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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318화 (318/621)
  • 318. 전대고수(前代高手) (4)

    저건 보통 무사가 아닌, 추적을 전문적으로 하는 정의맹의 특위대 무사들이나 가능한 일이다.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현문이 입을 벌렸다.

    그제야 벽이 가루처럼 사라진 것이 떠오른 것이다.

    진각 한 번에 벽이 사라졌을 때도 놀랐지만, 이곳으로 넘어오며 잠시 잊었었다.

    대체 하북팽가에서는 이런 괴물을 어떻게 만들어 낸 것일까?

    현문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건 하북팽가의 작품일 수 없었다.

    분명 정의맹에서 만든 비밀 병기임이 분명했다.

    그때 한빈이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적들이 사용하는 장소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최대한 기척을 죽여야 합니다.”

    잠시 후.

    한빈은 별 어려움 없이 천리추종향이 가리키는 곳에 도착했다.

    점점 강해지는 추종향.

    그 추종향과 함께 짙은 혈향이 함께 풍겨 왔다.

    한빈은 모두에게 손을 들었다.

    순간 뒤쪽에서 따라오던 일행은 재빨리 동작을 멈췄다.

    모두가 한빈 쪽으로 모였다.

    현문이 다급하게 한빈의 옆으로 붙었다.

    “이제 다 온 것인가?”

    “저길 보시죠.”

    한빈은 검지로 통로의 끝을 가리켰다.

    현문이 안력을 돋워 한빈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봤다.

    “오, 저기 끝이 보이는군.”

    말을 마친 현문이 그곳을 발걸음을 떼려 하자 한빈이 그의 소매를 잡았다.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일단 기척을 숨기고 가는 편이…….”

    현문은 말을 맺지 못했다.

    통로의 끝에서 반짝이는 칼날을 보았기 때문이다.

    번쩍.

    섬광 한 줄기를 뻗은 칼날은 뭔가를 가르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서-걱!

    동시에 짙은 혈향이 풍겨 나온다.

    현문은 그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보았다.

    사람을 토막 내는 거대한 칼날.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반 토막 난 사람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것이다.

    현문이 입을 벌렸다.

    저 칼날을 막는다고 해도 소란은 피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잘못하면 여기까지 기척을 숨기고 들어온 것이 모두 수포로 돌아간다.

    현문이 낮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뱉었다.

    “아직 수행이 얕구나, 얕아. 득어망전이라…….”

    도호를 외치듯 눈빛을 갈무리하는 현문의 모습에 제갈공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시시때때로 외치는 현문의 말에 호기심이 절로 동했다.

    이번 일이 끝난다면 반드시 물어봐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때 한빈이 설화를 바라봤다.

    눈빛만으로 설화가 다리에 찬 우혈랑검을 꺼냈다.

    한빈도 품에서 좌혈랑검을 꺼냈다.

    둘이 통로 앞에 서자, 제갈공려와 현문은 자연스럽게 뒤쪽으로 물러났다.

    뒤쪽에 선 제갈공려는 고개를 갸웃했다.

    한빈과 설화가 눈빛만으로 대화하는 것이 신기했다.

    제갈공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한빈이 바닥을 가리켰다.

    한빈의 손짓에 설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에, 한빈은 품에서 가죽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그러고는 가죽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무언가를 한 움큼 꺼냈다.

    한빈은 손바닥을 펼치고는 조용히 입김을 불었다.

    그 입김에 손 위에 있는 가루들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그 가루는 한빈의 입김이 산들바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통로를 자연스럽게 스치고 지나갔다.

    뒤쪽에 있던 현문이 눈을 크게 떴다.

    “허허, 저런 솜씨라니…….”

    “놀라운 것은 팽 공자의 저 한 수가 아니에요.”

    제갈공려가 맞받아쳤다.

    “자세히 보시오. 저 한 수에 얼마나 싶은 뜻이 숨겨져 있는지를 말이오. 지금 저 입김 한 번에 가루를 끝까지 보냈다는 것은 공간을 장악하고 있다는 말이오. 그게 놀랍지 않다는 말이오?”

    “그런 수법이야, 연습만 하면 할 수도 있죠.”

    “그럼 무엇이 놀랍단 말이오?”

    “저 가루가 무엇인가 하는 거죠.”

    “그것이 왜 놀랍단 말이오?”

    현문이 고개를 갸웃하자 제갈공려가 통로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 가루의 정체를 아시나요?”

