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9.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1)
물론 항상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현재 한빈이 가지고 있는 안의 구결은 불과 한 개.
[안(眼) : ……]
한빈은 허공을 보며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동체 시력을 높여 주는 안의 구결도 사라졌다.
이번 깨달음이 없었다면 암제의 일 수를 제압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화룡편이 진짜 용의 기운을 품고 있는 물건이라는 점이었다.
만약 용린검법의 주인이 아니었다면?
암제의 말대로 그대로 몸이 분쇄되었을지도 몰랐다.
한빈이 용린검법의 주인인 덕분에 이기어검을 구사할 수 있는 암제도 화룡편에 대한 통제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중요한 것은 암제가 자신의 두 번째 애병이라고 한 화룡편을 더는 못 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화룡편은 어디에 있을까?
그 정답은 다음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있었다.
“이거 주웠는데 가지고 갈까요?”
한빈과 암제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물론 둘의 표정은 달랐다.
한빈은 그 어느 때보다 활짝 웃었다.
“설화야, 잘 챙겨라. 그거 비싼 거야.”
“네, 공자님. 대신 당과 꼭 사 주세요.”
“알았다, 약속하마.”
그들의 대화에 암제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이제까지 보인 적 없는 표정을 지었다.
암제가 바라보는 곳에는 벽에 박혔던 화룡편을 손에 들고 흔드는 설화가 있었다.
암제는 어이가 없다는 듯 설화를 바라봤다.
그것도 잠시 한빈을 향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껄껄. 날 흥분하게 만들고 내 애병까지 낚아채다니 천하의 대도(大盜)도 네 아래일 것이다.”
그 말에 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아직도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대단했다.
한빈은 그의 평정심이 오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번 깨달음으로 그의 경지를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지금 한빈이 암제와 정면 승부를 벌인다면?
아마도 백전백패일 터.
이런 계산마저도 깨달음 덕분에 예측이 가능해진 것이었다.
말을 마친 암제는 뒤쪽으로 물러났다.
그러고는 바닥에서 무엇인가를 찾았다.
아마도 금륜을 찾고 있는 듯 보였다.
금륜을 들고 쇄금진 밖으로 나와 한빈을 상대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그것도 잠시, 금륜을 찾는 암제가 당황하기 시작했다.
금륜을 찾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때였다.
다시 멀리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자님!”
그 목소리에 한빈은 고개를 돌렸다.
청화는 어느새 설화의 옆에 있었다.
설화가 청화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공자님 바쁘시잖아.”
“그래도 언니만 칭찬받았잖아요.”
“칭찬은 무슨 칭찬…….”
설화가 청화를 나무라려고 하다가 맘을 멈췄다.
청화가 뒤에서 뭔가를 꺼냈기 때문이다.
청화가 무언가를 흔들며 자랑했다.
“저는 이걸 주웠어요.”
이번에는 한빈도 놀랐다.
청화에 손에 들려 있는 것은 바로 암제의 애병인 금륜이었다.
한빈이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걸 왜 주웠어?”
책망보다는 진심으로 황당해서였다.
한빈은 암제의 눈을 피하라고 신호를 줬었다.
몸을 피하기도 바빴을 텐데 금륜까지 챙긴 것이다.
청화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공자님이 돈 되는 건 가능한 한 챙기라고 하셔서…….”
청화는 자신이 없는지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한빈이 활짝 웃으며 답했다.
“잘했다. 너도 한 달간 간식 걱정은 하지 마라. 돌아가자마자 가장 맛있는 찹쌀떡 장수를 알아보마.”
그들의 대화에 암제는 눈을 부릅떴다.
자신의 애병인 화룡편과 금륜이 당과와 찹쌀떡에 넘어갔다는 것이 황당했다.
다시 살심이 암제의 가슴에 차오르기 시작했다.
암제는 그 어느 때보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과나 찹쌀떡은 여기서 살아 나갈 때 먹을 수 있겠지. 잘린 목으로 어디 당과가 넘어가겠느냐!”
암제의 목소리에는 살기뿐 아니라 알 수 없는 힘이 서려 있었다.
암제를 도발하듯 웃음기 어린 얼굴을 유지하던 설화의 표정이 바뀌었다.
얼굴의 핏기마저도 점점 가셨다.
한빈은 재빨리 바닥에 떨어진 검 하나를 주웠다.
그러고는 바닥에 꽂았다.
푹!
그 소리에 암제가 고개를 돌렸다.
