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 무가지회 (7)
한빈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아직도 못 믿으십니까?”
“흠.”
제갈공려는 한빈과 저 멀리 있는 금와 전장을 번갈아 봤다.
전서를 확인했다고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한빈을 전적으로 믿을 수 없었다.
상대가 적과 한패일 수도 있었고.
전서의 내용이 가짜일 수도 있었고.
한빈이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계약서야 썼지만, 상대가 적이라면 모든 것이 그저 종잇장에 불과했다.
가장 의심스러운 것이 한빈에 대한 세상의 평가였다.
하북팽가의 수치.
그 말이 이제야 기억난 제갈공려였다.
그런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은침을 날려서 날아가는 비둘기를 맞힌다고?
이 점이 가장 의심스러웠다.
그때 한빈이 말했다.
“시간 없습니다.”
제갈공려의 눈썹은 파르르 떨렸고, 머릿속으로는 혈류가 몰아쳤다.
수많은 가능성이 머릿속으로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것이다.
그때 도호를 외친 중년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재빨리 표정을 수습한 제갈공려가 현문을 바라봤다.
“움직이기 전에 여기 있는 모두의 신원부터 확인해야겠습니다. 내가 비록 하북팽가의 사 공자와 약조했지만, 정체도 모르는 이들과 동행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그녀의 말에 현문이 지그시 웃었다.
누가 봐도 자신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빈도는 무당의 현문이라 하오.”
“천살……. 아니 그 유명한 현문 선배님 아닙니까?”
“뭐, 조금 안 좋은 일로 유명하지만 맞는 것 같소이다.”
“헉, 세상을 떠돌며 불상을 깎는다고 들었는데 언제 여기에 오셨죠?”
“사천에서 불상을 깎은 지는 벌써 일 년이요. 이제는 더는 안 깎는다오.”
“아, 안 깎으시는군요. 그럼 앞으로…….”
제갈공려는 조심스럽게 현문의 안색을 살폈다.
불상 깎기를 중지한 현문은 앞으로 강호에 수많은 사건을 만들 것이 분명했다.
십 년 전에도 그랬으니까.
그 표정을 본 현문이 웃었다.
“내가 사고 칠 나이는 지나지 않았소이까? 중원 최고의 미치광이라는 오명은 다른 사람이 이을 것 같소. 그러니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오.”
“아, 후인을 거두셨군요. 축하드립니다.”
“하하. 그 축하 감사히 받겠소.”
말을 마친 현문은 한빈을 힐끔 바라봤다.
제갈공려도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한빈이 씩 웃는다.
순간 제갈공려의 등에 소름이 돋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상단전이 개방된 그녀의 머리가 묘하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것도 잠시, 제갈공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북팽가의 사 공자는 믿을 수 없었지만, 무당의 현문은 믿을 수 있었다.
현문이 누구던가?
무당의 장문인과 같은 배분이 아니던가?
수염을 깎고 머리는 정리해서 처음에는 못 알아봤지만, 그는 분명 현문이 맞았다.
손 속이 워낙 독하기에 미치광이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거짓말을 하는 자는 아니었다.
거짓말을 못 하기에 일어난 사고들이 더 잦았던,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렸던 무당의 괴인.
“어서 안내하시지요.”
“네, 그럼 지금부터 잘 따라오십시오.”
그때 설화가 조심스럽게 제갈공려의 앞으로 나왔다.
“저는 공자님을 모시는 설화예요. 잘 부탁드려요.”
“저는 청화고요.”
청화도 설화의 뒤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이제까지 아무 말 없이 고모 제갈공려의 대화를 지켜보던 제갈휘가 포권하며 앞으로 나왔다.
“저는 제갈세가의 첫째 제갈휘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와 동시에 한빈의 신형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사사-삭.
나머지 인물도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없어졌다.
제갈휘도 재빨리 내공을 일으켜 그들을 따라잡기 시작했다.
* * *
같은 시각 사천당가의 접객실.
제갈공민은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장천과 마주 보고 있었다.
남궁장천은 날카로운 눈으로 제갈공민을 살폈다.
