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5. 용린검의 비밀 (2)
이번에 얻은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세 개의 천급 구결이었다.
그리고 제갈세가를 아군으로 얻었다는 것.
외형적으로 봐서 가장 눈에 띄는 성과는 이 상선이었다.
이 배에는 암제가 평생 모아 놓은 재화가 쌓여 있었다.
이것은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성과였다.
어찌 보면 이 배를 발견한 것은 하늘의 뜻일지도 몰랐다.
목숨이 위태위태한 상황에서 이런 기연까지 얻었으니 말이다.
그때 한빈의 표정을 본 설화가 말했다.
“지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일은 운이 너무 좋았어.”
“지난번에는 운도 실력이라면서요?”
“그건 당연하지. 운도 실력이지.”
“저희도 운이 좋다고 생각해요.”
“너희가 운이 좋아?”
“공자님을 만난 게 운이 좋은 거지, 그거 말고 더 좋은 운이 어디 있겠어요?”
“흠, 그렇게 말하니 내가 할 말이 없네.”
한빈이 설화와 청화에게 각각 눈길을 준 뒤 조용히 출렁이는 강물을 바라봤다.
강물을 바라보고 있자니 위급했던 몇 시진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한빈이 소용돌이로 빠져든 뒤 마주했던 것은 미로였다.
문제는 그 미로 속이 밀려들어 오는 강물로 꽉 차 있다는 점이었다.
사실 미로가 아니어도 물속에서 언제까지 버틸지는 알 수 없었다.
인간이라는 게 물고기가 아니지 않은가.
내공이 아무리 고강하다고 해도 숨을 참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움직이지 않고 숨을 참는 방법은 있지만, 지금은 미로를 빠져나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숨을 쉬지 않고 움직이는 방법은 없었다.
그때 나타난 것이 설화와 청화였다.
그녀들이 가지고 있던 천잠사와 인면주사(人面蛛絲)를 이어서 미로를 통과했던 것이다.
기관 장치에 묶어 놨던 천잠사에 지하 공간에서 얻었던 인면주사라는 두 개의 실은 웬만해서는 끊기지 않았다.
이렇게 왔던 길을 표시해 놓자, 미로를 빠져나가는 데는 그리 힘들지 않았다.
그들은 오래지 않아 미로를 빠져나왔지만, 문제는 미로에서 모두 나오고 발생했다.
수중 미로의 입구까지 나온 후 갑자기 물살에 쓸려 갔다.
한빈의 지시에 따라 그들은 일단 물살에 몸을 맡겼다.
그 물살 자체가 마치 친절하게 어딘가로 안내를 하려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거기에 그들은 체력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다.
마침내 그들이 도착한 곳은 귀락천에서 가장 후미졌다고 하는 반사암(半蛇巖)이었다.
반사암은 마치 뱀이 똬리를 튼 것 같은 형상으로 이루어진 절벽이었다.
반사암의 유래는 간단했다.
전설에 의하면 용이 되려던 이무기가 어느 고수에 의해 반 토막이 난 채 석상이 되었다고 한다.
이무기의 원한이 하도 깊어서 근처만 가도 사람들의 사지가 마비된다고 전해지는 으슥한 절벽.
바로 그 밑에 암제가 평생 모아 놓은 재물이 한가득 있었다.
암제가 모아 놓은 재산은 한빈의 상상을 초월했다.
강호에서는 살 수 없는 진귀한 보석과 비급까지 있었다. 거기에 황궁의 물건으로 보이는 보물까지 드문드문 보였다.
이곳에 있는 재물의 가치는 아마도 십대세가가 가지고 있는 재산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십대세가 전체와 맞먹는 재산이라?
그 의미는 간단했다.
암제가 강호 제일의 갑부였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사람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암제가 퍼뜨린 헛소문일 수도 있었다.
사실 한빈이 더 놀란 것은 청화가 배를 몰 줄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청화는 상선 정도는 쉽게 운행할 수 있고 이쪽의 뱃길도 훤하다고 말했다.
이제까지의 모든 일을 생각해 보면 진짜 운이 좋은 것은 한빈이었다.
자신을 구해 주고 이런 재물까지 얻게 된 기연을 제공해 준 것이 설화와 청화였으니까.
그때 설화의 걱정 가득한 목소리가 들렸다.
“표정이 왜 그래요?”
“그냥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설화야.”
말을 마친 한빈은 청화를 바라봤다.
시선을 느꼈는지 청화가 고개를 돌렸다.
“사천까지 이틀이면 도착하는 거 맞지?”
“네, 사천당가에서 가장 가까운 나루터까지 하루하고 반나절이면 가고 거기서부터 빡세게 달리면 사천당가까지 정확히 반나절이에요. 공자님.”
