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 전대고수(前代高手) (1)
제갈휘도 눈을 가늘게 떨었다.
“들어간 지 꽤 오래되었을 텐데…….”
그때 청화가 나지막이 말했다.
“아직 괜찮아요. 실타래가 움직이고 있잖아요.”
청화는 조금씩 풀리고 있는 천잠사를 가리켰다.
그제야 떨리던 제갈휘의 눈동자가 안정을 찾았다.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을 때였다.
설화가 제갈공려를 보고 말했다.
“언니는 우리 공자님하고 친구를 맺으셨으면서 왜 그렇게 못 믿으세요?”
“그게 무슨 말이냐? 내가 팽 공자와 친구라니…….”
제갈공려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자 설화가 어깨를 쫙 펴며 자랑하듯 말했다.
“우리 공자님이 좀, 붙임성이 좋아서 사람들과 금방 친해지는 편이거든요. 그래서 항상 만나는 사람마다 친구가 될 걸 제안해요.”
“나하고 친구가 되자고 한 적은 없는데.”
“언니도 친구가 되기로 계약서 쓰셨잖아요.”
“아, 계약서가…….”
“네, 맞아요.”
“그게 친구가 되는 과정이구나.”
“그럼요. 공자님은 항상 친구를 만들 때 계약서부터 쓰고 시작하죠. 저도 처음 만날 때 계약서부터 쓰고 시작했어요.”
“아.”
설화의 말에 제갈공려가 눈을 크게 떴다.
벌레가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크게 말이다.
사실 제갈공려는 어이가 없었다. 누가 봐도 불공정 계약서였다. 그런데 그게 친구가 되는 과정이라니?
제갈공려가 눈가를 파르르 떨 때 현문이 불안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모습에 설화가 물었다.
“아저씨는 갑자기 왜 그러세요?”
“아니다.”
고개를 좌우로 크게 저으며 어깨까지 파르르 떠는 현문의 모습에, 설화의 호기심은 커졌다.
“아저씨, 혹시 추워요?”
“아니다.”
“그런데 표정이 이상한데요.”
설화가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현문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게……. 나는 계약서를 쓰지 않지 않았는데 어떻게 된 일이냐?”
현문의 말에 옆에 있던 제갈공려의 눈이 한 단계 더 커졌다.
이제는 아예 커다란 과일도 들어갈 정도였다.
제갈공려는 갑자기 이 집단의 광기가 무서워졌다.
그녀의 시선이 제갈휘에게 향했다.
그런데 제갈휘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강물을 보고 마구 떠는 것이 마치 가족을 걱정하는 듯한 눈빛이다.
걱정도 잠시, 제갈공려도 한빈이 들어간 강을 바라봤다.
지금은 오직 하북팽가의 사 공자만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제갈공려가 떨리는 눈으로 강을 바라볼 때, 설화가 손을 휘휘 저으며 현문을 달랬다.
“아저씨,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그게 무슨 말이냐?”
“뭐, 나중에 쓸 때도 있으니 차례를 기다리세요.”
“흠.”
현문이 삐진 듯 한빈이 들어간 강물을 쏘아봤다.
그것도 잠시, 현문은 청화가 잡은 실타래에 집중했다.
실타래가 이제는 움직이지 않았다.
현문이 물었다.
“청화야, 왜 실타래가 움직이지 않는 것이냐?”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증거겠죠.”
“그럼 나와야 하지 않느냐?”
“뭐, 나오시겠지요.”
청화는 아무렇지 않게 답하자 현문이 황당한 듯 물었다.
“너는 주인이 걱정되지도 않느냐?”
“에이, 그걸 왜 걱정해요. 우리 공자님은 다치실 분이 아니에요.”
“아무래도 내가…….”
현문이 답답한 듯 일어섰다.
순간 물에서 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왔다.
그 거품이 점점 가까워지자 현문이 눈을 가늘게 떴다.
모두의 시선이 강가에 모여 있을 때.
팍!
작은 물보라가 솟구쳐 올라오며 한빈이 튀어나왔다.
한빈이 물에 흠뻑 젖은 채 첨벙첨벙하며 강가로 나왔다.
일행에게 온 한빈은 다리에 묶어 놨던 돌덩이를 풀어 놓았다.
털썩 자리에 주저앉은 한빈은 길게 심호흡했다.
“휴.”
아무도 한빈에게 묻는 이는 없었다.
그만큼 한빈은 초췌해 보였다.
백 리가 넘는 길을 달려오면서도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한빈이었다.