제갈공민은 정의맹의 특사 자격이지 제갈세가를 대표하는 신분으로 온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리 면담을 요청한다는 것은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남궁장천만이 아닌, 십대세가의 대표들까지 자리에 모이면 좋겠다고 부탁을 해 왔다.
덕분에 지금 접객당에는 십대세가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실 남궁장천은 제갈공민과의 만남이 그리 달갑지는 않았다.
정의맹의 총군사인 제갈공민을 볼 때면 속마음을 들키는 것 같아서였다.
그때 제갈공님이 입을 열었다.
“남궁 가주님께 제안할 것이 있어서 이렇게 뵙자 했습니다.”
“본론부터 말해 보시오. 여기 계신 십대세가의 대표분들이 모두 기다리고 계시지 않습니까?”
남궁장천이 주위를 가리켰다.
남궁장천의 시선을 받은 십대세가의 대표들은 모두 호기심에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럼 바로 본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 무가지회에서 용봉지회를 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용봉지회라……. 이번 무가지회에서는 생략하기로 하기로 했소. 사파를 견제하는 것이 목적인 만큼 가능한 한 모두의 마음을 모아 정파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맞다 생각하오만.”
“물론 그렇지요. 그런데, 목소리를 하나로 모으기가 쉽겠습니까?”
“그런 무슨 뜻으로 한 말이요? 총군사.”
“저는 총군사가 아닌 제갈세가 대표로 이 자리에 온 것입니다. 그러니 편하게 의견을 나누도록 하지요.”
제갈공민은 씩 웃으며 십대세가 대표의 자리 중 빈 곳을 찾아 앉았다.
그러고는 부채를 쫙 펼치고 여유 있게 부채질을 했다.
그를 보던 하북팽가의 대표 팽대위는 고개를 갸웃했다.
제갈공민은 팽대위도 아는 자였다.
그런데 그는 이런 자리에 나올 사람이 아니었다.
이런 자리에 얼굴을 비칠 시간이 있다면 차라리 서책 한 권을 더 읽는다는 것이 평소 제갈공민의 태도니까.
그런데 이리 나섰다는 것은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것.
팽대위뿐 아니라 나머지 십대세가의 대표들도 곱지 않은 시선으로 제갈공민을 바라봤다.
그때 사천당가의 대표로 나온 당광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광현은 한빈과 인연이 있는 당기명의 아비이자 배분으로 치면 지금 이 자리에 나온 이들과 같았다.
그가 살짝 고개를 숙이더니 말했다.
“무가지회의 주최자로서 제갈가가 용봉지회를 열고자 하는 이유를 들어 보고 싶습니다.”
제갈공민이 기다렸다는 듯이 부채를 접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염치를 무릅쓰고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 십대세가가 이제껏 하나가 된 적이 있었습니까?”
“그건 무슨 말씀이오?”
당광현이 눈을 가늘게 뜨자 제갈공민이 접힌 부채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말이 사파에 대한 견제이지 그 속에는 세가끼리의 수많은 이권이 오갈 것이 아닙니까?”
“…….”
사람들은 그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실제 불이익만 없다면 사파를 견제하자고 목소리를 내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그들의 표정을 확인한 제갈공민이 말을 이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공통적인 의견을 도출해 낸다는 것이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것과 용봉지회가 무슨 상관이오?”
“강자지존.”
“강자지존이라면…….”
“네, 맞습니다. 강자의 의견이 따른다면 이 중 누가 반박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중 강자를 가리면 간단하지 않소? 굳이 후기지수를 위한 비무 대회를 열 필요가 있겠소?”
당광현이 제갈공민을 바라보더니 눈매를 좁혔다.
그들의 대화에 십대세가의 대표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미소를 머금은 제갈공민이 말을 이었다.
“지금 우리의 결정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지겠습니까? 우리일까요? 아니면 후기지수일까요?”
“…….”
“그리고 지금 일촉즉발의 상황이 아닙니까? 여기 계신 분들이 비무를 하다 다치기라도 한다면 사파의 고수는 누가 견제하겠습니까?”
“흠.”
여기저기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그 모습에 제갈공민이 부채를 폈다.
촤르륵.
그는 부채를 모두에게 보였다.