“진을 파훼하려는 것이냐?”
“아니!”
말을 마친 한빈은 다시 검 하나를 더 바닥에 박았다.
검은 푸른 검기를 일렁이며 청강석 바닥이 두부라도 되는 듯 아무렇지 않게 박혔다.
푹.
“진법을 바꿔 놨어. 진법을 파훼하는 것보다 이편이 빠르겠더라고.”
“네가 진법을 바꿨다고?”
“내가 없던 건 못 만들어도 있던 건 잘 바꾸거든. 그런데 진법이 바뀐 것도 못 느끼는 거야?”
“네가 진법까지 안다는 말이냐?”
“내가 좀 오지랖이 넓거든.”
“…….”
“아마 영감은 진법이 바뀐 것을 못 느낄 거야. 뭐, 마음만 먹는다면 진법을 또 바꿀 수도 있지. 이렇게!”
한빈이 언제 주워 왔는지 모를 검을 옆쪽에 던졌다.
백발백중의 효용을 품은 검이 청강석 바닥에 박혔다.
푹!
한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처음에 쇄금진에서 지금은 쇄토진(鎖土陣)으로 바뀌었을 거야.”
“대체 어떻게…….”
암제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눈썹을 꿈틀댔다.
그때 한빈이 뒤쪽을 보며 소리쳤다.
“서른여섯 번째 계획이다!”
“네, 공자님.”
설화가 답했다.
그러고는 석상을 향해 달려갔다.
석상을 향해 달려가는 것은 설화와 청화만이 아니었다.
제갈공려도 오라비인 제갈공영을 부축하고 있었다.
그 뒤로 제갈공영의 두 아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암제는 그 모습에 눈썹을 꿈틀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눈을 크게 떴다.
분노와 놀라움이 교차한 것이다.
쇄금진을 쇄토진으로 바꾸어 놨다는 한빈의 말을 처음에는 거짓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지금 보니 한빈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쇄토진은 토(土)의 기운을 가둔다.
토의 기운은 땅을 무겁게 만든다.
쇄토진에 묶인 사람은 무거운 땅의 기운 때문에 행동의 제약을 받게 되었다.
상대는 자신을 상대하려는 것이 아닌 발을 묶고 줄행랑을 치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암제는 황당한 듯 한빈을 바라봤다.
“늑대인 줄 알았는데 여우였구나.”
“나중에 봐, 영감. 볼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한빈은 말을 맺지 않고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제갈세가 사람들은 이미 뒤쪽에 있던 문으로 빠져나갔다.
한빈은 재빨리 문을 향해 달려갔다.
‘구걸십팔보.’
‘일촉즉발.’
일촉즉발의 수법이 더해지자 걷는 것이 아니라 문을 향해 날아가는 모양새가 되었다.
석상을 붙잡고 있는 현문과 점점 가까워지자 한빈이 외쳤다.
“현문 아저씨, 지금 석상을 놓고 문으로 들어가요!”
“알았다.”
현문이 석상을 놓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였다.
한빈의 뒤에서 가공한 파공성이 들려왔다.
파파팡!
문으로 향하던 한빈이 허공에서 천근추의 수법으로 바닥에 엎드렸다.
순간 거대한 물체가 한빈의 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한빈은 안력을 돋워 물체를 확인했다.
물체는 솥뚜껑 같았다.
검은색 물체가 막 닫힌 석상을 가격하고 다시 돌아갔다.
쐐에앵!
올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돌아가는 물체를 본 한빈이 눈을 크게 떴다.
아무리 봐도 암제의 애병인 금륜이었다.
그런데 크기가 몇 배는 더 컸고 색도 달랐다.
금륜이 금색 바퀴라면, 저것은 흑륜이라 불러야 했다.
그때였다.
흑륜이 다시 날아왔다.
한빈은 흑륜을 막지 않고 피했다.
흑륜이 석상을 다시 가격했다.
팡!
석상이 흔들리며 입구가 뭉개졌다.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팽 공자, 문이 안 열리네. 다른 출구를 찾아봐야겠네.”
“그냥 자리를 피하십시오.”
“대체 그게 무슨…….”
“그냥 피하십시오. 저는 아무래도 할 일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말을 마친 한빈은 월아를 다시 빼 들었다.
스르-릉.
그때 뒤쪽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자님! 이 문을 부술 테니…….”
목소리의 주인은 설화였다.
“됐다, 설화 너는 계획대로 해라.”
