었다.

    사사-삭.

    사사-삭.

    한빈의 붓이 일필휘지로 종이 위를 누볐다.

    탁.

    붓이 멈추자 한빈은 그 종이를 사 등분으로 나누었다.

    사삭.

    손으로 찢었지만, 마치 자를 대고 자른 것처럼 정갈하게 잘려 나간 종이.

    눈치 하나는 백 단인 주양개는 그 수법에 다시 한번 입을 벌렸다.

    그는 지금의 한 수가 무력을 일부러 보여 주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

    한빈은 사 등분으로 나눈 종이를 얇게 말아서 주양개에게 건넸다.

    “이건 전서구로 부탁드립니다. 이건 각각…….”

    한빈은 전서구의 도착지를 그에게 설명했다.

    주양개는 그 쪽지에 도착지를 붙여 수하에게 전달했다.

    수하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한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부탁드릴 게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제가 타고 온 배가 있는데, 그 경비를 맡아 주십시오.”

    한빈의 말에 주양개의 표정이 변했다.

    전서구를 날리고 소식을 전달하는 것은 그리 큰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경비 임무라면 달랐다.

    그들이 매듭도 없이 신분을 숨기고 있는 것은 오직 정보만을 취급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남의 눈에 띄는 경비 임무라니?

    하지만, 상대는 홍칠개의 제자였다.

    뭐, 비밀이라고는 했지만, 비밀이라고 얘기한 것 자체가 하북팽가의 사 공자라고 밝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성불이라는 칭호까지 받고 있다지만, 한번 돌아 버리면 그 끝을 모른다는 것은 개방의 어린아이까지 알고 있었다.

    주양개가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한빈이 품에서 은괴 하나를 꺼냈다.

    이것은 배에서 굴러다니던 것을 주워 온 것이었다.

    배에 들어 있는 재물에 비하면 은괴는 눈에 띄지도 않을 만큼 존재감이 희미했다.

    하지만, 이 정도의 은괴가 세상에 나오면 그 값어치는 달라진다.

    주양개는 은괴를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왜 저것을 꺼냈는지 모른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한빈은 아무렇지도 않게 은괴를 건넸다.

    주양개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

    오늘따라 묘하게 손이 무거웠기 때문이다.

    주양개는 저 은괴의 가치를 짐작해 보았다.

    은전도 아니고 주먹만 한 은괴였다.

    그렇다면…….

    주양개가 석상이 되어 있을 때 한빈이 말했다.

    “왜 안 받습니까? 제 팔이 떨어지겠습니다.”

    “돈에는 대가가 따른다고 어르신들이 말씀하셨습니다. 이건 조금 과한…….”

    “아까 전서구와 이번에 부탁한 호위 업무에 대한 대가입니다. 그리고 말이 호위지 침입자가 생기면 맞서지 말고 내게 알려 주기만 하면 됩니다.”

    “헉.”

    주양개는 눈을 크게 떴다.

    일에 대한 대가치고는 아무리 생각해도 은괴는 너무 값어치가 많이 나갔다.

    그 모습에 한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싫습니까?”

    “싫은 건 아닌데…….”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만약에 전서구가 제대로 도착하지 않거나, 침입자가 있는데도 제때 보고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응당한 대가를 받겠습니다.”

    “아.”

    주양개가 그제야 수긍하는 표정이었다.

    하북팽가의 사 공자는 계산이 철저하기로 소문이 난 인물이었다.

    임무에 실패하면 이 은괴 이상의 재물을 뜯어 갈 것이었다.

    주양개의 머리가 치열하게 돌아갔다.

    물론 그것은 주양개의 착각이었다.

    만약에 실수했을 때 돈으로 뜯어 갈 것이었으면, 한빈은 따로 계약서를 썼을 것이었다.

    그저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 조건을 달았을 뿐이었다.

    주양개는 얼마나 심하게 머리를 쓰는지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였다.

    계산을 모두 끝낸 주양개는 자신의 수하를 불렀다.

    “전서구를 보낼 비둘기는 가장 튼실한 놈으로 골라라. 매도 잡아먹을 수 있는 놈으로 보내야 한다.”

    “분타주님, 비둘기가 어떻게 매를 잡아먹습니까?”

    “이놈아,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 정도로 튼튼한 놈을 보내라는 거다.”

    “네, 네. 알겠습니다.”

    “그놈, 말버릇하고는……. 일단 빨리 처리해라.”

    “알겠습니다.”

    포권한 주양개의 수하가 재빨리 뒤쪽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눈 깜짝할 사이에 전서구 네 마리가 하늘로 날아갔다.

