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3. 생사논검(生死論劍) (5)
한빈의 표정은 누가 봐도 이상했다.
한빈은 마치 사냥감을 발견한 듯 눈까지 가늘게 뜨고 있었다.
표정의 변화에는 물론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새로 나타난 괴인들에게 나타나는 진청색 점 때문이었다.
이 정도면 완성 못 한 지급 초식을 완성하고도 다른 초식까지 추가할 수 있는 양이었다.
가장 먼저 한빈의 표정에 반응한 것은 설화였다.
“공자님,”
“왜? 설화야.”
“표정이 너무 이상해요.”
“걱정하지 말아라.”
“그런 표정 지을 때마다 일이 좀…….”
설화는 말끝을 흐렸다. 원래는 꼬인다고 하려 했다가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을 떠올리고는 재빨리 끊은 것이다.
한빈이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내가 감당 못 할 적이라면 마지막 계획을 써라.”
“삼십육계요?”
“그래, 그 후에 해야 할 일도 알고 있지?”
“…….”
설화는 아무 말 없이 볼을 부풀렷다.
투정은 부리는 것은 아니었다. 한빈이 진심으로 걱정되어서였다.
한빈은 옆을 바라봤다.
“제갈공려 선배는 뒤쪽을 맡아 주십시오. 최대한 시간만 끌어 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현문 아저씨는 좌측을 맡아 주세요. 힘이 달린다 생각되시면 무조건 제가 있는 쪽으로 몰고 오셔야 합니다. 가능한 한 모든 적을 몰고 오십시오.”
제갈공려와 현문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팽 공자.”
“나만 믿게.”
한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꼭 제 쪽으로 몰고 오셔야 합니다.”
“알겠네.”
현문이 고개를 끄덕이며 제갈공려에게 턱짓했다.
순간 둘의 신형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둘이 자리에서 사라지자 한빈이 설화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설화야, 너는 우측에 있는…….”
“제가 맡으면 되죠?”
“아니, 너는 우측에 있는 적을 처음부터 내 쪽으로 몰고 와라.”
“네? 공자님이 그럼 여섯 명을 맡으시겠다고요? 저는 뭐 하고요?”
“너는 더 중요한 일을 해야 한다. 후각에 최대한 집중해서 나가는 문을 찾는 일 말이다.”
“음, 아쉽지만, 알았어요. 공자님.”
설화가 자리에서 사라지자 한빈은 월아를 다시 뽑았다.
스릉.
천장에서 수백 개의 야명주가 뿜는 빛을 머금은 월아는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로운 기를 빛냈다.
앞에 월아를 겨눈 한빈이 한 발 나가며 외쳤다.
“들어와!”
하지만,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명령을 기다리는 듯 꼼짝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지하 공간의 중앙에서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암제가 입을 열었다.
“전투를 허락한다.”
동시에 괴인들이 등에 멘 거도를 뽑았다.
스릉.
괴아가 쓰던 거도와 비슷한 크기로, 성인의 신장만큼이나 길고 성인의 몸통만큼이나 긁었다.
일반 검으로 상대한다면 단번에 두 동강이 날 정도로 흉흉한 기세를 뿜는 거도였다.
그들의 거도를 자세히 보니 머리카락과 피가 묻어 있었다.
옆면에는 살점 같은 조각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피를 닦아 내지 않는다면 병장기는 녹슬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저렇게 내버려 둔다는 것은 단 한 가지 경우밖에 없었다.
저 거도가 현철이나 만년한철로 만들어졌다는 것.
뭐, 천산의 천년흑철일 수도 있고 말이다.
적들은 준비성만큼이나 자금에서도 여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한빈은 검 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때 제갈공영이 조심스럽게 옆으로 다가왔다.
“나도 돕겠네.”
적에게 집중하고 있던 한빈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했다.
“산공독에 당하셨지 않습니까?”
“음…….”
“방해만 됩니다.”
“아, 알겠네.”
제갈공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십대세가의 가주로서 수치스러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는 재빨리 표정을 수습했다.
지금 자신의 상황을 확실히 파악했기 때문이다.
그때 한빈이 말했다.
“가주님이 하셔야 할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파란 연기가 피어오르면 최대한 숨을 참으라 식솔들에게 전해 주십시오.”
한빈은 이 말은 최대한 작게 말했다.
제갈공영도 한빈의 말을 듣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 숨을 참으라고 하는지는 몰라도 목소리를 낮춘 것을 보면 반드시 지켜야 했다.
