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 생사논검(生死論劍) (4)
그 소리는 암제가 타고 있던 의자가 내는 소리였다.
철판 긁는 소리가 멈추자 암제가 입을 열었다.
“이제 네 재롱을 보는 건 그만해야겠구나.”
말을 마친 암제의 손에는 두 개의 금륜(金輪)이 들려 있었다.
금륜은 강호에서 흔치 않은 무기였다.
마차 바퀴처럼 생겼다고 해서 륜(輪)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륜을 무기로 쓰는 자는 딱 두 가지 부류였다.
암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인물이든지.
아니면 이기어검의 경지에 올랐든지 말이다.
륜은 크면 클수록 다루기가 힘들었다.
내뻗고 다시 회수하는 과정이 그리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암제의 금륜은 제법 컸다.
세 뼘 정도의 금륜은 수박을 올려놓을 수 있는 접시만 한 크기였다.
암제의 목소리에 한빈은 그의 표정과 손을 바라봤다.
한빈은 아까 자신의 검을 쳐 낸 것이 저 금륜임을 알아챘다.
금륜을 쓰는 고수라?
저런 특이한 무공을 쓰는 고수를 전생에는 마주한 적이 없었다.
낭중지추라는 말이 있다.
저런 고수가 앞으로도 이십 년 동안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확률이 있을까?
문제는 암제라는 자의 무위가 어느 정도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빈은 조용히 암제를 바라봤다.
그는 저 금륜으로 언제든 적의 목을 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는 것 같았다.
한빈은 다시 한번 암제의 무위를 예측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암제가 어느 정도의 무위를 지녔는지에 대한 깊이를 측정할 수 없었다.
한빈은 정면 승부는 피하기로 계획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곳에 있는 적을 그냥 놔둘 수는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 제갈세가의 식솔을 두고 그냥 갈 수는 없는 일.
한빈은 준비한 몇 가지 계획 중 하나를 실행하기로 했다.
암제가 다가오는 속도에 맞춰, 한빈은 뒷걸음쳤다.
동시에 손짓해서 설화에게 신호를 보냈다.
설화는 뒤쪽으로 속도를 내며 사라졌다.
누가 봐도 도망가는 모습이다.
누군가 사라지는 설화를 보고 비웃음 가득한 목소리를 낸다.
“하하, 이제야 꽁무니가 빠지게 도망치고 있구나.”
“저건 용기가 아니라 객기였지.”
“둘 가지고 우리와 맞서 싸운다는 것이 처음부터 말도 되지 않지.”
한빈은 비웃음 가득한 그들의 목소리가 그리 기분 나쁘게 들리지 않았다.
비웃음 속에서 섞여 나오는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한빈은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둘러봤다.
역시 눈빛이 변하지 않은 것은 오직 암제와 괴아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암제는 그들의 웅성거림에 어떤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한빈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꼼짝하지 않고 한빈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너는 어느 문파의 아이더냐?”
“내가 말해 주면 얼마를 줄 수 있는데?”
한빈은 처음처럼 활짝 웃으며 가볍게 되물었다.
암제가 눈을 반짝이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십대세가 중 한 곳이면 적당하겠느냐?”
“나를 너무 싸구려로 본 것 같은데.”
한빈이 검지를 들어 좌우로 흔들자, 암제가 기가 찬 듯 웃는다.
“하하, 말재주도 제법이구나.”
“영감도 말재주가 제법이야. 나중에 경극단에 들어가서 입 좀 털어도 되겠어.”
“내 간만에 웃어 보는구나. 하하, 재미있구나.”
암제는 무릎을 탁 치며 웃었다.
한빈은 그런 암제의 태도가 찝찝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광오함의 정도를 벗어났다.
모든 무림을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관조하는 저 태도란?
어쩌면 저자가?
한빈이 눈을 가늘게 뜨고 암제를 바라밨다.
과연 저자는 누굴까를 생각해 본 한빈은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혹시 흑룡단주?”
흑룡단주라면 아미백선과 종남흑선에게 들었던 적의 우두머리였다.
“…….”
암제가 아무 말 없이 한빈을 바라봤다.
그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
한빈은 자신이 말이 맞았음을 직감했다. 암제가 처음 보이는 당혹감이었다.
그것도 잠시, 암제가 웃기 시작했다.
“껄. 껄. 껄.”
지하 공간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심후한 내공이 담긴 소리였다.
일반인이 듣는다면 정신이 쏙 빠질 정도의 사자후.
