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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320화 (320/621)
  • 320. 생사논검(生死論劍) (2)

    제갈공영은 자신이 그동안 세가를 다스리는 데 소홀했다고 자책했다.

    저런 젊은이를 먼저 알아봤다면?

    아마도 제갈세가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있을 것이었다.

    한빈은 제갈공영의 뜨거운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진지한 표정으로 논검을 이어 나갔다.

    한빈이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는 비호출수(飛虎出手)로 당신의 오른손을 잡겠소…….”

    “……오호.”

    암제가 여지없이 탄성을 터뜨렸다.

    지금 반 시진 이상 이런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사실 암제는 논검의 맛에 흠뻑 젖어 든 상태였다.

    생각지도 못한 수법이 여기저기서 툭툭 튀어나오고 있었으니.

    그는 눈앞에 상대가 적이라는 것도 잠시 잊고 바둑을 두는 신선처럼 한 수 한 수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렇게 묘수를 터뜨릴 수 있는 것은 한빈의 기억 때문이었다.

    한빈에게는 전생의 귀검대 대주로서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 시절 한빈은 정의맹의 비무 일지를 외우다시피 했다.

    정파와 사파의 모든 초식을 섭렵하기 위해서였다.

    정의맹의 비무 일지는 강호에 알려진 비무에 대한 기록이었다.

    그 일지를 모두 섭렵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논검에 있어 통달하게 된 것.

    누구보다 더 많은 실제 경험이 더해지자, 한빈은 무림삼존에 버금가는 논검의 달인이 되어 있었다.

    전생에도 논검에 있어서는 달인이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지금은 그보다 더한 경험이 축적된 상태.

    천산혈랑과의 혈투에서부터 시작해 최근에는 독고련과도 일전을 치르지 않았던가.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논검이 내공이 아닌 초식만을 다루는 것이라는 점이다.

    내공은 몰라도 문파나 무림세가에 남아 있는 초식은 항상 변하기 마련이었다.

    물론 초식의 형태가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초식의 쓰임이 변하는 것이다.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지만, 십 년이면 초식이 두 번 변하고도 남을 시간이라고 말이다.

    암제의 논검은 한빈의 관점에서는 예스럽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네 시진이 지났다.

    아무리 한빈이라도 이제는 입에 침이 마를 정도였다.

    아군의 전투력은 고스란히 지키면서 정의맹의 지원군이 올 때까지 최대한 시간을 끈다.

    이것이 한빈의 목표였다.

    그때였다.

    탁자 위에 팔을 올려놓고 있던 괴아가 내공을 실어 목소리를 냈다.

    “사부님.”

    그 목소리에 논검을 이어 나가던 암제가 눈을 부릅떴다.

    “지금 무슨 짓이냐!”

    “사부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 보아라.”

    “제가 보기에 저자는 간악한 혀로 사부님을 놀리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사부님이나 무림삼존이라면 펼칠 수 있는 초식이지만, 다른 이라면 저런 초식은 무용지물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논검이라는 건 실효성이 있어야 하는데, 저자는 입만 산 자입니다.”

    “그래서?”

    “제가 저자와 초식을 직접 나눠 보겠습니다.”

    “몸이 근질근질한 모양이구나.”

    암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괴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괴아의 팔뚝에 묶였던 밧줄이 힘없이 끊겼다.

    우두둑.

    괴아가 한빈을 보며 걸어왔다.

    터벅터벅.

    그 한 걸음 한 걸음에 내공을 실어 걸어오는 괴아.

    그는 마치 한빈을 겁박하려는 듯 보였다.

    하지만, 한빈은 의문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헝겊을 기운 것 같은 얼굴.

    금강불괴의 신체.

    거기에 만만치 않은 기세.

    모든 것을 종합해 봤을 때 무림에 얼굴이 알려지지 않을 수 없는 자였다.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라면 몰라도 전생에도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

    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하나였다. 전생에는 저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누군가로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과연 누굴까?

    그때 괴아가 한빈의 앞에 섰다.

    “어디 네 재주를 한번 보자, 이 입만 산 놈아.”

    “입이라도 살았다고 해 주니 고맙군. 가만 보니 너는 입도 죽어 있었구나. 이거 미안하네.”

    “이곳이 어딘 줄 알고 입을 놀리는 것이냐?”

    “네가 그랬잖아. 입만 살아 있다고,”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리겠구나.”