그러고는 당광현에게 말했다.
“제가 암기 하나 쏴 보시지 않겠습니까? 조금 약한 것으로 부탁드립니다.”
“암기라…….”
“그냥 부담 갖지 마십시오. 정 뭐하시면 이거라도 던져 주십시오.”
제갈공민이 철전 하나를 던졌다.
휙.
날아온 철전을 만져 본 당광현이 다시 철전을 날렸다.
해를 입히지 않을 정도의 내공을 담은 철전이 제갈공민의 얼굴로 날아갔다.
제갈공민이 부채로 철전을 막았다.
푸식!
철전이 제갈공민의 부채를 뚫었다.
제갈공민은 부채를 뚫고 나오는 철전을 가볍게 잡았다.
탁!
그 모습에 당광현이 말했다.
“제갈가의 금나수는 잘 봤소이다.”
“제가 보여 드리려고 한 건 금나수가 아니라 바로 이 부채입니다.”
제갈공민은 부채를 가리켰다.
그 부채에는 시원하게 구멍이 나 있었다.
모두가 고개를 갸웃할 때 제갈공민이 말을 이었다.
“원래 여기에는 십장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홉 개만 남았죠. 십장생 중 어떤 게 없어졌을까요?”
“그건 무슨 뜻이지요?”
“십대세가는 이렇게 흩어진 십장생과 같습니다. 만일 어떤 가문에 멸문지화를 당한다고 해도 누구도 신경 쓰지 않겠지요. 그게 제갈세가가 될지 아니면 다른 가문이 될지는 모릅니다. 그럼 당 대협께 다시 한번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아까 공력의 두 배로 부탁드립니다.”
말을 마친 제갈공민은 철전을 다시 당광현에게 던졌다.
휙.
철전을 다시 잡은 당광현은 고개를 끄덕인 뒤 바로 그것을 제갈공민에게 쏘아 냈다.
팡!
제법 공력이 실렸는지 파공성을 일으키는 철전.
얼굴 앞에 다가오자 제갈공민은 부채를 접었다.
난데없는 동작에 모두가 눈을 크게 뜰 때 접힌 부채로 철전을 쳐 냈다.
팍.
철전이 꺾이더니 옆쪽으로 날아가 도자기에 맞았다.
와장창!
뜻밖의 모습에 모두가 입을 벌리고 있을 때 제갈공민이 말했다.
“아까는 약했지만, 이렇게 뭉치니 강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십장생이 그려진 한지라면 후기지수는 가문을 실질적으로 받치고 있는 부챗살입니다. 그들에게 기회를 주시죠.”
“흠, 알겠소이다.”
“감사합니다, 당 대협.”
“그런데 왜 도자기는 깬 것이오?”
“우리 십대세가만 무사하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제갈공민이 진득하게 웃자 당광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깨진 도자기를 바라봤다.
그게 구파일방을 뜻하는 것이든, 관아를 뜻하는 것이든 관계없었다.
제갈공민의 뜻은 십대세가가 하나로 뭉쳐 적을 몰아내고 이익을 극대화하자는 것이니 말이다.
그때 보고만 있던 남궁장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제갈 대협의 고견을 듣고 싶소.”
“남궁 가주님께서도 허락하셨으니 구체적인 계획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제갈공민은 막힘 없이 자신의 계획에 대해 털어놨다.
그의 요점은 간단했다.
전력의 손실을 극대화하기 위해 병장기가 아닌 권각술로 결판을 내자는 것이었다.
제갈공민은 자신의 의견을 말하며 주변을 살폈다.
그가 말하는 것은 납치범이 보낸 서찰에 적힌 내용을 옮긴 것뿐이었다.
그가 유심히 보고 있는 것은 세가들의 반응.
동조하는 이도 있었고 꺼려 하는 이들도 있었다.
박투술에 능한 가문이라면 굳이 피할 이유가 없었고 검과 도 등 병장기에 능한 가문은 꺼려 하는 분위기였다.
“……제 의견은 여기까지입니다.”
말을 마친 제갈공민은 모두를 바라보는 것 같지만, 한 무림세가의 대표를 유심히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