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 용린검의 비밀 (1)
쏴악!
거대한 고래가 물을 뿜듯 우물에서 막대한 양의 물이 위로 솟구쳤다.
그 사이로 얼핏 무복이 보인다.
물줄기를 타고 올라왔던 무복의 주인이 허공에서 한 바퀴 돌더니 바로 착지했다.
그를 확인한 제갈공영이 재빨리 달려갔다.
“현문 선배님,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모두 사라졌네.”
현문은 물에 젖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어찌나 세게 흔드는지 수염과 머리카락에 묻었던 물기가 사방으로 튄다.
제갈공영의 옆에 있던 정의맹 사천지부장이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당황하는 사천지부장에 아랑곳하지 않고 제갈공영이 다급히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지하에 있던 모든 것이 묻혔다네. 허…….”
그의 긴 한숨에 제갈공영의 가슴은 더욱 요동쳤다.
“그럼 팽 공자가 죽었다는 겁니까?”
“마지막으로 내가 본 것은 뜨거운 바람밖에 없다네.”
“그, 그럴 수가…….”
제갈공영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모습에 정의맹 사천지부장 문주익은 다급히 제갈공영을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괘, 괜찮다네.”
“지금 팽 공자라고 하셨습니까? 혹시 하북의 팽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라네. 못 들은 걸로 해 주게.”
“네, 알았습니다. 그런데 저희에게 군사 패와 서찰을 가져왔던 그 아이는 어디 있습니까?”
“그 아이라면…….”
제갈공영은 힐끔 강가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조금 있으면 설화와 청화라 불리는 아이들이 돌아올 것이었다.
제갈공영은 그 아이들에게 할 말이 없었다.
그들에게 어떻게 하북팽가 사 공자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단 말인가?
중요한 점은 한빈이 유명을 달리한 이유가 바로 제갈세가를 구하기 위해서라는 점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의맹 인원의 반 정도가 자리에서 빠져나갔다.
그들은 살아남은 괴인들을 정의맹 사천지부로 끌고 갔다.
그리고 나머지 반은 지금 무너진 통로를 파헤치는 중이었다.
제갈공영과 제갈공려를 제외한 제갈가의 식구들도 모두 작업에 투입되었다.
“영차!”
“그쪽은 조심하게.”
그들은 구슬땀을 흘리며 통로를 복구하고 있었다.
정의맹 무사들은 험한 꼴을 당한 제갈세가 사람들에게 휴식을 취하라고 했다.
하지만 제갈세가 사람들은 한사코 말을 듣지 않고 작업을 돕고 있었다.
모두가 은공을 돕기 위해서라고 외쳤지만, 은공이 누군지 말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정의맹 사천지부장 문주익이 한숨과 함께 혼잣말을 뱉었다.
“휴. 이건 관아에 인력을 요청해야 할 정도군. 해 줄지는 모르겠지만 부탁은 해 봐야겠어.”
“그 정도로 시일이 걸릴 것 같나?”
갑자기 나타난 현문이 물었다.
현문을 슬쩍 본 문주익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만…….”
말끝을 흐린 문주익은 현문을 관찰했다.
아무리 봐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무당파의 속가제자 신분이었던 문주익은 제법 뛰어난 무공 실력과 가문의 뒷배경을 무기 삼아 정의맹 사천지부장까지 올라왔다.
뭐, 강호에서 몸담은 기간도 그리 짧지는 않았다.
사천에 들렀던 무림명숙들의 이름과 얼굴은 모두 꿰차고 있었다.
그런데 눈앞의 사내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허름한 복장을 봐서는 거대 문파의 제자 같지는 않은데, 묘하게 현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문주익의 모습에 현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통로를 뚫어 주게. 은공의 시체라도 찾아야 마음의 짐을 조금이라도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네. 만약에 인력이 부족하면 사문에라도 기별을 넣게.”
“…….”
문주익은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의 사문은 무당파.
구대 문파 중에도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거대 문파였다.
그런데 무당파에 기별을 넣으라고?
대체 누구기에 저리 버릇없는 말을 한단 말인가?
문주익의 표정을 본 현문이 품 안에서 단검 하나를 꺼내더니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자네가 그런 권한이 없겠지. 기별을 넣을 때 이걸 같이 전하게.”
“이게 대체…….”
문주익은 말을 맺지 못했다.
현문이 건넨 것은 태극소검이었다.
