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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316화 (316/621)
  • 316. 전대고수(前代高手) (2)

    그의 말에 제갈세가 식솔들을 감시하던 적들이 고개를 돌렸다.

    그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의 목에는 전에는 못 보던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하얀색에 군데군데 시뻘건 색이 칠해진 목걸이.

    그것은 제갈세가 식솔들의 뼈를 뽑아 만든 것이었다.

    눈을 빛내며 휘적휘적 걸어온 사내가 낮은 목소리를 흘렸다.

    “제법이군. 그럼 내 수법이 뭔지도 알겠어. 일향지(一香指)를 알아보다니 역시 제갈세가답군.”

    “설마 네가 진짜 암왕이라는 것이냐? 이십 년 전에 죽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찌 네가…….”

    제갈공영이 눈을 크게 뜨며 묻자 사내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네가 제갈가의 가주라는 것이 좀 아쉽기도 해.”

    “그게 무슨 말이냐?”

    “잘 생각해 봐. 내 사부님이 직접 나섰다면 너희가 그렇게 고통받지는 않았겠지. 안 그래?”

    “…….”

    제갈공영은 그의 말에 눈매를 좁혔다.

    그자의 말에 의하면 암왕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암왕의 제자.

    암왕이 누구던가?

    삼십 년 전 무림에 혈겁을 일으킨 자였다.

    암왕 때문에 관과 무림의 불가침 규칙은 잠시나마 깨졌다.

    다시 강호에 평화를 찾기에는 무려 삼 년이라는 기간이 걸렸다.

    저자의 말대로 암왕의 일향지 덕분에 무림의 중소 문파가 두려움에 떨었다.

    일향지는 검지 하나로 상대의 장기를 파내는 수법이다.

    이 수법은 일향지에 당한 자가 고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쾌감을 느낀다는 점 때문에 유명해졌다. 기묘한 향기와 함께 말이다.

    빠른 속도로 피가 마찰을 일으키며 공중에서 산화하여 내는 반응일 것이라 정파 쪽에서는 결론을 내렸다.

    그 암왕을 처리한 것은 전대의 무림삼존.

    그런데 분명 죽었다고 전해지던 암왕이 이리 살아 있었다니!

    거기에 그가 키운 제자까지 눈앞에 있다는 것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멀리서 철판을 손톱으로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

    끼이익.

    그 소리에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제갈공영은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묘하게 엄습해 오는 불안감.

    그는 그 불안감의 정체를 바로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의자에 앉아 있는 백발노인이었다.

    철판에 손톱을 긁는 듯한 소리는 의자에 달린 바퀴에서 나는 소리였다.

    의자에 앉은 노인이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아도 바퀴는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굴러갔다.

    내공만으로 철로 된 바퀴를 굴린다라?

    저것은 화경의 끝에서나 보일 수 있는 경지였다.

    제갈공영은 자신도 모르게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저 정도의 무위라면 사천당가에 있는 누가 오든 당할 수가 없었다.

    이곳을 찾아오는 즉시 한 줌 핏물로 변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노인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옷에 거무튀튀한 얼굴.

    잘 정돈된 백발은 눈에 확 띄었다.

    나이대로 봐서 암왕일 수도 있었다.

    저자를 죽였다는 전대 무림삼존도 모두 세상을 떠났는데, 죽었다고 알려진 암왕이 모습을 드러내다니!

    제갈공영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갈비뼈가 뽑히면서도 내비치지 않았던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철 바퀴가 달린 의자가 멈췄다.

    끼이익.

    동시에 복면인들이 그에게 오체투지를 한다.

    “암제를 뵙습니다.”

    “사부님을 뵙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제갈공영의 눈은 더욱 떨렸다.

    오체투지와 암제라는 단어는 반역을 뜻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저런 행동을 스스럼없이 한다는 것은 이곳에 있는 제갈세가의 식솔을 한 명도 살려 보낼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

    제갈공영이 한 발 앞으로 나갔다.

    “그대가 전대고수인 암왕이오?”

    그의 물음에 복면인 중 수장이 암제 대신 대답했다.

    “무례하구나. 사부님께 질문을 던지다니!”

    “괜찮다, 괴아야.”

    암제라 불린 사내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동시에 복면인의 수장이 옆으로 쓱 비켜났다.

    복면인이 움직인 것이 아닌, 암제가 허공섭물로 그를 밀어 낸 것이다.

