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 무가지회 (8)
제갈공민이 바라보는 쪽에는 위씨세가의 대표가 있었다.
위씨세가는 검으로 유명한 가문이었다.
그런데 저렇게 열성적으로 찬성한다는 것이 이상했다.
위씨세가라?
제갈공민이 잠시 상황을 정리하고 있을 때 위씨세가의 대표가 제갈공민을 바라봤다.
그의 이름은 위연호.
위씨세가의 가주 위상호의 동생이자 위씨세가의 제일검이라 불리는 자다.
가주 대신에 위씨세가를 대표로 해서 무가지회에 참석한 이였다.
제갈공민을 슬쩍 바라본 위연호가 눈을 빛내며 십대세가의 대표들을 살폈다.
마치 빗자루가 가을 낙엽을 쓸듯 다른 대표들의 눈빛을 쓸어 담았다.
눈빛만으로 모두의 시선을 모은 위연호가 말했다.
“단순하게 십대세가의 수장을 뽑는 자리라면 너무 심심하지 않습니까?”
“십대세가를 이끌 수장을 뽑는 것이 심심하다고 하는 것은 우리를 모욕하는 것이오? 이건 누워서 침 뱉기 아니오?”
아무 말 없이 대화를 듣던 하남정가의 가주 정인지가 되물었다.
정인지는 전대 가주 정무룡이 물러나고 얼마 전 가주 자리에 오른 자였다.
그 물음에 위연호는 턱을 한번 매만지더니 말을 이었다.
“무가지회가 십대세가를 위해 열렸습니까? 아니면 강호 전체의 무림세가를 위해 열린 겁니까? 그도 아니면 강호를 위해서입니까?”
위연호는 대, 중, 소로 편을 나누며 선택을 재촉했다.
“그야…….”
정인지가 말을 못했다.
강호를 택하자니 십대세가가 싫어할 것이고 십대세가만을 위해서라고 하면 대의명분을 저버리는 일이었다.
그때 위연호가 말을 이었다.
“말은 강호를 위해서라고 하고 싶으시겠죠? 안 그렇습니까?”
“십대세가를 위하는 것이 강호를 위해서 아닌가?”
“그렇게 말하시면 편하시겠죠. 하지만, 지금의 십대세가가 다른 무림세가 위에 군림하고 있습니까?”
질문을 던진 위연호를 고개를 돌려 모두를 둘러봤다.
하지만, 대답하는 대표는 없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십대세가라 불리며 실속을 챙기긴 하지만, 실상은 모두의 존경을 받고 있지는 못했고 그렇다고 다른 세가를 힘으로 누르기에도 부족했다.
그때 제갈공민이 물었다.
“위 대협의 말씀은 그러니까 이번 용봉지회를 기회로 십대세가 중심으로 무림을 재편하자는 것이지요?”
“네, 맞습니다. 제갈 대협이시라면 제가 뭘 원하는지도 알고 계시겠군요.”
“용봉지회를 통해서 천하 십대세가를 다시 추리자는 말씀 아니십니까?”
“맞습니다. 그래야 세인들에게 존경을 거둘 자격이 있지요.”
“너무 치열해지지 않겠소?”
“그야, 제갈 대협께서 미리 해법을 제시해 주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박투술만을 가지고 겨룬다면 문제가 없다는 말씀이지요. 하지만, 병장기를 안 든다 해도 손가락 하나로 상대의 목숨을 끊을 수 있는 것이 우리 아닙니까?”
“그래서 반대하시는 겁니까?”
“아닙니다. 표결에 부치도록 하죠. 그게 십대세가를 이끌어 온 방식이 아닙니까?”
“네, 저도 그게 좋은 생각이라고 봅니다.”
위연호가 나머지 대표를 바라보자 황보세가의 대표로 온 황보만청이 손을 들었다.
“저는 위 대협의 말에 찬성이오.”
“…….”
위연호는 뜻밖이라는 듯 말없이 황보만청을 바라봤다.
황보만청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사실 황보만청은 지금 상황이 놀라울 뿐이었다.
그것은 이곳에 오기 전에 한빈이 한 말 때문이었다. 한빈은 이곳에 오기 전, 이와 비슷한 상황을 예견한 적이 있었다.
그 문제에 어떻게 답해야 하는지도 한빈이 정해 주었다.
물론 황보세가의 선택에 맡기겠다고는 했지만, 이렇게 똑같이 일이 진행될지는 몰랐었다.
