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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317화 (317/621)
  • 317. 전대고수(前代高手) (3)

    벗겨진 복면 속 드러난 얼굴은 다름 아닌 자신의 둘째 아들 제갈명과 셋째 아들 제갈수의 얼굴이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그들 중에는 자신의 호위까지 있었다.

    물론 자신의 진짜 호위는 바로 뒤에 있지만.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제갈공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암제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 하. 하.”

    실내가 쩌렁쩌렁 울렸다.

    살기 가득한 그의 웃음소리가 벽에 반사되어 고막을 찢을 듯 파고 들어왔다.

    순간 제갈공영은 주위를 바라봤다.

    자신이 있는 곳이 지하임을 알게 된 것이다.

    창문만 없다뿐이지 여느 창고와 똑같아서 지상에 있는 줄 알았더니 지하라니!

    제갈공영은 드디어 암제의 진정한 뜻을 알았다.

    이곳이 지하라는 것은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려는 의도였다.

    제갈공영은 그 치밀함에 치를 떨었다.

    또한 제갈세가의 식솔들과 똑같이 변장한 그들의 정성에 다시 한번 놀라야 했다.

    저들의 의도는 간단했다.

    여기 있는 제갈세가 식솔들이 모두 사라진다면?

    분명 저들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단순히 제갈세가와 원한을 풀기 위함이 아니었다

    만약 다른 가문도 그렇다면?

    제갈공영은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그 모습에 암제가 입을 열었다.

    “하하, 이제야 감이 잡히나 보군.”

    “그럼 저들 중에는 내 얼굴도 있겠군.”

    “제갈세가의 머리에서 나오는 추리치고는 조금 실망스럽군. 네가 실권을 잡고 있다면 후계자를 정하는 데 애를 먹겠지.”

    “…….”

    제갈공영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입술만을 바라봤다.

    슬며시 웃음 짓는 암제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착각하지는 말게. 제갈세가에서 애먹는다는 얘기가 아니라 우리가 애먹는다는 얘기일세. 그래서 한 번에 쓸어버리려고 이렇게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게 아닌가?”

    “음.”

    제갈공영은 낚시라는 뜻을 정확히 깨달았다.

    “그러지 않아도 물고기 두 마리가 이곳으로 헤엄쳐 오고 있다고 막 소식이 왔더군.”

    암제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쪽지를 흔들었다.

    “…….”

    “물고기 두 마리와 나머지 피라미들이 도착하는 대로 남은 인원도 편안히 보내 주지.”

    “이런 미친놈!”

    “고맙네. 원수의 자식에게 듣는 욕은 칭찬이지. 하하.”

    다시 암제의 웃음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 * *

    한편, 지하 수로를 통과하고 있는 한빈은 갈림길을 맞닥뜨렸다.

    양쪽을 바라보던 한빈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한쪽을 바라봤다.

    막 한빈이 그쪽으로 향하려 할 때였다.

    제갈공려가 다급히 물었다.

    “그쪽으로 가는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는가?”

    “음, 그게…….”

    한빈이 살짝 말끝을 흐리자 제갈공려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혹시 기감에 의존해서 선택한 것인가? 그렇다면 잠시만 기다리게. 내가 진법이나 기관에 대해서는 자네보다 나을 테니 살펴보도록 하지.”

    “기감에 기대는 것만은 아닙니다.”

    물론 한빈의 말은 사실이었다.

    기감이 아니라 후각에 기대어 인도하는 것이니까!

    제갈공려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다시 물었다.

    “그럼 대답 못 하는 이유가 뭔가?”

    “영업 비밀입니다.”

    “앗, 비밀…….”

    제갈공려가 한빈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빈은 그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선택한 길로 나아갔다.

    사실 이유는 간단했다.

    비둘기에 달려 있던 전서 통은 제법 좋은 물건이었다.

    불에도 타지 않는 대나무인 천년죽을 사용한 전서 통이었다.

    그런 전서 통을 일회용으로 쓸 일은 없을 터.

    분명히 답신을 할 때도 그 전서 통을 쓰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한빈은 전서 통의 안쪽과 바깥쪽에 모두 천리추종향을 발라 놨다.

    아니나 다를까.

    상대는 한빈의 예상대로 그 전서 통에 전서를 넣어 답신했다.

    그 증거가 바로 통로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추종향이었다.

    덕분에 일이 한결 수월해졌다.

    수로가 제법 복잡했기에 추종향의 효과는 더욱 빛났다.

    앞서가는 한빈을 본 제갈공려는 마른침을 삼켰다.