    다시 철 바퀴가 굴렀다.

    끼이-익!

    눈 깜짝할 사이에 암제가 앉은 의자가 제갈공영의 코앞에 멈췄다.

    제갈공영은 순간 입을 열 수 없었다.

    그의 주변에서 무형지기가 슬며시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그 기운이 눈에 보인다면 아마도 핏빛일 것이었다.

    아니, 지금도 그의 주변에서 피어나는 수많은 붉은 꽃들이 보인다.

    뒤쪽에 있던 다른 식솔들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털썩 주저앉는다.

    그와 마주 보고 서 있는 제갈공영의 무위가 어찌 보면 대단한 것일 수도 있었다.

    공간을 순식간에 장악해 버린 암제가 입을 열었다.

    “나에게 할 말이 있는가?”

    “흠…….”

    제갈공영은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때 그의 눈에 뒤편에 있는 복면인들이 들어왔다.

    그런데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암제를 호위하듯 서 있었다.

    단순히 기세를 피워 공간을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간격까지 조절하는 것이 분명했다.

    암제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너무 겁을 줬나 보군.”

    그 말이 끝나자 제갈공영의 몸을 감쌌던 기세가 사라졌다.

    “후, 호의에 감사드리오.”

    “오호. 역시 제갈세가야. 이래야 재미있지.”

    “당신이 정말 암왕이 맞소?”

    “암왕이라. 오랜만에 들어 보는군…….”

    암제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눈빛 사이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복잡한 감정이 흘러나왔다.

    그 감정만으로 제갈공영은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암제는 아무렇지 않게 감정을 갈무리하며 말을 이었다.

    “옛날의 왕이 언제까지 왕일 수는 없지 않은가? 언젠가는 황제로 올라서야지 이치에 맞는 법이지.”

    “…….”

    “내 옛날이야기를 하나 들려주지.”

    “…….”

    “아주 오래전 이야기라서 잘 기억도 안 나는군. 그러니까…….”

    그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의 말에 제갈공영은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은 황실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는 삼십오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 태자는 학문뿐 아니라 무공도 출중했다고 한다.

    그 태자는 뛰어난 무공 덕분에 강호의 무림명숙과 많은 연을 맺었다.

    덕분에 젊은 태자는 강호오룡 중 하나로 추앙받기도 했다.

    그와 연을 맺게 된 문파들은 태자가 즉위할 때를 내심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황실에서 사건이 벌어졌다고 한다.

    태자가 역모에 얽혔다는 황당한 사건에, 황실은 발칵 뒤집혔다.

    태자 자리를 내놓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지만, 황실을 빠져나온 태자는 자신을 모략한 이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태자는 강호에 숨어들어 절치부심했다고 한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했을 때 제갈공영이 끼어들었다.

    “혹시 그 태자가 당신이오?”

    “생각하던 그대로일세.”

    “그럼 당신이 무림오룡 중 황룡이란 말이오?”

    “그렇게 불렸던 때도 있었지.”

    “그런데 왜 강호를 그렇게 뒤집어 놨단 말이오?”

    “사실 강호를 뒤집어 놓은 것은 내가 아닐세.”

    “그럼 삼십 년 전의 일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이게 정당하다는 겁니까?”

    제갈공영은 꾸짖듯 물었다.

    암제는 아무렇지 않게 피식 웃더니 말을 이었다.

    “무림의 문파와 세가 들은 내 사정을 듣고는 나를 돕겠다고 나서더군.”

    “그럼 역모라도 벌였다는 이야기란 말입니까?”

    “정답일세.”

    “허…….”

    제갈공영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모습에 암제의 입꼬리가 더욱 올라갔다.

    한참 동안 조용히 제갈공영을 응시하던 암제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인면수심이라고…….”

    이어지는 말에 제갈공영은 눈을 크게 떴다.

    암제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는 대대로 정의맹의 총군사직을 수행했던 제갈세가에서도 알지 못하는 이야기였다.

    그들은 암왕이라는 별호로 태자를 부르며 황권을 되찾기 위해 은밀하게 움직였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러던 중 대다수의 문파와 세가 들이 등을 돌렸다는 것이다.

    그것이 회유였는지 아니면 자신들의 이익 때문인지는 몰라도 암왕을 촉산의 천 길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뜨렸다는 것이다.

    암제는 거기에서 말을 멈췄다.

