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6. 생사논검(生死論劍) (8)
‘일촉즉발!’
월아와 하나가 된 한빈의 몸이 허공을 갈랐다.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멀리서부터 일촉즉발을 사용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것은 한빈의 마음이 급했기 때문이다.
한빈은 마지막 글귀를 보는 순간, 지금이 바로 하늘이 준 기회라는 확신이 들었다.
한 단계 더 상위의 구결을 열 수 있다면 그것은 강호에서 흔히 말하는 벽을 뛰어넘는 것과 같았다.
벽을 뛰어넘는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단순한 무학에 대한 갈망은 아니었다.
현실적으로 지금 이 대결에서 생존 확률을 높여 준다는 뜻과도 같았다.
설화의 청화 그리고 나머지 모두의 생명까지 걸려 있는 일이었다.
한빈의 월아가 상대의 진청색 점과 점점 가까워진다.
다섯 걸음.
네 걸음.
한빈이 눈을 크게 떴다.
앞에는 환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괴인 둘이 생사결을 벌이고 있었다.
그중 하나의 괴인에게 구결을 나타내는 진청색 점이 보였다. 그러나 하필이면 진청색 점을 가진 괴인의 상태가 위태로웠다.
잘못하면 진청색 점을 가진 괴인의 목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백발백중.’
한빈은 품에서 은침을 꺼냈다.
그러고는 바로 진청색 점을 가진 괴인의 목을 베려고 달려드는 놈을 향해 날렸다.
휙!
은침이 용린의 기운을 품고 쏜살처럼 날아갔다.
파박!
은침이 눈에 박히자 상황이 역전되었다.
서걱!
진청색 점을 가진 괴인이 상대의 목을 베었다.
데구루루.
동시에 한빈이 진청색 점을 향해 파고들었다.
한빈의 월아가 진청색 점을 꿰뚫었다.
푹!
서로가 물고 물리는 접전 속에 승리자는 한빈이었다.
한빈은 재빨리 뒤로 물러나 글귀를 확인했다.
[용안으로 구결을 확인합니다.]
[지급 구결 상(上)을 획득하셨습니다.]
[지급 구결 일(一), 장(長), 난(亂) …… 상(上)]
[연관성이 없는 구결 지급 십(十) / 지급 십(十)]
[용린검법의 주인이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깨달음에 필요한 시간 일각.]
뭐지?
한빈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봤다.
의문도 잠시 새로운 글귀가 나타났다.
[잠시 후, 깨달음에 필요한 시간이 진행됩니다.]
[십(十)]
[구(九)]
[……]
갑자기 나타나는 숫자.
한빈이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숫자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오(五)]
[……]
한빈은 이것이 일종의 시험임을 직감했다.
깨달음을 위한 시험이라면 언제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시험을 내리는 시기가 묘했다.
여기에서 무아지경에 든다면?
백이면 백, 목이 달아날 것이 분명했다.
한빈은 최대 속도로 아수라장에서 멀어졌다.
파바박.
최대한 구석으로 간 한빈이 가부좌를 틀었다.
동시에 숫자가 바뀌었다.
[일(一)]
[깨달음의 시간이 시작됩니다.]
순간 한빈의 몸이 마혈을 제압당한 것처럼 멈췄다.
하지만, 몸만 굳었을 뿐 정신은 그대로였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모두의 행동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지하 공간의 가운데에 앉아 웃고 있는 암제의 모습도.
멀리서 이곳을 탈출하려고 괴아와 싸우고 있는 설화의 모습도.
환각에 사로잡혀 서로를 죽이는 괴인들의 모습도 말이다.
채-에-앵!
그들 사이에 울리는 병장기 소리까지 엿가락 늘어지듯 느리게 들려왔다.
이것이 깨달음인가?
분명 이전과는 다른 경험이었다.
무아지경이 든다면 본래의 감각은 철저히 차단되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모든 감각이 전보다 더 열린 느낌이었다.
이것은 용린검법의 주인만이 느낄 수 있는 기이한 깨달음일 터.
용린검법이 이런 깨달음을 통해서 가르쳐 주려는 것은 무엇일까?
그때였다.
환각에서 깨어난 몇몇 적들이 아수라장에서 빠져나왔다.
그들은 주변을 둘러보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누가 봐도 자신들을 그렇게 만든 한빈을 찾는 듯 보였다.