뒤쪽에 있던 제갈세가 사람들이 움찔대고 괴아의 수하들도 한 발 뒤로 물러나고 있으니, 한빈의 평가가 과한 것은 아니었다.
암제는 허장성세에 버금가는 사자후를 토해 내고 있는 것이 맞았다.
그 웃음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암제가 말을 이었다.
“그건 나도 비밀이다. 하지만, 둘 중 하나의 조건이 충족되면 내 친히 가르쳐 주지.”
“그 조건을 내가 맞혀 볼까?”
한빈이 자신감 어린 목소리로 묻자 암제가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어디 맞혀 보아라. 정답을 맞힌다면 내 상을 내리지.”
“첫 번째 조건은 네 밑으로 들어오라는 거겠지.”
한빈이 손가락 하나를 폈다.
그 모습에 암제가 웃었다.
“오호, 제갈세가보다 네가 더 낫구나.”
“다른 조건은 아마 내가 죽으면 가르쳐 주겠다는 이야기겠지.”
한빈이 손가락 두 개를 펴자 암제가 무릎을 탁 쳤다.
“오호라, 정답이다. 그럼 네 선택은?”
“선택에 따라서 선물이 다르다는 건가? 영감.”
“당연히 다르지. 산 자와 죽은 자의 선물이 어찌 똑같을 수 있다는 것이냐?”
“영감도 제법이야. 그럼 나도 문제 하나 낼게.”
“좋다, 문제를 내보아라.”
“내가 둘 중에 어떤 선택을 할 것 같아?”
“너는 내 첫 번째 제안을 거부할 것이 뻔하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네가 내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었다면 이렇게 싸가지없이 말하지는 않았겠지.”
암제는 눈매를 살짝 좁혔다.
그도 그럴 것이 암제에게 말을 놓은 자는 여태껏 없었다.
마지막에 자신의 목에 검을 겨눈 무림인들조차 말을 놓지는 않았다.
한빈이 피식 웃었다.
“잘 아네. 그럼 정답은?”
“그러니 당연히 당연히 죽음을 택하지 않겠나?”
“땡!”
한빈이 고개를 흔들자 암제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틀렸다 했느냐?”
“틀렸어.”
“그럼 네가 나를 이길 수 있단 말이냐?”
“영감은 내가 그렇게 우둔한 놈으로 보여? 대충 봐도 영감은 견적이 나오지 않아. 상대가 경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덤비는 건 말도 안되지.”
“그럼 어떻게 할지 궁금하구나.”
“나는 세 번째 방법을 쓸 거야.”
한빈은 손가락 세 개를 폈다.
이어서 손가락을 편 팔을 높이 든 한빈은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 소리에 맞춰 한빈의 발밑에서 연기가 솟아올랐다.
야명주가 밝게 빛나고 있었지만, 연기를 막을 수는 없는 법.
순간 한빈의 신형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때였다.
괴아의 수하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모두 입을 막아라!”
“자리를 피해!”
“저쪽도 연기가 솟아오른다.”
“이쪽도 마찬가지다. 일단 호흡을 멈춰라!”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은 한빈의 발밑뿐이 아니었다.
연기는 지하 공간의 여기저기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괴아의 수하들은 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포위를 하고 있었는데, 모든 방향에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적잖게 소란이 일어났다.
괴아가 외쳤다.
“말을 하지 말고 호흡을 멈춰라!”
그때 암제의 금륜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그의 금륜이 천장의 어딘가를 가격했다.
챙!
그 소리와 함께 지하 공간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은 바닥에서 흘러나왔다.
바람은 연기를 천장으로 몰았다.
천장에 바깥과 연결되는 통로가 있는지, 연기는 곧 빠져나갔다.
점점 연기가 빠지자 드디어 한빈의 모습이 드러났다.
사라진 한빈이 나타난 곳은 제갈세가의 식솔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한빈의 계획은 간단했다.
그들을 데리고 이곳을 탈출하는 것이었다.
연기가 사라지자 한빈과 제갈세가 식솔이 있는 곳은 금방 들통이 났다.
괴아가 검지를 들어 그곳을 가리켰다.
“사부님, 저쪽입니다.”
“알고 있다.”
“잡아야 하지 않습니까?”
“잡아야지.”
“그럼 어서…….”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쓸 수는 없는 법.”
암제는 금륭을 천장으로 날렸다.
암제가 날린 금륜은 천장을 향해 날아갔다.
팡!
파공성을 내며 날아가는 금륜은 그 기세가 평범하지 않았다.