그런데 한빈의 표정이 심각해 보이자 모두는 말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한빈은 한동안 조용히 운기조식을 했다.
들숨과 날숨 사이에서는 현묘한 기운이 맴돌았다.
무공을 모르는 이라도 느낄 수 있는 기운이었으니, 제갈공려나 제갈휘가 못 느낄 수 없었다.
제갈공려는 어떻게 이런 괴물이 무림에 등장했는지 알 수 없었다.
정보전에서는 최고라 할 수 있는 제갈세가도 모르는 인재를 하북팽가에서 키웠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때 한빈이 일어났다.
“다들 준비하시죠.”
“혹시 우리 가문 식솔의 행방은 찾을 수 있을까? 팽 공자.”
제갈공려가 조심스럽게 묻자 한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충 알 것 같습니다.”
“그럼 강에서 나오는 그 소리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이 강에서 나오는 괴기한 소리는 비명일 수도 있고 기관 장치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직접 확인해 봐야죠.”
“어디로 가면 되나?”
“저곳입니다.”
한빈은 검지로 강 건너에 있는 커다란 장원을 가리켰다.
그곳을 본 제갈공려가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흠. 그럼 빨리 출발하게, 팽 공자.”
“잠시만요. 준비가 끝나면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한빈은 청화에게 다가갔다.
한빈이 손을 내밀자 청화가 실타래를 건넸다.
팽팽히 당겨진 실타래.
그것을 가장 눈치챈 것은 현문이었다.
“왜 실타래가 당겨진 것인가?”
“아래에 내려가 보이니 진법이 하나 설치되어 있더군요.”
“진법이라? 어떤 종류의 진법인지 알 수 있겠나?”
“동귀어진(同歸於盡)입니다.”
“동귀어진이라고?”
현문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도 그럴 것이 동귀어진이라고 하면, 상대와 함께 세상을 등지는 수법이 아니던가?
그때 한빈이 제갈공려를 바라봤다.
시선을 받은 제갈공려가 말했다.
“팽 공자가 말하는 동귀어진은 진짜 진법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보통은 완벽하게 증거를 없애기 위해 설치하는 대규모 진법입니다. 기관 장치까지 더해야 하는 진법이에요. 보통 수괴진, 멸화진, 지괴진 같은 진법들이죠.”
그녀의 말에 한빈이 잠깐 끼어들었다.
“물로 모든 것을 덮고, 불로 모든 걸 태우고, 흙으로 모든 것을 메우는 그런 진법들입니다. 여기에 설치된 것은 수괴진입니다.”
“그런 진법은 금시초문입니다.”
“그렇겠지요. 보통은 군사작전에서 사용하고는 합니다. 게다가 강호에서는 그런 악랄한 진법을 썼다가는 무림공적이 되기 십상이니까요.”
“그럼…….”
“만약 저 아래에 있는 진법이 동귀어진이라면 상대는 우리가 모르는 조직일 가능성이 큽니다. 아니면…….”
“아니라면 대체 뭔가?”
“아니라면 우리가 모르는 조직이 수괴진을 터뜨리기도 전에 다른 세력들에게 당했을 수도 있는 법이죠.”
“후.”
제갈공려가 한숨을 쉬자 한빈은 그의 심정을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잠시 한빈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실타래를 그녀의 옆에 있는 제갈휘에게 건넸다.
“자, 이건 제갈공자가 맡으시죠.”
“이게 뭡니까?”
“당기면 죽습니다.”
“죽다니요?”
“적이 만들어 놓은 동귀어진 안에 들어 있는 모두가 죽습니다.”
“그럼…….”
“저곳으로 들어가는 저도 죽고 적도 죽고 제갈세가의 식솔도 죽습니다.”
“왜 이걸 내게?”
“말 그대로 동귀어진입니다. 만약 저희가 밀린다면 제갈세가의 식솔을 최대한 빼낼 테니 적이 못 나오게 진법을 작동시키면 됩니다.”
“그게 무슨…….”
“상대 못 할 적이라면 파묻는 게 기본 상식이죠.”
“그렇지만…….”
“저를 못 믿으십니까?”
한빈이 조용히 제갈휘를 바라봤다.
제갈휘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믿습니다, 팽 공자님.”
“그럼 됐습니다. 신호로는 폭죽을 쏘아 올릴 겁니다. 붉은색 폭죽을요.”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막중한 임무를 제게 맡기는 이유가 무엇인지요?”
“여기에서 제일 약하지 않습니까?”
“아.”
제갈휘는 기운이 빠진 표정으로 탄성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제갈공려를 바라봤다.