    “저렇게 뿌릴 정도면 저잣거리에서 파는 곡물의 가루가 아니겠소?”

    “저건 발광버섯을 빻아서 만든 가루예요.”

    “발광버섯이라면…….”

    “발광버섯이란 놈은 백 년이 지나면 스스로 빛을 내죠. 문제는 그 버섯의 가격이죠.”

    “얼마나 되길래 그렇게 놀란단 말이오?”

    “저 정도 양의 가루라면……. 족히 발광버섯 한 근은 빻아서 만들었을 테니……. 대충 계산해 봐도 우리가 들어온 이 저택 정도는 살 수 있어요.”

    말을 마친 제갈공려의 눈빛이 깊어졌다.

    처음에는 제갈세가를 뜯어먹으려는 지나가는 승냥인 줄 알았다.

    그런데 제갈세가를 위해서 저렇게 귀한 물건을 쓴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되었다.

    뒤쪽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던 설화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공자님. 저 얘기가 진짜예요?”

    “…….”

    한빈은 그 물음에 말없이 설화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 설화의 눈이 커졌다.

    한빈이 남을 위해서 이렇게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었다는 것이 이상했던 것이다.

    사실 조금 걱정도 되었다.

    심경에 변화가 생겼다는 것은 어찌 보면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죽을 때가 되면 마음이 변한다고 말이다.

    설화는 상상도 하기 싫은 가정에 고개를 저었다.

    그때 한빈이 입 모양으로 말했다.

    “무슨 헛소리야. 이건 천수장의 무를 갈아 만든 거다.”

    “아!”

    설화는 입 모양으로 탄성을 터뜨렸다.

    역시 제갈가를 위해 막대한 자금을 쓸 위인은 아니었다.

    그게 설화의 마음을 놓이게 했다.

    사람이라는 건 한결같아야 오래 사는 법이니까.

    그때 한빈이 검지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한빈이 가리킨 검지는 바닥을 향했다.

    그것도 잠시, 한빈은 검지로 선을 그어 보였다.

    한빈의 검지를 따라 시선을 옮기던 설화가 말했다.

    “와. 이제 보여요.”

    설화는 눈을 크게 떴다.

    한빈이 불어 넣은 야광 가루가 통로에 휘날리며 바닥에 깔린 얇디얇은 실에 붙은 것이다.

    그 실에 야광 가루가 붙자 눈에 보이지 않던 실이 자연스레 보였던 것.

    한빈이 말을 이었다.

    “설화야, 그 실을 자를 때는 조심해야 한다.”

    “네, 공자님. 중독 안 되게 조심할게요.”

    “중독은 걱정 안 해도 되는데, 그 실은 재활용해야 하니 잘 챙겨 두라는 얘기야.”

    “재활용이요?”

    “그래, 재활용. 이렇게 비싼 인면주사(人面蛛絲)를 쓰다니 누가 만들었는지 대단하군.”

    말을 마친 한빈은 입맛을 다셨다.

    그 모습에 설화는 마른침을 삼켰다.

    한빈의 표정을 보니, 인면주사가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한빈이 설화를 바라보며 작게 말했다.

    “지금.”

    그 말과 함께 한빈과 설화가 동시에 인면주사를 잘랐다.

    서걱.

    서걱.

    얇은 실이지만 마치 쇠줄이 끊기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편하게 자른 것 같지만, 둘이 동시에 줄을 끊지 않으면 남은 칼날들이 쉬지 않고 회전하게 된다.

    그렇게 설화와 한빈은 계속 기관 장치를 제거해 나갔다.

    뒤쪽에 있던 제갈공려는 다시 한번 마른침을 삼켰다.

    저리 편하게 함정을 제거하고 있지만, 기관진식과 진법의 전문가인 그녀가 볼 때는 둘의 호흡이 놀라웠기 때문이다.

    제갈세가에 저 함정 제거를 맡긴다면?

    기관진식의 전문가를 데리고 와도 저들처럼 빨리 처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거기에 한빈과 설화가 가지고 있는 단검도 보통 물건이 아닌 것 같았다.

    한빈이야 하북팽가의 직계라고 하지만, 저런 보검을 가지고 있는 시녀가 있을 수 있을까?

    그때 한빈이 손짓했다.

    와도 된다는 신호였다.

    제갈공려와 현문은 조용히 한빈에게 걸어갔다.

    한빈은 통로 쪽에 아무렇지 않게 걸터앉아 있었다.