“계, 계획대로요?”
설화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래, 계획대로 해. 꼭 내 말 지켜야 한다.”
“아, 알았어요. 공자님.”
설화가 대답이 끝나자 석상 뒤쪽에서는 발소리가 울렸다.
한빈의 지시대로 모두가 이곳을 떠나는 듯 보였다.
발소리가 멀어지자 한빈은 고개를 돌려 암제를 바라봤다.
암제는 쇄토진 안에서 나와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진법을 다 부수어 놓았다.
진법을 부순 것은 암제의 손에 들려 있는 새로운 무기가 분명했다.
한빈은 그의 무기를 조용히 바라봤다.
“무기가 하나 더 남아 있었네.”
“내가 아까 말하지 않았더냐? 화룡편은 두 번째 애병이라고.”
“음, 첫 번째가 금륜 아니었어? 영감.”
“첫 번째가 바로 이 금강태륜(金剛太輪)이다.”
암제가 슬쩍 자신의 손에 들린 애병을 바라봤다.
한빈은 사실 이 상황이 기가 막혔다.
저 큰 무기를 어디에서 가져왔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빈의 표정을 본 암제가 슬쩍 미소를 보였다.
“네가 모르는 것도 있다니 신기하구나.”
주위를 둘러보던 한빈이 눈을 빛냈다.
“이제는 알았어, 영감.”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암제가 타고 있던 의자를 바라봤다.
의자에는 원래 있던 바퀴가 빠져 있었다.
아무렇게나 뒹구는 나무 의자를 확인한 한빈이 말을 이었다.
“몸을 의자에 맡긴 것이 아니라 영감의 애병을 의자에 가지고 다닌 거였네.”
“그렇게 꼭꼭 숨겨 둔 금강태륜이건만, 오늘 꺼내게 됐구나.”
“그런데 가진 게 그게 전부야?”
“그게 무슨 말이더냐?”
“아니야, 영감. 말이 헛나왔어.”
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암제의 몸에서 황금빛 점이 빛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빈이 그게 전부냐고 한 것은 그 점을 말함이었다.
그것은 분명히 천급 구결을 나타내는 점일 터.
방금 현문을 보며 이곳에서 할 일이 남았다고 한 것은 바로 천급 구결을 획득하기 위함이었다.
암제를 보내면 천급 구결이 언제 나타날지 몰랐다.
지금의 대결은 서로 원하는 것이 명확했다.
한빈을 손에 넣어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것이 암제의 의도였다.
반면 한빈은 구결 획득이 목표였다.
문제는 지금 암제와 대결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이 너무 명확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망하기는 일렀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씹으라는 강호의 속담이 있지 않은가?
무공으로는 이길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을 쓰면 되었다.
한빈이 암제를 바라보며 진득한 웃음을 지었다.
“영감, 내가 논검에서 마지막으로 쓸 초식이 뭔지 알아?”
“아직도 논검 타령이구나. 어디 한번 말해 봐라.”
“동귀어진이야.”
“…….”
암제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한빈을 노려봤다.
그때 한빈이 아래로 내려왔다.
탁!
일부러 힘을 실어 청강석에 발자국을 남긴 한빈. 그를 본 암제도 천천히 걸어왔다.
걸어오던 암제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걸어가는 간격만큼 한빈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기 때문이었다.
조금 전 흉흉한 기세로 자신의 앞에 선 상대가 이번에는 뒤로 물러선다라?
하지만, 암제는 의심을 거뒀다.
금강태륜을 든 이상 삼존이 와도 자신을 이길 수 없다 장담했다.
암제는 이제 급할 것이 없었다.
상자에 가둬 둔 쥐를 잡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렇게 쥐를 잡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즐거울 뿐이었다.
한빈과의 간격을 천천히 좁히고 일을 때였다.
암제의 귓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치치직.
귀에 익숙하지 않은 소리였다.
암제는 안력을 돋워 주변을 살폈다.
그때 바닥에서 작은 불꽃이 보였다.
그 불꽃이 점점 가까워졌다.
순간 눈앞에 번쩍였다.
동시에 울리는 굉음.
꾸아앙!
암제는 재빨리 금강태륜의 금강현무(金剛玄武) 초식을 펼쳤다.
순간 두 개의 태륜이 겹치더니 거북이의 등처럼 견고하게 암제의 앞을 막았다.
그때 암제의 옆구리로 부드러운 기운이 밀려들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