    왠지 기관진식에서 제갈세가가 하북팽가에게 뒤처진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건 말도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평소라면 자신이 앞서 나가며 통로를 살펴야 했다.

    이런 통로라면 팔괘와 오행의 원리가 반드시 들어가게 되어 있으니.

    그런 오행과 팔괘를 이용해서 진법을 만들던 것이 바로 제갈세가였다.

    대충 지나오니 통로가 어떤 식으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까지 한빈이 안내한 길 중에 틀린 길은 하나도 없었다.

    정답을 이미 봤기에 풀이와 이해가 쉬웠을 뿐.

    마치 누군가 수로로 들어오면 내보내지 않겠다는 듯 길을 꼭꼭 숨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문제는 그런 한빈이 기감에만 의존해서 안내한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한빈을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한 제갈공려가 나지막이 외쳤다.

    “잠시만, 기다리게!”

    “왜 그러십니까?”

    “아무래도 보통 수로가 아닌 듯싶군.”

    “보통 수로가 아닌 건 들어오면서부터 알았습니다. 잘 보십시오. 이렇게 정리가 잘된 수로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저들이 상주해 있는지 가끔 오는지는 몰라도, 제갈세가의 식솔을 납치할 정도의 규모라면 여기에 물이 흘러나오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럼 오행과 팔괘에 의해 만들어진 통로라는 것도 알고 있나?”

    “대충은요.”

    “흠, 알고 있었다니 안심이네.”

    “그럼 계속 가시지요.”

    한빈은 씩 웃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 뒷모습을 본 제갈공려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빈의 얘기를 들어 보니 기감에만 의존해서 생로를 찾는 것이 아닌 것 같아서였다.

    왠지 무림 말학인 하북팽가 사 공자의 등이 지금은 태산처럼 크게 보였다.

    한빈은 조그만 방에 들어서자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주변을 둘러봤다.

    향기가 이곳을 가리키기는 하지만 길이 더는 보이지 않았다.

    한빈은 눈을 감고 조용히 추종향에 더 집중했다.

    한참을 생각하던 한빈이 고개를 올려 천장을 바라봤다.

    천장에는 주먹만 한 구멍이 있었다.

    조금 더 집중하니 그 구멍 사이로 빛이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이곳은 적들의 수뇌부가 있던 방의 아래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 방의 존재는 적들도 모를 가능성이 있었다.

    아직까지는 들키지 않고 은밀하게 침투할 수 있다는 의미.

    한빈은 주위의 벽을 조심스럽게 더듬었다.

    대충 이 방의 구조를 보면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은신처가 분명했다.

    또한 수로도 밖에서 이곳으로 들어오기 위한 것이 아닌, 외부로 피신하기 위한 것이 분명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위쪽과 이어지는 장치가 있을 것이다.

    그때였다.

    설화가 코를 씰룩이더니 고개를 갸웃한다.

    강아지처럼 벽 쪽에 코를 갖다 대고 킁킁대며 살피는 설화의 모습에, 한빈이 말했다.

    “어떤 기관 장치가 있을지 모르니 조심해.”

    “네, 공자님. 그런데 이쪽에서 음식 냄새가 나요.”

    “음식이라고?”

    한빈이 눈을 가늘게 뜨며 설화가 가리키는 곳으로 달려갔다.

    설화가 가리킨 곳은 아무 표지도 되어 있지 않은 벽이었다.

    한빈도 냄새에 집중해 봤다.

    신체의 모든 감각을 코에 집중하자, 설화의 말대로 음식 냄새가 났다.

    그 음식이란 벽곡단이었다.

    벽곡단 특유의 곡물 말린 냄새가 살짝 벽에서 흘러나왔다.

    평소라면 한빈이 저 냄새를 못 맡았을 리 없지만, 지금은 천리추종향에만 온 감각을 집중했던 터라 놓친 것이다.

    설화가 한빈이 놓친 것을 찾아냈으니, 훌륭하다 할 수 있었다.

    설화가 마치 칭찬을 기다리는 강아지의 눈으로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은 설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했다. 일 년 치 간식은 내가 보장하지.”

    “정말이죠?”

    “당연하지. 계약서라도 써 줄까?”

    “계약서는 사양이에요.”

    “그럼 나는 마저 이곳을 살필 테니 조금 물러나 있어라.”

    한빈은 조용히 벽을 바라봤다.

    벽을 바라보던 한빈은 조심스럽게 이곳저곳을 두드렸다.

    기관 장치가 있을지 몰라 조심하는 것이다.