제갈공명은 천기를 읽어 바람의 방향을 바꿨다고 한다. 그런데 한빈은 십대세가의 회의 내용까지 예견했다.
제갈공명과 한빈.
둘 중에 누가 더 놀라운가?
어떻게 하면 한빈과 연을 맺을 수 있을까 하는 황보만청의 고민이 깊어졌다.
그때 하북팽가의 대표로 온 팽대위도 손을 들고 찬성했다.
이어서 산동악가의 대표로 온 악소천도 찬성했다.
그들의 모습에 제갈공민은 눈을 가늘게 떴다.
위씨세가가 수상하기는 했다.
위씨세가를 중심으로 주변을 살피면 이어진 끈을 찾을 수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일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쯤 되니 누가 적인지를 구분할 수 없었다.
일단 여기까지는 서찰에 쓰여 있는 대로 행동했다.
그렇다고 상대가 납치한 제갈세가의 식솔을 풀어 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은 시간을 벌기 위한 행동일 뿐, 이제 믿을 것은 제갈공려와 제갈휘밖에 없었다.
* * *
다음 날.
중경과 사천을 가르는 경계석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양문 산맥.
양문 산맥의 어느 산자락에서 산새들이 퍼드덕거리며 다급하게 자리를 뜨고 있다.
산짐승들이 자리를 급히 피한 곳에서는 사람의 그림자가 빛처럼 지나가고 있다.
휙. 휙.
그때였다. 뒤쪽에서 따라오던 그림자가 멈췄다.
탁.
자세히 보니 멈춘 것이 아니라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
사내는 데구루루 구르더니 나무에 처박혔다.
팍.
순간 앞서 나가던 그림자가 멈췄다.
그중 하나가 소리쳤다.
“지금 뭐 하는 것이냐?”
꾸짖는 듯한 목소리와는 달리 그녀는 재빨리 쓰러진 사내 곁으로 다가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바라봤다.
시선을 마주친 사내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고모님.”
쓰러진 이는 제갈휘, 달려온 이는 제갈공려였다.
제갈공려가 다급히 물었다.
“괜찮다. 일어날 수 있겠느냐?”
“네, 일어날 수 있습……. 앗.”
일어나려던 제갈휘가 발목을 잡았다.
“괜찮다고 하지 않았느냐?”
“발목을 살짝 다친 것 같습니다.”
“음.”
제갈공려는 제갈휘를 바라봤다.
지금 중요한 것은 오리버니와 식솔을 구하는 것이다.
문제는 하북팽가의 사 공자 일행의 속도에 못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그녀가 제갈휘를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도 한빈 일행을 따라가기 버거운데 조카인 제갈휘가 가능할 리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속도를 늦춰 달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제갈공려는 저 멀리에서 걸음을 멈춘 한빈 일행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한빈은 하북팽가에서 키워 낸 비밀 병기가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리 빠를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은신에 특화된 훈련을 받은 줄 알았다.
하지만, 경신술도 강북제일이었다.
그 뒤를 쫓는 현문의 무위는 당연히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도 조금 이상한 것이 숨 한번 헐떡이지 않고 오십 리 길을 달려왔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속도였다.
아마 저 정도 속도면 호랑이나 늑대보다 빠를 것이었다.
그러나 호랑이나 늑대도 오십 리를 쉬지 않고 달린다면 당연히 지칠 것이다.
그런데 현문은 지친 기색이 전혀 없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바로 한빈의 시녀 둘이었다.
시녀 둘도 안색 하나 바뀌지 않았다. 자세히 보면 땀을 흘린 흔적조차 없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렇게 빨리 달리는데 기척까지 지운다는 것이다.
기척을 지울 수 있다는 것은 내공을 갈무리하며 달린다는 뜻.
속도와 내공은 비례할 수밖에 없었다.
속도를 높이자면 내공을 쓸 수밖에 없고 당연히 기척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저들이 지나갈 때는 산짐승들이 반응을 안 했다.
그다음 제갈공려와 제갈휘가 지나갈 때면 산짐승이 반응했다.
이것은 하나의 벽과도 같았다.
제갈공려는 지금 벽에 부딪힌 것이었다.
그 벽을 넘기 위해서는 상단전뿐 아니라 전체적인 조화가 필요했다.
지금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 제갈휘였다.
“휘야, 미안하다.”
“괜찮습니다. 고모님. 저는 이쯤 해서 돌아가겠습니다.”
“할 수 없구나…….”