청화는 자랑스러운지 어깨를 활짝 펴고 앞을 바라봤다.
그 모습을 뒤에서 보던 설화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청화야, 말투가 공자님 닮아 간다. 그럼 남장했다고 오해받아.”
“그럼 뭐라고 해요?”
청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음, 그건…….”
설화가 말끝을 흐렸다. 자기도 한빈과 오래 있다 보니 전에 말투를 잊어버린 것이다.
그 모습에 청화가 깔깔 웃었다.
“거봐요, 언니도 똑같잖아요.”
그렇게 그들이 탄 배는 순풍에 돛을 달고 사천을 향해 나아갔다.
맑은 햇살과 시원한 바람을 온몸으로 만끽한 한빈은 조용히 금이 간 월아를 검집에서 반쯤 빼 보았다.
이번의 격전으로 현철보다 단단했던 월아의 검신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
누가 뭐라 해도 이번 싸움에서 입은 손해였다.
거기에 생각지도 못할 손해가 한 가지 더 있었다.
그것은 바로 용린검의 반 토막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용린검을 떠올리자 한빈의 눈동자에서 감정이 살짝 요동쳤다.
그것도 잠시, 한빈은 바로 평정심을 되찾았다.
용린은 언제나 주인을 찾아온다는 전설이 있었기 때문이다.
용린검을 어떻게 하나로 합치는지에 대한 비밀도 풀지 못했는데 이렇게 잃어버린 게 아깝긴 하지만, 전설대로라면 알아서 자신의 손에 다시 들어올 것이라 믿었다.
뭐, 그렇게 믿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었다.
이번 싸움에서의 득과 실을 종합해 보면 어쨌든 득이 컸다.
반쪽짜리 용린검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천하제일이 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지금 이 배를 얻음으로써 한빈은 천하제일이 되었다.
물론 천하제일의 부자라고 해야 정확하지만, 어쨌든 천하제일인이 되었다.
강물을 따라 출렁이던 한빈은 감정이 정리된 듯, 그 눈동자가 평온을 찾았다.
그를 비추는 따스한 햇살처럼 말이다.
* * *
한편 암제와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장원은 지금 연무장을 중심으로 횃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당연히 지하 공간으로 이루어지는 통로를 복구하기 위해서였다.
어찌나 심하게 무너졌는지 그들이 복구한 것은 통로의 초입까지였다.
하지만, 통로의 초입을 바라본 문주익의 눈빛은 심상치 않았다.
이 정도로 정교한 기관 장치를 만들 수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갈공영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이것은 정파도 아니고 사파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마교 같지도 않았다.
무림에 새로운 세력이 나타났는데 정파나 사파, 마교 중 어느 곳도 아니라는 것은 문제였다.
문주익은 찝찝하다는 표정으로 통로를 바라봤다.
그때 그의 뒤에서는 현문과 제갈공영이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제갈공영의 손에는 기름종이에 싼 쪽지 하나가 있었다.
그 쪽지를 본 제갈공영의 눈을 한없이 떨렸다.
그것은 한빈이 현문에게 남긴 쪽지였다.
모든 일이 마무리된 다음, 이후의 일에 대해서 세세하게 지침을 준 것이었다.
쪽지를 다 읽은 제갈공영이 현문에게 물었다.
“대체 이 쪽지를 준 것이 언제란 말씀입니까? 현문 선배.”
“자네들을 구출하기 전에 써 준 쪽지라네.”
“정말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맞습니까?”
“내가 알기로는 맞네. 사천당가에서도 하북팽가의 일행과 합류했으니……. 그리고 그가 거짓말을 할 리도 없지 않은가?”
“네, 그렇죠. 그런데 이 쪽지에 적힌 내용으로 봐서는 팽가의 사 공자는 모든 것을 내다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허허. 그렇게 앞일을 내다봤다면 어찌 저 아래에 묻혔겠는가?”
현문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통로의 입구를 바라봤다.
제갈공영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닙니다. 죽지 않았을 겁니다.”
“허허, 그만 포기하래도. 제갈 가주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포기할 건 포기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네.”
“네, 그 말씀은 참고하겠습니다.”
현문에게 고개를 숙인 제갈공영은 조용히 문주익에게 걸어갔다.
“문 지부장, 나와 얘기 좀 할 수 있겠나?”
“말씀하시지요.”
“잠시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게 좋겠네.”
“네, 그러시지요.”
잠시 후 자리를 옮긴 둘은 대화를 나누었고 제갈공영의 말을 듣던 문주익의 눈은 한없이 커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문주익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문주익과 대화를 끝낸 제갈공영은 내공을 담아 모두에게 외쳤다.
“우리는 사천당가로 복귀한다! 그것이 은공에 대한 보답이다!”
그 말에 제갈세가의 사람들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그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다.