“그리고 제갈 누님께서는 가지고 있는 병력을 제게 주시죠?”
“병력이라…….”
“정의맹의 군사 패를 지니고 계시지 않습니까?”
“흠, 그걸 어떻게 알고…….”
그녀는 황당한 듯 한빈을 바라보면서도 군사 패를 순순히 건넸다.
군사 패를 받은 한빈은 청화를 불렀다.
“너는 내가 미리 맡겨 놓은 서찰과 함께 이 군사 패를 개방에 전해라.”
“저는 저기에 못 들어가는 건가요?”
청화가 강 건너 장원을 가리키자 한빈이 빙긋 웃었다.
“빨리 전하고 오면 합류해도 된다. 대신 무리는 하지 말아라.”
“그럼 저는 일을 두 개 하는 거네요.”
“뭐, 그렇지.”
“헤헤, 일 끝나면 맛있는 거 사 주세요.”
해맑게 웃는 청화를 뒤로한 채 그들은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순간 다시 울리는 괴성.
끄아-악.
강을 건너는 한빈 일행의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 * *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고, 그들은 강을 건넜다.
장원의 앞으로 숨어든 한빈은 그 규모에 입을 벌렸다.
문제는 강 아래와 이 장원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인데 눈에 보이는 장원은 빙산의 일각이라는 점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도 거대한 전각들이 즐비했다. 하지만, 모든 통로가 강가까지 연결되어 있다면 숨어 있는 공간은 보이는 것의 열 배가 넘을 것이 분명했다.
제갈공려가 담장을 넘으려 할 때였다.
한빈이 그녀의 소매를 잡았다.
“왜 그러나? 팽 공자.”
“저 안쪽의 냄새를 맡아 보십시오.”
“흠, 전형적인 농가의 냄새가 아닌가?”
“그러니까요. 이런 장원에 저런 냄새가 나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상하긴 하지만,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문제가 됩니다. 농가에서 침입자를 가장 먼저 알아채는 건 누렁이지요. 지금도 들리지 않습니까?”
한빈이 담장 너머를 가리켰다.
그곳에서는 각종 가축의 울음소리가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다.
제갈공려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이건 자네의 오판 같아. 이렇게 시끄러운데 우리의 기척을 눈치챌까?”
“시끄러운 와중에서도 가축들의 소리가 변한다면요? 아마 그 미묘한 변화로 적들은 우리의 움직임을 알아챌 것입니다.”
“그럼 가축들의 아혈이라도 찍자는 말인가?”
“조용하면 더 이상하죠.”
“그럼 어찌하자는 말인가?”
“이런 큰 저택이라면 밖에서 통하는 수로가 있을 겁니다.”
“그걸 찾기에는 너무…….”
“물론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한빈은 씩 웃으며 아래쪽을 가리켰다.
한빈이 가리킨 곳은 한눈에 봐도 육중해 보이는 석판이 깔려 있었다.
한빈은 씩 웃으며 현문을 바라봤다.
“이것 좀 부탁드려요. 참, 부수지는 말고요.”
“알겠네. 오랜만에 몸 좀 풀려니 단전이 마구 꿈틀대는군. 하지만, 일단 참겠네.”
말을 마친 현문은 석판을 들었다.
덜컹.
들린 석판을 옆으로 옮겨 놓은 현문이 손을 툭툭 털자 제갈공려가 눈을 크게 떴다.
옆으로 이동한 석판에는 현문이 남긴 손가락 자국이 선명했다.
무당 제일의 기재라고는 하지만 십 년 동안 수련을 쉬었던 것으로 아는데 지금의 그가 보인 무위가 이해가 안 되었다.
제갈공려의 시선을 눈치챈 현문이 작게 속삭였다.
“득어망전.”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선배님.”
“그건 비밀일세.”
현문은 그저 웃기만 했다.
그때 한빈이 재빨리 아래로 내려갔다.
다행히 별도의 기관 장치는 없었다.
한빈이 손가락을 튕기자 설화가 어느새 횃불에 불을 붙여 가져왔다.
횃불을 건네받은 한빈은 어둠 속으로 조금씩 걸어갔다.
* * *
한편 구석 창고에 감금된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공영은 눈을 파르르 떨었다.
지금도 세가 식솔들의 비명이 귀를 울리고 있었다.
그 비명도 비명이지만, 상대의 수법이 너무 괴이했다.
늑골을 뽑아내면서도 별다른 출혈이 없었다.
거기에 더해서 그의 눈빛은 이 상황을 즐기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저 수법은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다.
제갈공영이 나지막이 혼잣말을 뱉었다.
“암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