제갈공영은 재빨리 뒤쪽으로 빠져 식솔들 사이를 누비며 한빈이 말한 내용을 전달했다.
그러고는 힐끔 한빈 쪽을 바라봤다.
한빈은 아직 적과 마주한 채 서 있기만 했다.
한빈의 뒷모습을 보니 태산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저 젊은 나이에 태산이 떠오를 정도의 기세를 뿜는다고?
이건 말이 되지 않았다.
현재의 정파 무림삼존도 한빈의 나이 때 저런 성취를 보이지는 않았다.
놀라움도 잠시, 갑자기 여기에 쫓아온 저 젊은이가 안타까워졌다.
제갈공영은 지금 중앙에서 팔짱을 끼고 싸움을 구경하고 있는 암제와 한빈을 비교해 봤다.
둘 다 자신이 파악할 수는 없지만, 암제가 몇 수 위인 것 같았다.
만약 십 년 후 한빈이라면?
한빈이 당연히 암제보다 앞설 것이었다.
제갈세가 때문에 앞으로 정파의 무림삼존 중 하나가 될 젊은이의 목숨이 날아가는 것만 같았다.
제갈공영은 여기서 살아 나가지 못해도 하북팽가, 아니 사 공자 한빈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했다.
제갈공영의 떨리는 눈빛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빈은 저들이 가지고 있는 진청색 점에 집중했다.
여기서 구결을 최대한 끌어올려 안심하고 있는 암제와 상대한다.
물론 암제와 상대하는 것은 생문을 찾을 때까지였다.
한빈이 재빨리 초식을 떠올렸다.
‘쾌검난마!’
필요 공력은 오 년으로, 마를 상대할 때 공격력이 십 할 증가하는 초식이었다.
동시에 구걸십팔보를 다시 펼쳤다.
공력이 아니라 속(速)의 속성을 사용하기에 다른 초식에 무리를 주지 않는 기본 보법.
한빈은 그들에게 달려들며 노호성을 질렀다.
“이놈들!”
단 한마디였지만, 단순한 외침이 아니었다.
초식 허장성세를 담고 있는 사자후였다.
허장성세는 한빈의 경지보다 더 높은 사자후를 토해 내며 상대를 경직시키는 초식이었다.
용린의 기운이 목소리를 타고 괴인들의 귓가로 흘러 들어간다.
그 목소리에 거도를 들고 있던 괴인들이 움찔하며 틈을 보였다.
한빈은 이것을 놓치지 않았다.
전광석화와 구걸십팔보가 조화를 이루며 괴인들의 사이를 누볐다.
서걱.
서걱.
한빈의 월아가 저항 불능의 상태에 빠진 적들의 요혈을 향해 치달았다.
누가 들었다면 한밤중에 가위질 소리로 착각할 만큼 거침없었다.
물론 한빈이 노리는 요혈은 진청색 점이 일렁이는 곳이었다.
한빈이 그들을 지나치자 괴인들이 쓰러졌다.
털썩.
그들은 바람에 나부끼는 수수깡처럼 바닥에 뒹굴었다.
한빈은 조용히 허공을 바라봤다.
[용안으로 구결을 확인합니다.]
[지급 구결 파(破)를 획득하셨습니다.]
[……]
[지급 구결 검(劍)을 획득하셨습니다.]
세 명을 해치우고 구결을 획득했다.
점은 세 개였지만, 획득한 구결을 두 개.
“쩝.”
한빈이 입맛을 다셨다.
그가 입맛을 다시는 이유는 간단했다.
구결을 획득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멀리 있는 암제의 표정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암제는 한빈이 내지르는 허장성세, 즉 사자후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때 쓰러졌던 괴인들이 천천히 일어났다.
그들의 표정을 본 한빈은 혀를 찼다.
괴아에게서도 느낀 거지만, 이들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진청색 점이 일렁이는 곳은 정확히 요혈이었다.
한 놈은 한쪽 팔을 못 쓰고 한 놈은 한쪽 자리를 절룩인다.
다른 한 놈은 몸을 흐느적거린다.
그런데도 눈빛은 죽지 않았다.
그때였다.
용린검법의 비급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한빈은 허공을 보며 괴인들을 향해 달려갔다.
서걱.
서걱.
한빈의 월아가 괴이들을 다시 쓸고 지나갔다.