    그러고는 제갈공영을 바라봤다.

    “표정을 보아하니 정말 모르는 일인 듯싶군.”

    “처음 들어 보오.”

    “날 배신했던 문파와 세가를 움직인 것이 누군지 아는가?”

    “설마…….”

    “그 설마가 맞을 걸세. 거대한 세력을 움직일 수 있는 두뇌는 하나밖에 없네. 바로 제갈세가였지.”

    “음.”

    “지금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자네 동생이 내 말에 충실히 따른 것 같군. 그러니 나도 약속을 지켜야지.”

    “그럼 우릴 풀어 주겠다는 말이오?”

    “당연히 풀어 줘야지.”

    말을 마친 암제가 뒤쪽을 바라봤다.

    “괴아야, 그들을 풀어 주어라.”

    “네, 사부님.”

    말을 마친 괴아라 불린 복면인이 제갈공영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더니 제갈공영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순간 제갈공영은 눈을 찔끔 감았다.

    저들이 진짜 자신을 풀어 주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암제가 풀어 주라는 것은 반어법이 분명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그의 손가락이 견정혈을 누르자 상체가 자유롭게 움직였다.

    다리는 멀쩡하지만, 팔이 자유롭게 움직이지 않았던 상태였다.

    어찌 보면 상체만 굳어 있던 상태.

    그때 괴아가 수하들에게 소리쳤다.

    “너희는 제갈세가의 식솔들을 풀어 줘라!”

    “네, 알겠습니다.”

    수하들은 제갈세가의 사람들 사이를 누비며 그들의 혈도를 풀어 줬다.

    순간 부자연스러웠던 제갈세가 식솔들의 움직임이 돌아왔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걷고 상체를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때 암제가 말했다.

    “안 가고들 뭐 하는가?”

    그 목소리에 이제까지 공포에 질렸던 제갈공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렇게 살려 줄 리는 없는 일.

    분명 문밖을 나가면 누군가 목을 내려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산공독에 당해서 무공도 쓸 수 없는 상태.

    그는 과연 여기에 남아야 하나, 암제의 말대로 떠나야 하나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제갈세가의 무사 몇이 슬금슬금 가까운 문을 향해 움직였다.

    그때 뒤쪽에 있던 암제가 말을 이었다.

    “괴아야, 복면이 답답하지 않으냐? 이제 벗어도 될 것 같다.”

    “알겠습니다, 사부님.”

    말을 마친 괴아가 복면을 벗었다.

    괴아의 얼굴이 드러났다.

    순간 제갈공영은 입을 크게 벌렸다.

    마치 헝겊을 덕지덕지 붙인 듯한 피부와, 반은 백발인데 반은 흑발인 기괴한 머리카락.

    마치 여러 명의 얼굴을 이어 붙인 듯한 괴괴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제갈공영은 왜 그가 괴아라 불리는지를 알 것 같았다.

    놀람도 잠시, 제갈공영은 식솔들에게 외쳤다.

    얼굴을 보였다는 것은 여기서 한 발짝도 내보내기 싫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모두 움직이지 마라!”

    그때 문을 향해 다가가던 제갈세가 무사 둘이 뛰었다.

    그러더니 문을 빠져나갔다.

    서걱!

    문을 빠져나간 것은 그들의 몸 반쪽이였다.

    문을 통과하는 즉시 개작두보다 더 날카로운 기관 장치가 그들을 반으로 가른 것이다.

    순간 제갈세가 식솔들이 비명을 질렀다.

    “악!”

    “저게 뭐지?”

    그들의 비명을 즐기는 듯 암제가 말을 이었다.

    “밖에서 들어오는 자들이 있다면 저런 꼴이 되겠지…….”

    “보내 준다고 하지 않았소?”

    “가는 건 너희 마음인데, 나는 낚시를 좀 즐겨야겠네.”

    “낚시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가주의 동생이 과연 사람을 보내지 않았을까? 가만히 약속만 지킨다면 그건 제갈세가가 아니겠지? 그리고 내가 자네들로 만족할 것 같나? 오늘 제갈세가라는 이름을 강호에서 지울 것이니 그리 알게.”

    “…….”

    “참, 잘못 말했군. 제갈세가란 이름은 더욱 빛날지도 모르지. 우리 아이들이 그 자리를 차지할 테니.”

    암제가 괴아의 수하들을 가리켰다.

    순간 제갈공영의 눈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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