    만약에 함부로 이곳을 뚫었다가 기관 장치에 연결되어 있는 줄이라도 끊게 된다면 낭패였으니까.

    한참을 살피던 한빈이 동작을 멈추었다.

    “설화야, 일단 물러나 있어라.”

    “네, 공자님.”

    말을 마친 설화는 조용히 뒤쪽으로 빠져서 나머지 사람들을 몇 발짝씩 뒤로 물렸다.

    한빈은 벽을 바라보며 용린검법의 초식 중 하나를 떠올렸다.

    ‘진룡무영수(眞龍無影手).’

    한빈이 가지고 있는 용린검법의 초식 중 가장 은밀한 초식.

    효과적인 침투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초식을 떠올리자 용린의 기운이 말초신경에서부터 서서히 살아나기 시작했다.

    사사-삭.

    노도처럼 밀려드는 용린의 기운이 단전으로 모인다.

    단전으로 모인 기운이 혈맥을 따라 흐르기 시작했다.

    혈맥을 통해서 달리기에는 그 기운의 양이 많았다.

    근육을 가닥가닥을 따라 남은 기운이 휘몰아쳤다.

    기운은 심장에서 다시 한번 정제되었다.

    이전 기운이 태양이라면 심장을 지난 기운은 달빛, 아니 달빛에 비친 그림자처럼 은밀했다.

    그 은밀한 기운이 한빈의 쌍장에 모였다.

    점점 커지는 기운.

    드디어 한빈의 손에 은밀한 기운이 모였다.

    단전과 심장을 지나 기운이 모이기까지 걸린 시간이라고 해 봤자 눈 깜짝할 사이.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진룡무영수의 기운!

    그런 한빈을 바라보는 현문은 고개를 갸웃했다.

    현문이 한빈의 무위를 직접 본 적은 없었다.

    다만, 한빈의 행동과 경신술을 통해 그 경지를 추측했을 뿐이었다.

    한빈이 뒤로 물러나라 했을 때는 어느 정도의 기대감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한빈에게는 어떤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은신술을 쓰고 있는 듯 이전에 있던 기운마저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체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자세만 본다면 저 벽이라도 박살 내려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어떤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현문이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였다.

    한빈의 근처에서 산들바람이 일었다.

    그게 전부였다.

    그 산들바람은 인위적인 것이 아니었다.

    통로에서 불어오는 일반적인 바람과 구별할 수도 없었다.

    한빈은 모든 일이 끝났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휴.”

    그 한숨 소리에 현문이 조심스럽게 한빈에게 다가갔다.

    “팽 공자, 대체 지금 무엇을 한 겐가?”

    “벽을 뚫었습니다.”

    “잘 보게. 벽은 그대로가 아닌가?”

    현문은 눈을 가늘게 뜨고 벽과 한빈을 번갈아 보았다.

    현문은 뒤쪽을 힐끔 봤다.

    제갈공려도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만 갸웃하고 있었다.

    그때 한빈이 진각을 밟았다.

    쿵!

    그리 크지 않은 소리가 울렸다.

    순간 모두는 눈을 크게 떴다.

    이전까지 있던 벽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 놀라움은 바로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벽이 사라지자 뒤쪽에서 다른 공간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곳은 누군가의 수련실로 보였다.

    한빈은 조심스럽게 그 공간 안으로 걸어갔다.

    몇 번을 돌며 공간을 확인한 한빈이 모두에게 손짓했다.

    “다들 오시죠.”

    한빈의 손짓에 제갈공려가 공간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 뒤를 따라 설화와 현문도 들어갔다.

    한빈은 그들은 신경 쓰지도 않고 조용히 벽곡단이 쌓여 있는 항아리 쪽으로 걸어갔다.

    벽곡단을 꺼내어 살펴본 한빈이 말했다.

    “아무래도 여기부터는 조심해야 할 듯싶습니다.”

    “벽곡단에 독이라도 있다는 것인가?”

    한빈의 옆에 붙은 현문이 물었다.

    “그게 아니라 벽곡단에 미세한 수분이 남아 있습니다. 이 벽곡단이 만들어진 지 삼 일이 안 되었다는 이야기지요.”

    “아, 그렇겠군.”

    현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벽곡단을 뭉칠 때는 일정한 수분이 남게 된다.

    그 수분은 십 일 정도가 지나야 완벽하게 없어진다.

    현문이 지금 놀란 것은 한빈이 그 수분의 양을 벽곡단을 몇 번 만져 보는 것만으로 파악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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