[지급(地級) - 만(滿), 천(天), 파(破), 검(劍)]
이어서 뜨는 글귀.
[강호에 흩어진 용린검법의 초식을 발견했습니다. 지금 확인하시겠습니까?]
한빈은 계속 월아를 그어 나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이어지는 글귀.
[지급 초식 만천파검(滿天破劍)을 획득하셨습니다.]
[만천파검(滿天破劍). 당신이 깨뜨린 검의 조각이 하늘을 덮습니다. 만천화우도 만천파검에서 파생된 초식입니다. 검의 조각이 소나기가 되어서 떨어집니다. 그 소나기는 누구도 피해 가지 못합니다. 하지만, 소나기의 위력은 검에 영향을 받습니다. 일 갑자의 공력이 필요합니다.]
만천파검이라?
거기에 만천화우의 조상 정도 되는 초식이라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한빈은 재빨리 전체적인 상황을 살폈다.
한빈이 지시한 대로 그들은 무리하지 않고 적의 심기를 건드리며 몰아오고 있었다.
상황을 살핀 한빈은 재빨리 눈앞에 있는 적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바로 그들의 목을 향해 검을 겨눴다.
챙, 챙.
목을 썰고 지나가자 묘한 소리가 났다.
아마 목 쪽의 피부에 쇳조각을 심어 놓은 것으로 보였다.
한빈은 이번에는 심장을 노렸다.
챙. 챙.
마치 방패를 친 것 같은 묘한 소리가 난다.
한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그들을 괴아처럼 금강불괴로 만들 능력은 없지만, 다음번에 목숨을 잃을 만한 신체 부위를 인위적으로 바꾼 것 같았다.
옆을 보니 제갈공영은 눈치 빠르게 한빈의 옆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한빈 쪽으로 설화가 몰고 온 괴인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 괴인들의 뒤로는 당황하여 아무것도 못 하던 괴아의 수하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한빈은 슬쩍 제갈공려 쪽을 바라봤다.
그쪽도 마찬가지였다.
한빈의 쪽으로 괴인들을 몰고 오고 있었다.
세 방향에서 한빈 쪽으로 몰고 오자 지하 공간의 한쪽이 빡빡해졌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암제가 코웃음을 쳤다.
“머리가 좋은 놈인 줄 알았는데 자신의 힘을 과신하는구나.”
“제 형제들로 괜찮겠습니까?”
“아마도 이번에는 못 벗어날 것이다. 네 형제는 너와는 달리 합격진만 수련하지 않았더냐. 상대하려면 각개 격파를 했어야지. 저렇게 한곳으로 몰고 오다니, 놈의 운도 여기가 끝이구나.”
암제는 아쉬운 듯 한빈을 바라봤다.
잘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부서진 것처럼 아쉬워하는 표정이었다.
그의 표정에는 진심이 드러나 있었다.
그들이 펼칠 것은 만상팔괘진.
열두 명 중 여덟이 팔괘의 방향을 점하고 중앙에 있는 적을 공격할 것이었다.
남은 인원은 지친 인원 대신 들어가 자리를 채운다.
그렇게 되면 팔괘진은 열두 시진 넘게 돌릴 수 있었다.
가운데에 있는 목표가 맞이할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팔괘진이 펼쳐진다면 여덟의 공력이 하나처럼 움직일 것이다.
그 여덟 명의 공력은 다시 여덟 배의 공격력으로 나타나고 말이다.
그러니 한 명이 내는 공력의 예순네 배가 될 것이었다.
그 정도의 공력이라면 암제도 받아 내기 힘든 상황이었다.
아쉬움도 잠시, 암제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생명이 끊기지 않는다면 괴아의 형제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잘린 팔은 다른 팔로 이어 주고.
망가진 피부는 제갈세가 식솔의 얼굴을 포를 떠서 입혀 주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계속 이어 붙이다 보면 정신도 굴복하게 마련.
괴아나 그의 형제도 그렇게 만들어진 괴물들이었다.
가운데에 한빈과 제갈공려 그리고 현문이 남은 상태.
현문이 말했다.
“이쪽은 내가 맡겠네.”
“이쪽은 내가 맡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팽 공자.”
이제는 자신도 모르게 반 존대의 말투를 쓰는 제갈공려였다.
자신의 가문을 위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목숨을 버리는 하북팽가 사 공자를 아무렇게나 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때 한빈이 말했다.
“현문 아저씨와 제갈공려 선배는 이제 빠져 주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