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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324화 (324/621)
  • 324. 생사논검(生死論劍) (6)

    현문이 깜짝 놀라 물었다.

    “지금 뭐라고 했나?”

    한빈이 잽싸게 말을 이었다.

    “피하십시오. 그리고 두 분 다 숨을 멈추십시오.”

    현문이 당황하며 다시 물었다.

    “숨을 멈추라니…….”

    “지금 당장입니다!”

    한빈의 말에 현문은 제갈공려의 소매를 잡고 자리를 벗어났다.

    동시에 한빈의 주변을 중심으로 파란 연기가 피어났다.

    갑자기 적군과 아군이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자욱한 연기가 깔리자, 여지없이 암제가 기관 장치를 가동했다.

    휘휙!

    금륜을 날리자 다시 천장에 있는 기관 장치에 부딪혔다.

    탁.

    기관 장치가 다시 가동되자 파란 연기는 천장으로 빨려 들어갔다.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제갈공영은 연기가 다 없어지자 그제야 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허허, 낭패로구나.”

    그때 백색 무복을 입은 설화가 소리 없이 나타나 물었다.

    “왜 낭패인데요?”

    “어, 연막탄이 저리 힘없이 날아갔으니 팽 공자도 위험할 것이 아니더냐?”

    “저게 연막탄으로 보이세요?”

    설화가 고개를 갸웃하자 제갈공영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누가 봐도 연막탄 이외에 용도로 보이지는 않았다.

    “연막탄이 아니라면 왜…….”

    “연막탄이라면 왜 숨을 참으라고 하셨을까요?”

    “…….”

    제갈공영은 답하지 못했다.

    그러지 않아도 그 점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화가 배시시 웃으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기 보세요.”

    설화의 시선을 따라 제갈공영은 파란 연기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봤다.

    그때 묘한 일이 일어났다.

    괴인들을 따라온 괴아의 수하들이 동작을 멈춘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어찌 보면 지금처럼 석상이 된 채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은 당연했다.

    고수들 사이의 싸움에 저들이 낀다면 괴인들의 거도가 위력을 발휘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들이 자리 잡은 곳을 보면 포위망이 촘촘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때 제갈공영의 상념을 깨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도 같이 생문을 찾아요.”

    “너도 왔구나. 그런데 저 친구는…….”

    “지금은 팽 공자의 말에 따르는 수밖에 없어요.”

    “그래, 일단 우리도 탈출로는 살피자꾸나.”

    둘의 대화에 현문도 끼어들었다.

    “나도 돕겠소.”

    “감사합니다. 아까 들으니 현문이라 하던데 무당의 현문 진인은 아시시겠죠?”

    “외람되오나. 그 무당의 현문이 맞습니다.”

    “헉.”

    제갈공영은 적잖게 놀란 듯 입을 벌렸다.

    동생 제갈공민로부터 들었던 무림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이름이 바로 현문 진인이었다.

    가능한 한 말을 섞지 말라는 것이 정의맹 군사로 있던 동생의 부탁이었다.

    뭐, 동생의 말이 아니어도 현문은 무당제일의 골칫덩어리로 소문이 난 자였다.

    그의 놀란 표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현문이 말했다.

    “그보다 먼저 탈출로를 찾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너무 많은 인원이 움직이면 방해가 될지 모르니 말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제갈공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봐서는 무당파의 골칫거리가 아니었다. 지금 그의 말투에서는 상서로운 기운마저 느껴졌다.

    제갈공영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상대가 그 골칫덩이 현문이냐 다른 현문이냐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곳을 탈출하는 것이었다.

    적의 병력이 더 있을 수도 있고 암제의 무위가 이곳 모두를 몰살하고도 남아돈다 해도 이상치 않을 상황이었다.

    제갈공영은 하얀 무복을 입고 앞장서고 있는 설화의 뒤를 따랐다.

    설화는 마치 사냥개처럼 후각을 곤두세우며 조심스럽게 벽 쪽을 돌았다.

    설화는 수상한 곳이 나타나면 바로 손짓했다.

    “여기 좀 살펴 주세요.”

    설화가 말한 곳을 나머지 사람이 자세히 살핀다.

    그들이 살피는 동안, 설화는 다시 앞으로 나가 탈출구가 있을 만한 곳을 가리킨다.

    그들이 탈출구는 찾는 동안 암제는 그저 한빈에게 집중할 뿐이었다.