이 상황은 눈 깜빡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지만, 한빈의 눈에는 마치 반 시진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한빈의 눈에 비친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들 중 둘이 천천히 한빈에게 다가왔다.
그들의 동작을 보면 뛰어오는 것이 분명한데 한빈은 느릿느릿 걸어오는 것처럼 느꼈다.
한빈은 허장성세를 다시 한번 쓰기 위해 재빨리 초식을 떠올렸다.
하지만 진기가 돌지 않았다.
적은 한빈을 향해서 점점 다가왔다.
그때 한빈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정이 떠올랐다.
적에게 보이는 초식과 보이지 않는 초식.
적에게 보이지 않는 초식은 한빈의 몸에서만 맴도는 초식들이었다.
그 초식들의 특징은 특별한 동작 없이도 생각만으로 발동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깨달음의 시간이라는 이 조건 속에서 쓸 수 있을 것이었다.
한빈은 재빨리 이화접목의 수법을 떠올렸다.
‘자승자박.’
순간 한빈의 몸 주변에 은은한 기운이 감돌았다.
몸 주변에서 피어난 은은한 기운들은 마치 꽃봉오리와도 같았다.
그것이 점점 벌어지더니 하나의 글자를 만들었다.
한빈은 그제야 느꼈다.
용린의 기운이 자신의 몸에서 나타날 때는 글자의 형태로 나타남을 말이다.
너무 빨리 생기고 없어지고를 반복해서 그저 용린의 기운이라는 단어로밖에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자승자박의 초식이 한빈의 온몸을 감싸자 한빈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때였다.
두 명의 적들이 한빈을 향해 검을 들었다.
그러고는 바로 내리그었다.
휘-익.
파공성마저도 엿가락처럼 늘어져 들렸다.
사실 일도양단의 기세로 내려치는 그들의 모습은 느리기에 더욱 두려웠다.
이렇게 두려움을 느껴 본 것이 얼마 만이던가?
한빈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죽이지 못하면 자신이 죽는 것이 강호의 싸움이었다.
저들이 악인이라고 하지만, 저들에게는 상대를 죽일 권리가 있었다.
물론 상대가 강하다면 자신의 목을 내놔야 하지만 말이다.
한빈의 몸에 그들의 검이 닿으려 할 때였다.
한빈은 그들의 검이 향하는 곳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들은 둘 다 한빈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한빈은 재빨리 초식 하나를 더 떠올렸다.
‘금상첨화.’
금상첨화는 용린검법의 초식 중 신체 강화 수법이었다.
금상첨화로 강화한 것은 바로 머리.
금상첨화의 초식을 떠올리자 자승자박의 기운 위로 금상첨화의 기운이 섞인다.
한빈은 이 초식으로 머리와 목을 보호하기로 한 것이었다.
점점 다가오던 검이 한빈의 목에 닿았다.
타-아-앙.
순간 찌릿한 감각이 한빈의 몸을 관통했다.
그것은 바로 고통이었다.
고통을 이렇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일생에 없을 기회였다.
한빈은 고통마저도 천천히 음미했다.
신기한 일은 어떻게 고통이 머리로 전달되는지가 이제는 훤히 보인다는 점이었다.
그때였다.
검이 천천히 한빈의 목에서 튕겼다.
동시에 자승자박의 기운이 놈들의 검에서 손으로.
손에서 심장으로.
심장에서 머리로 흘러 들어간다.
순간 적들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터져 나오는 비명.
아악!
한빈은 그제야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몸을 움직이지 않고 적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그때였다.
멀리 있던 암제가 고개를 돌렸다.
지금의 광경을 보고 흥미가 동한 듯 입맛을 다시는 암제.
한빈은 그의 눈빛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암제가 타고 있던 의자의 쇠바퀴가 천천히 움직인다.
끼-이-익!
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몸은 움직이지 않지만, 청력이 평상시보다 몇십 배는 는 상태였다.
물론 시력도 마찬가지였다.
한빈의 눈에는 이전에 못 봤던 것들이 들어왔다.
암제가 탄 의자의 바퀴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것은 천년흑철로 만든 바퀴가 분명했다.
저 정도의 양이라면?
아마 유명한 상단의 재산을 모두 팔아도 모을 수 있을까 말까 하는 양이었다.
대체 저 많은 재산을 어떻게 모은 것일까?
그것도 신분을 숨기면서 말이다.