    “현명한 자라면 관을 보기 전에 눈물을 흘리겠지. 그런데 어떻게 하지? 오랫동안 입을 털어서 그런지 눈물로 나올 물까지 모두 말라 버렸네.”

    그때였다.

    뒤쪽에 있던 암제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놈 참 제법이구나. 저놈에게 물을 가져다주어라.”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래야 목이 말라서 졌다는 소리가 안 나올 것이 아니냐?”

    “아무리 그래도…….”

    “어허, 멱을 딸 때 따더라도 싱싱한 놈의 목을 베는 게 맛이 아니겠느냐?”

    “알겠습니다, 사부님.”

    말을 마친 괴아는 수하들에게 눈짓했다.

    그 신호에 수하가 대나무 통에 든 물을 가지고 온다.

    괴아는 물통을 받아서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한빈에게 넘겼다.

    그것을 받아 든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대나무 통에 든 물을 들이켰다.

    “캬, 시원하다.”

    한빈이 입가에 흐르는 물을 닦아 내며 괴아를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친 괴아의 눈빛에는 증오가 담겨 있었다.

    이전에 보였던 살기와는 다른 감정이었다.

    사실 괴아는 이 중에서 한빈이 가장 미웠다.

    사부가 한빈에게 보였던 관심 때문이었다.

    암제는 괴아에게 저런 관심을 보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무리 잘해도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감정을 보이지 않았었다.

    그런데 갑자기 굴러들어 온 돌이 암제의 관심을 끈 것이다.

    괴아에게 암제는 사부 이상이었다.

    그는 친구였으며 부모이기도 했다.

    물론 친부모라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몸이 산산이 조각나서 죽어 가는 괴아의 살을 이어 붙여서 새 생명을 주고 무공을 가르쳐 새 인생을 살게 해 준 것이 암제였으니 말이다.

    다른 건 몰라도 암제의 관심을 빼앗는 사악한 놈은 용서할 수 없었다.

    괴아에게 논검 같은 것은 아예 안중에도 없었다.

    논검을 하는 척 놈의 앞에 가서는 사부가 말릴 틈 없이 바로 멱을 따 버릴 계획이었다.

    그때 한빈이 대나무 통을 다시 건넸다.

    “잘 먹었다, 괴아야.”

    “내 이름을 부를 자격이 있는 사람은 사부님뿐이다.”

    “그럼 내가 네 사부인가 보네.”

    “…….”

    대나무 통을 받아 든 괴아는 조용히 진기를 오른손에 불어 넣었다.

    동시에 대나무 통에 붉은 진기가 피어올랐다.

    그러고는 일도양단의 기세로 대나무 통을 한빈을 향해 내리그었다.

    부웅!

    붉은 기운이 한빈을 향해 맹렬히 달려들었다.

    그 모습에 뒤쪽에서는 암제가 소리쳤다.

    “괴아야!”

    “죄송합니다, 사부님. 죄는 달게 받겠습니다.”

    괴아는 미안한 표정으로 암제를 바라봤다.

    암제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게 아니다.”

    “네?”

    “적에게 집중하거라. 이것도 수업이다.”

    “그게 무슨 말씀…….”

    괴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상대의 머리가 박살 나서 사방으로 피가 흩어져야 할 텐데 그 어떤 타격감도 없었다.

    허공을 치는 듯한 허무한 느낌.

    괴아는 그제야 앞을 살폈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때였다.

    자신의 옆구리를 향해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괴아는 재빨리 몸을 날렸다.

    휙!

    옆구리를 스치는 예기.

    그것은 마치 달빛과도 같았다.

    괴아는 고개를 돌려 상대를 응시했다.

    상대는 괴아의 옆구리를 가리켰다.

    괴아는 옆구리에서 싸늘한 감각을 느꼈다. 검날에 베인 듯 옆구리 쪽 천이 갈라져 있었다.

    거기에 더해 피가 천천히 배어 나왔다.

    깊은 상처는 아니라는 이야기.

    그때 상대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진짜 금강불괴는 아닌가 봐?”

    “뭐라?”

    “검기도 쓰지 않았는데 그렇게 베이는 걸 보면 말이야.”

    “…….”

    괴아는 아무 말 없이 상대를 바라봤다.

    상대는 자신의 허점을 잘 알고 있었다.