    푸드덕.

    그 날갯짓 소리가 잠잠해질 때 한빈이 말했다.

    “그럼 저희는 가 보겠습니다. 저희가 가는 곳은 말씀 안 드려도 되겠지요?”

    “네, 맞습니다. 저희가 알아서 계신 곳까지 정보를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혹시 다른 정보나 시키실 일은 없는지요?”

    “흠, 사천당가에서 열리는 무가지회 소식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럼 저희는 가 보겠습니다. 나갈 때는 정문을 이용해도 되겠지요.”

    한빈은 사람 좋은 얼굴로 문을 가리켰다.

    올 때는 개구멍으로 들어왔지만, 나갈 때는 제대로 된 문으로 나가겠다는 뜻이었다.

    “아이쿠, 제가 귀인도 몰라뵙고 개구멍으로 안내해 드린 점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한빈은 진득한 미소를 마지막으로 돌아섰다.

    주양개와 옆에 있던 소개는 점점이 사라지는 한빈의 등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빈이 사라지자 주양개가 말했다.

    “역시 성불이시군.”

    “지난번에는 성불이 아니라 미친개라고 하셨…….”

    “쉿, 이놈이 어디서 초를 치려고. 이제부터는 저분은 성불이다. 아니 대불이시다.”

    “분타주님, 태세 전환이 너무 빠르신 거 아닙니까?”

    “이게 태세 전환이더냐? 귀인을 알아본 것뿐이다. 이제까지 내 눈이 삐었지.”

    말을 마친 주양개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햇빛을 받은 은괴가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주양개가 흐뭇한 눈으로 은괴를 바라보고 있을 때 소개가 물었다.

    “분타주님, 아까 그분들이 한 말은 대체 뭐예요?”

    “무슨 말을 말하는 것이냐?”

    “최고의 시녀니 뭐니 그랬잖아요. 꼭 암어 같던데, 진짜 최고의 시녀라고 자랑할 리는 없을 테고 분명 암어인데, 전혀 못 알아듣겠더라고요.”

    “흠.”

    “분타주님도 모르시는구나.”

    “내가 모를 리가 있겠느냐?”

    “그럼 뭔데요?”

    “하북팽가의 사 공자라면 계약에 미친 자, 아니 계약을 좋아하는 분이라고 알려졌지.”

    “그건 그렇죠.”

    “분명히 이곳에 큰 건수가 있을 것이야.”

    “혹시 돈이요?”

    “돈일 수도 있고 비급일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일일 수도 있고.”

    “그럼 시녀는 뭐예요?”

    “너는 팽 공자의 시녀를 보고 무엇을 느꼈느냐?”

    “그냥 귀엽다는 것 이외에는…….”

    소개가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 모습에 주양개가 고개를 저었다.

    “외모 말고 무공 말이다.”

    “무공을 익혔어요?”

    “쯧쯧, 하늘을 보고도 몰라봤구나.”

    “하늘이요?”

    “내게는 그냥 언덕 정도겠지만, 너에게는 하늘이다.”

    “뭐가 하늘이에요?”

    “무공의 격차 말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한낱 시녀이겠냐? 최고의 시녀라고 자랑한다는 것은 더욱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럼 대체 최고라는 것이 무슨 뜻이에요?”

    “최고의 기연을 뜻하는 것이겠지. 아마 이곳에서 큰일이 벌어질 것이야. 아까 얘기를 들어 보면 팽 공자 측은 모든 준비가 끝난 것 같구나.”

    “그럼 알려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하마.”

    주양개는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착각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채 말이다.

    * * *

    한빈은 나루터가 한눈에 보이는 객잔의 창가에 앉아 있었다.

    그들의 주문을 받은 점소이는 눈을 크게 떴다.

    “저, 손님, 지금 당과하고 찹쌀떡이라고 하셨습니까?”

    점소이는 한빈을 조심스럽게 바라봤다.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의 요리를 시킨 것은 좋지만, 마지막 주문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였다.

    왜 고급 요리만 취급하는 이곳에서 당과와 떡을 찾는다는 말인가?

    점소이의 표정을 본 한빈은 조용히 품에서 은전 한 닢을 꺼냈다.

    “이건 자네에게 따로 부탁하는 것일세.”

    “헉, 감사합니다. 거스름돈으로 당과와 떡을 사 오겠습니다.”

    “아니, 음식값은 따로 내겠네.”

    한빈은 탁자에 두 개의 은전을 꺼내 놨다.

    탁.

    순간 점소이의 눈이 커졌다.