제갈공영의 말이 진리라는 듯 조용히 길을 떠날 준비를 했다.
* * *
다음 날 아침.
귀락천과 이어진 삼대천의 상류.
삼대천이라는 이름은 세 개의 하천이 모여 큰 강을 이루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삼대천에 이어진 하천 중 하나가 귀락천이었다.
그 이유로 삼대천의 상류는 어부들이 꺼려 한다.
어부들 사이에서 귀락천에서 나오는 고기를 잡으면 불행을 몰고 온다는 소문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끔은 이곳을 찾는 어부도 있었다.
그 어부가 바로 무진이라 불리는 이였다.
무진이 위험을 두려움을 무릅쓰고 이곳까지 온 이유는 딱 한 가지였다.
바로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삼대천은 하류로 가면 갈수록 강이 넓어진다.
즉, 상류 쪽은 강의 폭이 좁다는 말이었다.
폭이 좁은 만큼 물고기들이 한곳에 모여 있어 그물을 던지면 고기들이 만족할 만큼 잡힌다.
무진은 이를 악물고 그물을 던졌다.
휘릭,
미리 손질해서 온 그물이 강물에 풍덩 하고 잠긴다.
그의 표정에는 절박함이 담겨 있었다.
그 절박함이 이곳에서 잡은 물고기들은 불행을 몰고 온다는 미신을 무시하게 만들었다.
지금 그에게는 그따위 미신이 문제가 아니었다.
하루라도 빨리 많은 돈을 벌어야 했다.
그물을 던지고 때를 기다리는 무진의 뒤에서 메마른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쿨럭, 쿨럭.”
연이어 터지는 기침 소리에 무진은 그물을 고리에 걸어 놓고 다급하게 뒤쪽으로 뛰어갔다.
“영아야, 괜찮은 것이냐?”
“네, 괜찮아요. 아버지.”
“아무리 날이 따뜻해도 이불 좀 덮고 있으라고 해도.”
“괘, 괜찮……. 쿨럭.”
영아라고 불린 소녀는 기침을 토해 냈다.
무진은 영아의 몸에 이불을 덮어 줬다.
무진은 머릿속에 파란만장했던 몇 년간의 일들이 떠올랐다.
무진은 본래 어부가 아니었다.
부유한 학자 집안의 첫째였다.
무진은 착실히 가문을 이어받을 준비를 했다.
좋은 아내와 결혼해서 예쁜 딸도 낳았고 그의 생은 그렇게 순조로웠다.
그런데 어느 날, 마을에 전염병이 돌아 부모님이 죽고 나서는 무진이 집안을 이끌어야 했다.
강호 속담에 부자는 망해도 삼대는 간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무진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다.
전염병으로 사랑하던 아내마저 세상을 떠났다.
집안이 망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딸아이까지 시름시름 앓았다.
남은 재산마저도 딸아이의 약값으로 모두 써야 하는 상황이 되다 보니 딱 삼 년 만에 남아 있던 재산마저 날렸다.
하지만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남은 재산을 써서 딸아이를 지킬 것이었다.
다만, 돌팔이 같은 의원들에게 돈을 뜯긴 것은 가슴이 아플 뿐이었다.
그때였다.
그물이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투득. 투둑.
그물 안 물고기가 가득 찼다는 신호였다.
무진은 재빨리 그물을 잡아당겼다.
그물은 반쯤 모습을 드러냈다.
물고기들이 파닥파닥 그물 안에서 춤을 춘다.
아무리 이곳이 물고기가 잘 잡히는 곳이라고 해도 이 정도일 줄을 몰랐다.
이 정도면 불행을 무릅쓰더라도 이곳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슬쩍 올라간 무진의 입꼬리가 부르르 떨린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윽.”
그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토해 냈다.
갑자기 그물을 끌어 올리는 것이 힘에 벅찼다.
아무리 물고기로 가득 찬 그물이라고 해도 이렇게 힘든 적은 없었다.
조금만 더 건져 올리면 파닥파닥 뛰는 물고기들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물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때였다.
휙!
마치 누군가 잡고 있던 손을 놓은 듯 그물이 아무 저항 없이 당겨졌다.
그물을 잡아당기던 무진의 눈이 커졌다.
파닥거리던 물고기들이 모두 빠져나갔다.
그물을 끌어 올려 보니 그물이 끊어져 있었다.
무진은 다급하게 그물을 끝까지 잡아당겼다.
그 끝에는 그물을 끊어 놓은 물건이 같이 딸려 나왔다.
그것은 반 토막 난 검이었다.
그 모양이 얼마나 기괴한지 무진은 뒤쪽으로 물러나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때 반 토막 난 검의 검신이 무진의 배 위에 나뒹굴었다.
쩡그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