천천히 살펴보니 암제가 드러내지 않은 힘은 더 어마어마할 것만 같았다.
끼-이-익!
철판 긁는 소리를 내며 한빈에게 다가오는 암제.
그 소리에 멀리서 싸우고 있던 설화가 반응했다.
소리가 나는 곳에는 암제가 있었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한빈이 있었는데,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무아지경에 들어 있었다.
설화는 괴아의 거도를 걷어 내며 재빨리 청화를 불렀다.
“청화야.”
“왜요? 언니.”
“공자님을 좀 봐!”
“헉.”
청화도 한빈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입을 벌렸다.
설화의 외침 때문에 제갈공려와 제갈공영의 검도 멈칫했다.
그런데 그들을 공격하던 괴아도 뒤쪽으로 물러났다.
고개를 돌린 괴아가 암제를 바라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부님이 손을 직접 쓰시다니…….”
괴아는 다른 의미에서 놀라고 있었다.
치열했던 결전 속에 잠시 숨을 돌릴 틈이 생겼다.
그때였다.
괴아가 몸을 돌렸다.
눈앞에 있는 설화와 다른 이들은 필요 없다는 듯 한빈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순간 설화가 청화에게 말했다.
“못 가게 잡아.”
“지금요?”
“보여 줘도 괜찮아.”
설화의 말에 청화의 기세가 변했다.
청화의 몸에서 일렁이는 묘한 기운.
자리를 뜨려던 괴아도 걸음을 멈췄다.
괴아가 거도를 올리고 다가오는 청화를 맞이할 준비를 하자, 뒤쪽에 있던 제갈공영이 청화를 말리려 했다.
“지금 가면 위험…….”
“그냥 두고 물러나세요.”
설화가 제갈공영을 막았다.
제갈공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새로 나타난 인물인 청화가 공독지체의 능력을 지녔다는 것까지는 알았다.
하지만, 괴아는 절대 그녀 혼자 상대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 증거로 괴아는 자신을 포함한 다섯의 협공에도 버텼다.
아무리 공독지체라고는 하지만, 백색 무복의 소녀가 혼자 괴아를 상대한다고?
말도 되지 않았다.
공독지체는 말 그대로 독을 담는 신체.
안에 내용물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외모와 말투로 봐서는 공독지체를 타고났을 뿐, 공독지체에 필요한 맹독을 담았을 리 없었다.
게다가 공독지체를 타고났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써 본 경험이 없다면 무용지물이었다.
저대로 간다면 아까운 인물 하나가 강호에서 사라질 뿐이었다.
제갈공영은 검을 고쳐 잡고 괴아에게 뛰어들려고 했다.
그때 설화가 제갈공영의 소매를 잡았다.
“그냥 보고만 있으세요, 아저씨.”
그러고는 청화의 발아래를 가리켰다.
“대체 그게 무슨 말…….”
제갈공영은 말을 잇지 못했다.
청화가 지나간 자리가 검게 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청화는 검은 발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제갈공영은 검은 발자국이 의미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호신독기(護身毒氣)!”
그의 말은 맞았다.
지금 청화는 독기로 몸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었다.
사실 위급한 상황만 아니라면 이런 모습을 다른 이들에게 보여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은 한빈이 내린 지시였다.
강호에서 살아남으려면 일 할의 힘을 숨기라는 것.
물론 청화가 모르는 숨겨진 뜻이 있었다.
진정한 한빈의 뜻은 청화의 뜻대로 인생을 선택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청화의 독공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면, 수많은 도전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명성은 높일 수 있겠지만, 앞으로의 인생은 독인으로밖에 살아가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다 보니, 청화로서는 일 할이 아니라 구 할을 숨긴 셈이 되었다.
어쨌든 중요한 점은 지금은 그 힘을 써야 할 때라는 것이다.
그것이 설화와 청화의 판단이었다.
청화는 기세를 피워 내며 괴아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터벅터벅.
청화가 만들어 내는 검은 발자국이 괴아의 코앞까지 도착했다.
그때 괴아가 청화를 향해 거도를 내리쳤다.
팡!
거도가 내는 파공성이 주변에 울렸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괴아의 거도가 문턱에 걸린 것처럼 멈춘 것이다.
“으윽, 대체 무슨 사술이냐?”
“우리 공자님이 그랬어. 한번 힘을 보이면 인정사정 봐주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