태극소검은 무당파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신물이었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무당파의 시조인 장삼봉이 태극의 뜻을 풀어 단검에 나누어 담았다는 물건이었다.
태극의 신묘한 묘리를 일곱 개의 단검에 나누어 담고 그것을 일곱 명의 제자들에게 나누어 줬다는 것이 전설의 일부분.
그 태극소검은 아직도 일곱 개 중 남은 다섯 개가 전해지고 있는 상태.
그런데 대체 누구길래 그중 하나를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
다른 일이라면 그냥 넘어갈 수 있지만, 이것은 자신의 사문과 관련된 일이었다.
문주익은 재빨리 물었다.
“대체 당신은 누구시기에 무당의 신물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나는 현문이라 하네.”
“헉.”
“왜 그러는가? 뭐, 모를 수도 있겠지. 십 년이나 무당을 떠났으니 말이야.”
“그게 아니라, 진짜 현문 진인이시라는 말입니까?”
문주익의 눈빛이 떨렸다.
그때 옆에서 지켜보던 제갈공영이 끼어들었다.
“현문 선배가 확실하네. 내가 보증하지. 그런데 왜 그렇게 놀라나?”
“그, 그게 아니라…….”
문주익은 말끝을 흐렸다.
문주익이 이렇게 떨고 있는 이유는 반가워서가 아니라 두려워서였다.
사천 어딘가에 있다는 소문을 들은 것이 일 년 전이였다.
이미 사천을 떠나고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상대가 누구던가? 천살성을 타고난 희대의 망나니가 아니던가?
오죽하면 불상을 깎아 깨달음을 얻으라는 구실로 무당에서 내보냈겠는가?
그때 현문의 진한 한숨 소리가 문주익의 귓가에 들어왔다.
“휴. 은공이 무사해야 할 텐데…….”
“그러게 말입니다. 은공이 무사했으면 좋겠습니다.”
제갈공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문주익은 지금 수행하고 있는 작업보다 그들의 대화가 더 궁금했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에 등장하는 은공이 대체 누구란 말인가?
의문도 잠시, 문주익은 현문에게 깊숙이 포권했다.
“무당의 제자 문주익, 사숙 어르신께 인사드립니다.”
“예는 됐다. 여기는 아직 전장이다. 전장에서의 예는 불필요하다.”
“알겠습니다, 사숙님.”
문주익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일 때였다.
경계를 서고 있던 정의맹 무사 하나가 외쳤다.
“누군가 접근합니다!”
“신분을 확인하라!”
문주익의 말에 멀리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갈세가의 제갈휘라고 합니다!”
순간 제갈공영과 제갈공려가 한걸음에 그쪽으로 뛰어갔다.
그 뒤를 현문과 문주익이 쫓았다.
문 앞까지 단걸음에 뛰어간 제갈공영의 눈이 커졌다.
자신의 첫째 아들인 제갈휘가 눈앞에 있었다.
하지만, 상태가 문제였다.
온몸에 피를 흠뻑 뒤집어쓴 것으로 봐서 성한 곳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는 것 같았다.
제갈공영이 다급히 제갈휘의 어깨를 잡고 상태를 살폈다.
“상처부터 보자, 휘야.”
“이 피는 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대체…….”
“나중에 안 일이지만, 강 건너에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제갈휘의 설명을 듣던 제갈공영은 눈을 크게 떴다.
적의 조직은 생각보다 치밀했다.
이곳뿐 아니라 강 건너에도 적들의 경계조가 있었다고 한다.
제갈휘가 그 경계조에 발각되어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 나타난 것이 설화와 청화.
지금 그가 뒤집어쓴 피는 적들의 피고 말이다.
문제는 설화와 청화가 동귀어진을 발동시켜 수문을 연 뒤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는 것이었다.
여기까지 상황을 전달받은 제갈공영이 말했다.
“너는 왜 그곳을 지키지 않고 여기에 온 것이냐?”
“한 시진 동안 물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아무래도 그 아이들도…….”
제갈휘는 감정에 복받친 듯 말을 맺지 못했다.
제갈공영이 잠시 하늘을 올려다본 뒤 말을 이었다.
“은공은 우리 가문을 구하기 위해서 너무 많은 것을 버렸구나.”
“네, 맞습니다.”
제갈휘는 뒤를 돌아 강가를 바라보다가 허리에 찬 검을 꺼냈다.