    탈출구를 찾는 이들을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이유는 간단했다.

    안에서 열 수 있는 문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곳을 처음 만든 것이 암제는 아니었지만, 이곳의 기관 장치를 손본 것은 그 자신이었다.

    저렇게 눈에 불을 켜고 살기 위해 뛰어다니는 것은 암제가 보기에 헛수고였다.

    그들이 발버둥 치면 칠수록 암제는 묘한 쾌감이 들었다.

    그것이 바로 사냥의 묘미였다.

    사냥감이 아무런 저항 없이 목을 길게 빼고 죽음을 기다린다면 그게 어떻게 사냥이 될 수 있겠는가?

    살려고 버둥버둥 몸부림치는 놈들을 잡는 맛을 느끼려고 사냥을 하는 것이 맞았다.

    그런 의미에서 탈출구를 찾는 이들은 암제에게 있어 살아 있는 장난감이었다.

    물론 그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한빈이었다.

    만약 십 년 정도만 늦게 만났다면 자신이 위험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암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강호에서 그런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자신이 무림인들에게 배신당했던 것처럼 말이다.

    암제가 나지막이 외쳤다.

    “한번 몸부림쳐 봐라!”

    작은 목소리였지만, 내공이 실린 목소리는 한빈이 있는 곳까지 화살처럼 뻗어 나갔다.

    그 목소리에, 한빈은 웃음으로 답했다.

    씩 웃은 한빈은 괴인들을 향해 말했다.

    “다들 똑같이 생겼으니 순서는 신경 안 써도 되겠구나.”

    “미친놈, 형제들의 피는 몇 배로 갚아 주겠다.”

    괴인이 조각조각 붙인 듯한 입술을 씰룩였다.

    그들의 대화 중에도 계속 공격과 방어가 오갔다.

    챙! 챙!

    여덟 개의 방위에서 내뻗는 거도.

    방위에 따라 그들의 펼치는 초식이 달랐다.

    남쪽과 북쪽에서는 횡으로.

    서쪽과 동쪽에서는 종으로 거도를 내리쳤다.

    그들의 거도를 피할 때쯤이면 동남과 남서에서 일직선으로 한빈의 가슴을 노리듯 거도가 뻗어 왔다.

    한빈은 가볍게 그들의 거도를 흘려보냈다.

    휙!

    이것이 가능한 것은 전광석화와 구걸십팔보의 조화 덕분이었다.

    한빈은 지금 구걸십팔보는 극성으로 펼쳐 날아오는 거도를 피하는 동시에, 전광석화를 통한 쾌검으로 다른 방향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받아서 흘리고 있었다.

    그들과 공방을 주고받는 한빈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수묵화처럼 수려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이 상황에서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누가 봐도 이것이 이 승부의 관건이었다.

    이런 공격과 방어가 언제까지는 이어질 수 없는 법이다.

    일 대 다수의 대결에서 불리한 것은 한빈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빈의 눈빛은 마치 낚싯대를 드리운 강태공처럼 여유롭기만 했다.

    챙! 챙!

    계속해서 방어하던 한빈이 짙은 미소를 흘리며 주변을 돌아봤다.

    드디어 때가 된 것이다.

    한빈이 외쳤다.

    “서로 죽여라!”

    그 외침에 괴인이 거도를 일도양단의 기세로 내리치며 말했다.

    “미친놈, 너나 뒈져라.”

    하지만, 그의 거도는 한빈에게 닿기 전에 멈췄다.

    뒤쪽에서 살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괴인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뒤쪽을 힐끔 바라봤다.

    괴인의 기괴한 얼굴이 일그러졌다.

    뒤쪽에서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초절정의 무사들이 눈을 까뒤집고 서로에게 검을 마구 휘두르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괴인을 향해 검을 뻗어 오는 중.

    괴인은 망설임 없이 그의 목을 향해 거도를 그었다.

    휙!

    털썩.

    검을 뻗어 오던 아군의 목이 바닥에 데구루루 굴렀다.

    그때, 근래에 느껴 보지 못한 감정이 살짝 꿈틀거렸다.

    그것은 바로 위기감.

    고통은 느끼지 못하지만, 분위기까지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상대의 기세나 분위기까지 못 느낀다면 그것은 무인에게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고통이라는 감각은 제거되었지만, 전투에 필요한 감정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괴인은 재빨리 몸을 돌렸다.

    하지만, 이미 늦은 듯 옆구리 쪽에서 위기감의 결과가 나타났다.