괴아는 고개를 들어 금륜이 날아가는 방향을 살폈다.
그곳에는 괴아도 모르는 커다란 종이 매달려 있었다.
금륜은 힘들이지 않고 종에 부딪혔다.
뎅!
종이 청량한 소리를 내며 울렸다.
종과 부딪힌 금륜이 다시 돌아온다.
묘한 것은 돌아오는 속도가 처음 날아간 속도보다 더 빠르다는 것이었다.
암제는 금륨을 받아 들고는 조용히 한빈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
한빈은 그 모습에 고개를 갸웃하고는 재빨리 자신이 왔던 통로로 빠져나가려고 몸을 돌렸다.
한빈이 제갈공영에게 말했다.
“따라오시지요.”
“그쪽은 기관 장치 때문에 못 나간다네.”
“괜찮습니다. 들어오면서 우리가 다 해체했습니다.”
“해체하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그때 옆에서 그림자 하나가 나타나더니 끼어들었다.
“맞아요, 오라버니.”
“헉, 너는 공려 아니냐?”
“맞아요. 하북팽가의 사 공자님이 도와주셔서 여기까지 왔어요.”
“하북팽가라고? 대체…….”
제갈공영은 말을 잇지 못했다.
한빈의 정체에 대해서 납득하지 못하는 것이다.
구걸십팔보를 펼치기에 정파라고는 생각했었다.
하지만, 하북팽가의 자제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
거기에 더해 지금 사 공자라고 하지 않았던가?
‘사 공자라면…….
제갈공영은 이내 고민을 털어 냈다.
이제까지 행동으로 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눈앞에 하북팽가의 사 공자밖에 없었다.
한빈이 누구든지 간에 지금은 그를 믿고 의지해야 했다.
그때였다. 한빈이 눈매를 좁혔다.
“뒤로 물러나시죠.”
“왜 그러나?”
제갈공영이 다급히 묻자 한빈이 검지로 통로의 끝을 가리켰다.
“지금 통로에서 고수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생문(生門)는 그쪽밖에 없지 않은가?”
제갈공영이 제안하는 것은 간단하다.
암제와 괴아보다는 저곳에서 몰려오는 고수를 뚫고 나가는 것이 유리하다는 말이었다.
한빈이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지금 저 생문이 사문(死門)이 되고 있습니다.”
“사문이라니…….”
제갈공영은 눈을 크게 떴다.
멀리 빛이 보이던 것이 없어지며 통로에서 굉음이 터졌기 때문이다.
쾅! 쾅!
마치 절구를 찧는 듯한 소리.
한빈이 말을 이었다.
“뒤로 피하십시오.”
동시에 한빈 일행은 통로에서 떨어졌다.
통로에서는 복면을 쓴 고수들이 튀어나왔다.
마지막 사람이 튀어나오자 통로가 닫혔다.
쿵!
마치 위쪽에서 거대한 바위가 떨어진 듯 통로는 막혔다.
제갈공영은 그제야 한빈이 사문(死門)이라 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저곳에서 복면인과 맞닥뜨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눈 깜짝할 사이에 육포가 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들이 뒤로 물러나자 복면인 중 하나가 한 발 나섰다.
한빈은 입맛을 다셨다.
복면인은 모두 세 명이었다.
복면인은 두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철두철미한 암제가 뒤쪽에 있다는 것이 찝찝할 뿐이었다.
그때였다.
세 명의 적이 복면을 벗었다.
휙!
순간 모두가 눈을 크게 떴다. 물론 한빈도 적잖게 놀랐다.
적의 얼굴이 모두 똑같았기 때문이다.
헝겊으로 기워 놓은 듯한 얼굴.
모두 괴아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빈은 힐끔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서는 암제와 괴아가 웃고 있었다.
괴아가 두 팔을 벌리더니 외쳤다.
“형제여!”
괴아의 외침에 세 명의 복면인이 답했다.
“형제여!”
그때였다.
다른 방향에서도 똑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형제여!”
한빈은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모두 확인했다.
한빈이 있는 방향을 포함해서 모두 네 곳에 똑같은 얼굴을 한 괴인이 있었다.
그들이 한곳에 섞인다면 괴아와 구분이 안 될 것이다.
순간, 제갈공려와 제갈공영은 조심스럽게 한빈을 바라봤다.
절망적인 순간에 믿을 것은 한빈밖에 없었다.
제갈공려는 고개를 갸웃했다.
한빈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