그러고는 검집째 바닥을 찍었다.
쿵.
그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제갈공영이 말을 이었다.
“우리는 은공에게 빚을 졌다!”
제갈공영은 하늘을 보고 외쳤다.
그는 눈물을 살짝 글썽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 제갈가는 은혜는 은혜로, 원수는 원수로 갚는다.”
말을 마친 제갈공영이 검으로 바닥을 찍었다.
쿵.
이어서 제갈공려도 똑같이 바닥을 찍었다.
쿵.
그러고는 말을 받았다.
“이 검에 은공에 대한 은혜를 새긴다.”
내공이 담긴 목소리는 장원 전체에 퍼져 나갔다.
작업하던 인부들도 경건한 표정으로 검을 바닥에 찍기 시작했다.
쿵. 쿵.
마치 지진이 난 것처럼 울려 대자 현문도 검을 바닥에 찍고 나지막이 외쳤다.
“우리 무당도 은공의 은혜를 이 검에 새기겠소!”
쿵.
현문이 슬쩍 문주익을 바라봤다.
문주익은 그 기세에 눌려 똑같이 검을 바닥에 찍었다.
그 울림은 한동안 멈출 줄 몰랐다.
문주익은 얼떨결에 따라 했지만, 묘하게 가슴이 울렸다.
무당과 제갈세가가 빚을 지게 만든 은공은 대체 누굴까?
문주익은 검을 찍으며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 * *
귀락천의 하류.
상선 한 척이 유유히 강줄기를 따라가고 있었다.
상선은 작은 돛만을 편 채 빠르지도 않게 느리지도 않게 노닐 듯 강물을 헤치고 나아갔다.
커다란 상선의 규모에 비하면 갑판 위에는 소수의 인원만이 앉아 있었다.
백색 무복을 입은 여자아이 둘과 붉은색 무복을 입은 사내였다.
그 사내는 물론 한빈이었다.
한빈은 귓가를 후비며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왜 이리 귀가 가렵지? 혹시 누가 내 욕 하는 거 아니야?”
“욕할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러세요?”
설화가 두리번거리며 답하자 한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내 욕을 할 놈들은 다 물고기 밥이 되었거나 육포가 됐겠지. 그런데 왜 귀가 이렇게 가렵지?”
“귀에 물이 찼나 보죠.”
설화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자 한빈이 자신의 무복을 가리켰다.
“옷도 다 말랐잖아. 그런데 귀에 물이 남아 있을 리가 없는데.”
“옷은 여기서 새로 꺼내 입으신 거잖아요.”
“음, 그런가? 그래도 아무리 생각해도 물은 안 들어갔어.”
“그럼 혹시……. 그놈들이 저승에서 욕하는 건 아닐까요?”
“음.”
한빈이 있지도 않은 턱수염을 쓰는 시늉을 하자, 앞쪽에서 배를 몰고 있는 청화가 끼어들었다.
“이 배에 그놈들 전 재산이 들어 있는데 욕을 안 할 리가 있나요?”
청화가 씩 웃으며 갑판 아래를 가리켰다.
모두가 청화가 가리킨 곳을 바라봤다.
한참 동안 갑판 아래 창고를 바라보고 있던 한빈은 품속에서 야명주를 꺼냈다.
그가 주워 온 야명주는 총 다섯 개.
이 정도의 양이라면 중원 어디를 가든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다.
한빈은 그 야명주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목숨을 걸고 가져온 것이 푼돈이었다니…….”
“헤헤, 그래도 알뜰한 게 좋죠. 그게 공자님 생활신조 아닌가요?”
“흠, 딱히…….”
“뭐, 저도 챙겨 왔는걸요.”
설화도 품 안에서 야명주를 꺼냈다.
앞쪽에서 배를 모는 청화도 야명주를 꺼내 보인다.
그들은 서로를 보며 피식 웃었다.
한빈은 어깨를 으쓱하며 야명주를 다시 품에 넣었다.
이 야명주는 암제와 싸웠다는 증거일 뿐 지금 한빈에게는 그다지 가치가 없었다.
지금 이 배의 아래에는 야명주는 푼돈으로 만들 정도의 금은보화가 가득 쌓여 있으니 말이다.
한빈은 이번 싸움에서 잃은 것과 얻은 것을 생각해 봤다.
먼저 얻은 것을 떠올린 한빈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