    그곳으로 간 제갈공려는 다시 한번 눈을 크게 떴다.

    아래쪽에는 제갈가의 식솔들이 괴인들에게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었다.

    그 괴인들을 본 제갈공려의 눈이 커졌다.

    그러고는 재빨리 그들을 향해 달려들기 위해 용천혈에 진기를 모았다.

    그때였다.

    픽.

    날카로운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는 한빈이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순간 갑자기 몸에 힘이 풀린 제갈공려는 바닥에 쓰러졌다.

    그녀의 몸이 바닥에 닿으려 할 때 한빈이 손을 뻗었다.

    덥썩!

    제갈공려는 받쳐 든 한빈이 나지막이 말했다.

    “제갈공려 선배, 일을 그르칠 것이면 마혈을 풀어 주지 않겠습니다. 가만히 있을 것이라 약속한다면 눈을 두 번. 싫다면 그냥 있으십시오.”

    “…….”

    마혈을 제압당한 제갈공려가 두 번 눈을 끔뻑였다.

    픽.

    한빈이 제갈공려의 마혈을 풀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제갈공려가 말을 이었다.

    “서둘러 주시게.”

    “상대의 무위를 파악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

    제갈공려는 말없이 한빈을 바라봤다.

    지금 아래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침착할 수 있다니.

    그녀가 보기에 한빈은 단순한 비밀 병기가 아니었다.

    노고수의 느낌이 물씬 나는 것으로 봐서 반로환동한 자일 수도 있었다.

    제갈공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한참 나이 차이가 나는 한빈에게 갑작스러운 존대를 하는 제갈공려.

    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만큼 지금 한빈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 * *

    한편 암제와 제갈공영의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둘 다 한빈 일행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는 못했다.

    물론 암제와 제갈공영의 상황은 전혀 달랐다.

    암제는 음식점에서 어떤 것을 먹을까를 고민하는 손님처럼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제갈공영은 활시위의 앞에 선 허수아비처럼 무기력하게 암제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암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제갈세가와는 논검으로 대결하는 게 좋겠군.”

    “논검이라…….”

    제갈공영의 눈에 살짝 희망 어린 빛이 감돌았다.

    논검이라면 제갈세가를 따라갈 가문 혹은 문파가 중원에 존재하지 않았다.

    논검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쉽게 말하면 말싸움이다.

    상대의 초식이 완벽하다는 가정하에 초식의 순서나 초식 간의 관계만을 따져서 승부를 내는 것이다.

    이것은 무공의 이해와 지식에서 중원 누구보다도 앞서가는 제갈세가의 특기와도 같은 분야.

    내기에 이겨서 이곳에서 벗어난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시간을 벌 기회가 왔다는 것에 희망을 품고 있는 것이다.

    제갈공영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제갈공려가 이곳을 찾아올 때, 제갈세가만이 아닌 지원군을 데려오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때 암제가 말을 이었다.

    “누가 나서겠는가?”

    암제의 옆에 있던 괴아가 한 발 나섰다.

    “제가 나서겠습니다. 사부님의 제자인 제가 나섰으니 저쪽에서도 형평성에 맞게 직계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럼 네가 골라라.”

    “네, 사부님.”

    괴아는 제갈공영을 지나쳐 그의 둘째 아들인 제갈명을 끌고 왔다.

    그 모습에 괴아의 수하들은 재빨리 탁자와 의자를 준비했다.

    괴아가 의자에 앉자 그 수하들은 제갈명을 억지로 의자에 앉혔다.

    괴아가 왼팔을 탁자 위에 올려놨다.

    수하들이 제갈명의 왼팔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묶는다.

    제갈공영은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알 수 없었다.

    논검을 하지고 해 놓고 왜 저런 행동을 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다음 행동에 제갈공영은 눈을 크게 떠야 했다.

    괴인들이 탁자의 가장자리에 칼날을 끼워 넣은 것이다.

    칼날 두 개가 탁자에 결합되자 탁자 자체가 작두가 된 모양새였다.

    그 모습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뜬 제갈공영이 암제를 바라봤다.

    암제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피어났다.

    그 미소를 머금은 체 암제가 입을 열었다.

    “자, 이제 승부를 시작해 볼까? 자네와 내 논검 결과에 따라 자네 자식이나 내 제자, 둘 중 하나의 팔이 잘릴 것일세.”

    “헉.”

    제갈공영의 눈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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