    푸쉭!

    그 소리와 함께 괴인의 옆구리에서는 폭포수처럼 핏물이 터졌다.

    동시에 괴인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고통은 못 느끼더라도 옆구리의 치명상에 신체 능력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

    한빈은 그 기세를 그대로 몰아서 계속 괴인들에게 치명상을 날렸다.

    ‘일촉즉발!’

    한빈의 월아가 괴인들의 허벅지, 복부, 어깨를 차례대로 썰고 지나갔다.

    하지만, 괴인들은 좀처럼 한빈에게 집중하지 못했다.

    그들의 뒤에는 눈에 초점을 잃고 강시처럼 달려드는 괴아의 수하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혼란에 빠진 이유는 간단했다.

    그것은 한빈이 던진 두 번의 연막탄 때문이었다.

    첫 번째 연막탄만으로는 효과가 없었지만, 두 번째 연막탄에 들어 있는 성분과 섞이자 그들이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반응은 바로 환각이었다.

    괴아의 수하들이 저리 날뛰고 있는 것은 바로 환각을 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모두가 적으로 보였다.

    만상팔괘진을 펼치고 있는 괴인들은 안쪽에서는 한빈의 공격을 막아야 했고 밖에서 미쳐 날뛰는 무사들까지 신경을 써야 했다.

    만상팔괘진은 안쪽에 적을 가두고 수십 배의 공격을 중첩해 피해를 일으키는 데 특화된 합격진이었다.

    밖에서의 공격은 속수무책.

    그때였다.

    한 괴인의 눈에 초점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거도를 같은 편에게 휘둘렀다.

    “아악! 죽어라!”

    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괴인들의 눈이 커졌다.

    괴인 중 하나가 외쳤다.

    “모두 운기조식하라! 독이다!”

    “우린 독에……. 억.”

    다른 괴인이 어깨를 잡고 부르르 떨었다.

    그들의 대화에 한빈이 끼어들었다.

    “독이 아니라 환각제.”

    “환각제라고?”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놈들인데 독에 대한 대처가 없을 리 없지. 그런데 말이야, 환각제는 독이 아니야. 다들 극락, 아니 지옥으로 가거라.”

    “비겁한 놈.”

    “칼에 묻은 남의 살점도 털어 내지 않는 짐승 같은 놈들에게 이런 말을 듣다니……. 네놈 손에 죽어 간 힘없는 자들의 원한이라 생각해라.”

    “으윽…….”

    비명이 입에서 터져 나올 때 한빈의 검이 그의 눈동자를 훑었다.

    사삭!

    동시에 괴인의 시야가 어두워졌다.

    지하 공간은 그야말로 혼란의 도가니가 되었다.

    물론 그 혼란에서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벗어났다.

    그러고는 구석에서 기대어 숨을 골랐다.

    잠시 숨을 돌린 한빈은 소매로 월아에 묻은 피를 닦아 내며 그들이 벌이는 살육을 감상했다.

    표정이 한계까지 일그러지는 것을 보면 아마도 공포라는 감정이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이것이 천벌일까?

    저들이 죽인 힘없는 자들이 얼마나 될까?

    상념도 잠시, 한빈은 자신의 소매를 바라봤다.

    소매는 노란색이 섞인 피로 얼룩져 있었다.

    한빈은 괴인들과 싸움 전에 처음 터뜨렸던 연막탄에 섞여 있던 성분을 월아에 묻혔다.

    한빈의 검에 당하기 전에 이미 두 번째 성분을 들이켰으니 그들이 환각제에 중독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한빈은 천천히 설화를 찾았다.

    설화는 구석구석 탈출구를 찾다가 잠시 멈칫하고 한빈을 보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들이 생각보다 과격해서였다.

    한빈이 어떤 일을 벌일지 설화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대규모로 살상이 벌어지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설화는 규모에 놀랐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참담한 광경에 고개를 돌렸다.

    그때 현문이 나지막이 도호를 외쳤다.

    “원시천존이시여…….”

    “현문 아저씨, 우리 코가 석 자예요.”

    “아, 그렇구나. 설화야.”

    말을 마친 설화는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눈매를 좁혔다.

    “일단 따라오세요. 이제 저곳이 마지막이에요.”

    설화가 멀리 떨어져 있는 석상 하나를 가리켰다.

    모두는 재빨리 설화를 따라 문을 막고 있는 듯한 석상 쪽으로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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