그녀는 제갈휘의 발목을 바라봤다.
이대로면 한빈 일행의 짐이 될 뿐이었다.
그렇다고 치료를 받고 가자니 이곳에서부터 의원이 있는 마을까지 가려면 얼마나 걸릴지 모를 일이었다.
그녀가 포기하고 조카를 돌려보내려 할 때 한빈이 다가왔다.
“많이 다쳤습니까?”
“심하지는 않지만, 조카는 돌려보내야 할 듯싶군.”
“제가 한번 봐도 되겠습니까?”
“의원도 아닌데…….”
그녀가 말을 맺기도 전에 설화가 나섰다.
“시간이 없으니 공자님께 맡기세요. 공짜는 아니지만, 효과는 기가 막혀요.”
설화의 약장수 같은 말투에 제갈공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한빈이 품에서 은침 하나를 꺼냈다.
전서구를 잡았을 때 쓰던 그 침이었다.
한빈이 침을 꺼내자 제갈휘가 눈을 크게 떴다.
“그것으로 무엇을 하려는 겁니까? 팽 공자.”
“가만 계시면 곧 끝납니다.”
말을 마친 한빈이 은침을 뻗었다.
획.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전광석화와도 같은 속도.
정확히는 전광석화가 맞았다.
침을 검처럼 쓰자 속도가 변한 것이다.
한빈이 은침을 제갈휘의 발목에 박아 넣었다.
푹!
침이 끝까지 뚫고 들어가자 제갈휘가 다리를 부르르 떨었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
제갈공려가 놀라 노호를 터뜨리자 한빈이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댔다.
“쉿! 가만히 계십시오. 이 은침은 소독한 것입니다.”
“소독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일단 보시지요.”
한빈이 제갈휘를 가리켰다.
제갈휘가 편안한 상태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냥 눈을 감은 것이 아니라 마치 운기조식을 하며 눈을 감은 모양새였다.
그 증거로 들숨과 날숨이 일정했다.
그때 한빈이 은침을 빼내어 품 안에 갈무리했다.
눈 몇 번 깜빡일 시간이 지나자 제갈휘가 눈을 떴다.
눈을 뜬 제갈휘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한빈을 향해 포권했다.
“감사합니다, 대협. 저는 이렇게 고명한 의술을 가지신 줄도 모르고…….”
“아닙니다, 제갈 공자. 아까 설화가 말한 대로 공짜는 아닙니다.”
“네, 아무런 보답도 안 한다면 저희 가문의 얼굴에 먹칠하는 격이지요. 일이 끝나면 꼭 보답하겠습니다.”
“그런 마음가짐이면 됩니다. 그 보답으로 나중에 부탁 하나 할 테니 들어주겠습니까?”
“얼마든지 말하시지요. 강호의 도의에 벗어나지 않는 일이라면 팽 공자의 말씀에 따르겠다고 천지신명에게 약속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다시 출발하겠습니다.”
한빈이 조용히 앞으로 걸어갔다.
제갈공려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제갈휘의 발목을 침 한 방으로 고쳤다.
뭐, 통증이야 줄일 수 있었다. 하지만, 침을 맞고 바로 일어난다는 건 화타가 다시 와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때였다.
제갈휘가 멀어지는 한빈의 등을 향해 합장했다.
“감사합니다.”
제갈공려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포권도 아닌 합장이라니 제갈휘의 평소 행동과는 달랐다.
제갈휘는 고모의 표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빈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의 표정은 합장할 때와 마찬가지로 경건함을 잃지 않았다.
사실 가장 당황한 것은 제갈휘 자신이었다.
제갈휘는 발목을 삔 것이 아니라 금이 갈 정도의 심각한 부상을 입었었다.
고모가 걱정할까 봐 가벼운 부상이라 한 것이었다.
그런데 한빈은 금이 간 발목을 고친 것도 모자라 제갈휘의 기력까지 모두 회복시켰다.
이건 인간의 의술이 아니었다.
제갈휘는 한빈을 화타가 환생한 것이라 생각했다.
* * *
이틀 후.
드디어 무가지회의 막이 올랐다.
단상에서는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장천이 올랐다.
본래에는 가장 연장자이며 주최자이기도 한 사천당가의 가주가 십대세가의 대표로 올라서야 하지만, 아직 완쾌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물론 완쾌는 됐지만, 한빈의 부탁으로 연기를 하는 중이었다.
그런 이유로 두 번째 연장자인 남궁장천이 대표로 나서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