    점소이는 재빨리 탁자 위의 은전을 싹 쓸어 담더니 방아깨비가 까닥이듯 연신 허리를 숙였다.

    그는 곧 주방으로 달려가 주문을 넣더니 재빨리 밖으로 뛰어나갔다.

    아마도 당과와 찹쌀떡을 사러 간 듯싶었다.

    조용한 객잔 이 층에 이제는 한빈 일행만 남은 상태.

    설화는 뭔가 생각난 듯 조심스럽게 한빈을 바라봤다.

    “공자님,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뭐가 궁금한데?”

    “저희 하루빨리 사천당가로 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건 그렇지.”

    “그러면 이렇게 한가하게 있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설화는 말끝을 흐르며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이 이렇게 한가하게 앉아 있는 것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설화의 눈빛을 본 한빈이 창밖을 보며 턱짓했다.

    “저 배를 사천까지 가지고 갈 수는 없지 않으냐?”

    “아, 그렇군요.”

    설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청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림의 안위보다 저 배가 중요하다는 거죠?”

    “그건 아니지.”

    한빈이 손을 휘휘 저었다.

    그 모습에 청화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그럼 뭔데요?”

    “무림의 안위보다 중요한 건 너희의 간식이라 생각해서지.”

    “저희 간식이요?”

    “잘 생각해 봐. 내가 저기에 있는 보물로 가장 먼저 산 게 뭔지?”

    한빈의 말에 청화는 눈을 크게 떴다.

    저 배에 있는 보물로 개방에 부탁은 했지만, 물건을 산 것은 아니었다.

    물건을 산 것이라고는 여기에 와서 당과와 떡을 부탁한 것이 가장 먼저였다.

    커진 청화의 눈에서 살짝 습기가 차올랐다.

    그때였다.

    설화가 창밖을 가리켰다.

    “저기 배들이 슬슬 들어오네요.”

    설화의 말에 한빈도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서는 조그만 어선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해 질 녘이 됐으니, 어부들이 들어올 때가 됐지.”

    한빈의 말대로 배들은 거의 어선들이었다.

    제법 큰 어선의 경우 장정 열댓이 타고 있는 배도 있었고 작은 어선의 경우는 어른 한둘이 전부였다.

    그들은 어망에 물고기를 가득 담아서 나루터에 내렸다.

    * * *

    나루터에서 내린 어부들이 들고 오는 어망에는 파닥거리는 물고기가 들어 있어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어부들은 물고기가 든 어망을 들고는 선주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들이 타고 있는 배의 선주들은 대부분 따로 있었으며, 어부들은 그들이 잡은 물고기를 선주와 일정 비율대로 나눠야 했다.

    어부 중 하나가 말했다.

    “오늘따라 풍년이군.”

    “그러게, 이렇게 많이 잡힌 것은 처음이야. 상류에 있는 물고기가 다 떠내려온 것 같아.”

    그들의 대화에 이제 막 내린 어부는 고개를 푹 숙였다.

    고개를 숙인 어부는 무진이었다.

    무진은 어망 대신 자신의 딸 영아를 엎고 있었다.

    무진을 슬슬 눈치를 봤다.

    일단 선주를 피해서 집에 돌아간 후, 날이 밝는 대로 다시 그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려 했다.

    지금 이야기가 길어지면 자신의 딸 영아가 힘들 것이 안 봐도 뻔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무진의 어깨를 누군가가 톡톡 쳤다.

    고개를 돌린 무진의 눈이 커졌다.

    그곳에는 그의 선주가 눈을 빛내고 있었다.

    “어딜 그렇게 가나?”

    “아, 죄송합니다, 선주 어르신.”

    “내가 자네 부친께 은혜를 입어서 이렇게 배를 빌려주고 있긴 하지만, 번번이 돈도 안 내고 물고기도 나누지 않으면 나는 뭐가 되겠는가?”

    “죄송합니다, 어르신. 딸아이가 잠이 들어서 그러는데, 내일 찾아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니, 오늘 마무리 짓고 가게.”

    “죄송하지만, 딸아이가 피곤해해서.”

    무진은 고개를 숙이고 재빨리 자리를 피하려 했다.

    하지만 선주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무진의 어깨를 잡았다.

    “언제까지 딸아이 핑계를 댈 텐가?”

    “죄송…….”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떠나려던 무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선주의 손 때문에 영아에게 덮어 줬던 외투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휘릭.

    외투가 떨어지며 영아가 끌어안고 있던 붉은 검신이 딸려 나왔다.

    검신이 나루터 바닥에 뒹굴었다.

    쩔그렁.

    묘한 기운을 풍기는 붉은색 검날에 선주가 눈을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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