    괴아는 아직 진정한 금강불괴를 이루지 못했다. 그저 부분적으로 금강불괴를 이루었을 뿐이었다.

    금강불괴라 불릴 만큼 신체를 강화할 수 있는 것은 일부분에 한정되었다.

    극성의 호신강기를 신체 일부에 둘러서 금강불괴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팔에 집중하면 팔이 금강불괴처럼 보이고.

    머리에 집중하면 머리가 금강불괴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처럼 신경을 못 쓰는 곳은 적에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괴아는 상대에게 발가벗겨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것이 괴아의 이성을 잃게 했다.

    괴아가 외쳤다.

    “죽어!”

    말을 마친 괴아는 한빈을 향해 달려들었다.

    뒤쪽에서 그들을 바라보던 암제는 그저 흥미롭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가 보기에 여기 모아 놓은 적들은 잡아 놓은 물고기였다.

    강가에 잡아 놓은 물고기가 아니라 집까지 가져온 물고기는 놓칠 염려가 없었다.

    어떻게 요리를 해서 먹느냐?

    언제까지 살려 두느냐의 선택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지금 한빈에 대한 호기심이 일고 있지만, 그것은 유흥에 불과했다.

    한빈의 움직임을 바라보던 암제의 눈이 커졌다.

    “구걸십팔보?”

    순간 멀리서 마주 보고 있던 제갈공영의 눈도 함께 커졌다.

    제갈세가에서 구걸십팔보를 익힌 이가 있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제갈세가의 식솔이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구걸십팔보를 알아보지 못했겠지만, 중원의 모든 무학을 학문처럼 공부하는 제갈세가였기에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다만, 암제가 이것을 알아봤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었다.

    제갈공영은 지금 해야 할 일을 알았다.

    그는 나지막이 외쳤다.

    “개방에서 가져온 구걸십팔보를 저리 자연스럽게 익히다니 대체……!”

    물론 그것은 거짓이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제갈세가의 사람은 아니었다.

    제갈세가의 사람이 아닌 자가 목숨을 걸고 저 앞에 있다는 것은 정의맹의 선발대가 도착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저자는 시간을 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저자가 제갈세가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들키는 순간, 시간 끌기는 작전은 물 건너간다.

    제갈공영은 암제에게 그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연기를 한 것이었다.

    제갈공영은 놀란 눈으로 한빈을 바라보는 동시에 암제의 표정을 살폈다.

    암제가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흠, 여기서 나가는 대로 제갈세가의 비고부터 확인해야겠군. 개방의 무학까지 입수할 줄이야…….”

    말을 마친 암제는 조용히 괴아와 한빈의 대결을 바라봤다.

    암제는 정말 기가 찼다.

    제갈세가에 저런 인물이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암제는 한빈만은 살려 두기로 했다.

    어떤 방법을 써서든 자신의 수하로 거둘 것이었다.

    그만큼 탐이 났다.

    수하로 거두는 것에 성공한다면 괴아와 함께 자신이 천하를 군림하는 데 훌륭한 기반이 될 것이라 확신했다.

    한빈은 지금 내공을 안 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중이었다.

    전광석화와 구걸십팔보는 용린검법 중 빠름을 나타내는 ‘속’의 속성을 소모하는 초식.

    일정한 속도만 넘어서지 않는다면 상대는 제갈세가의 식솔들처럼 산공독에 당한 상태라고 착각할 것이었다.

    한빈이 이렇게 시간을 끄는 데 집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암제의 존재 때문이었다.

    아무리 경지를 파악하려고 해도 알 수 없는 존재.

    그것이 바로 암제였다.

    그렇다면 한빈이 이제까지 만났던 사람들보다 위라는 것이었다.

    저렇게 의자에 앉아 있다는 것이 다소 안심되긴 했지만, 그것마저도 극복할 무위를 가지고 있다면 한빈뿐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든 이가 몰살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때였다.

    누군가 괴아에게 거대한 도를 던졌다.

    휙.

    그것을 받은 괴아가 거도를 잡았다.

    “고맙다.”

    수하를 보고 피식 웃는 괴아.

    헝겊 조각이 기워진 듯한 얼굴이 괴이한 웃음을 짓는다.

    괴아의 거도가 공간을 가르며 한빈을 향해 날아왔다.

    팡!

    귓가를 울리는 파공성.

    이제 괴아도 한빈을 봐줄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괴아의 거도에서는 붉은 도기가 짙게 배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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