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 무가지회 (5)
그 때문에 이미 이곳에서 정착한 농가들만이 촌을 이루어 사는 조용한 동네였다.
옆에 흐르는 강인 귀락천의 이름을 따 동네의 이름도 낙촌(樂村)이라 부른다.
동네 이름에서 ‘귀’ 자를 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낙촌에는 유난히 눈에 띄는 집이 있었다.
그것은 강가에 자리 잡은 큰 장원이었다.
사람들이 이곳 귀락천을 꺼리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 장원 때문이었다.
장원의 이름은 낙향장.
낙향장은 중앙에서 권세를 휘두르던 관리 중 하나가 이곳에 자리는 잡으며 짓게 된 장원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백 년 전의 일.
실제로 이곳에서 누가 살고 있는지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돈 많은 부호가 취미로 가축을 키우기 위해 이곳을 넘겨받았다는 소문만이 들릴 뿐이었다
수천 마리의 닭과 수십 마리의 돼지를 기르는 이곳은 제법 심한 냄새와 소음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밖으로 새어 나오는 닭 울음소리는 가끔은 귀신 소리인지 사람의 비명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섬뜩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양계장의 안쪽에서는 소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꼬끼- 으악!
근처를 지나가던 마을 아이들은 낙향장 담장 안에서 울리는 괴성에 몸을 떨고 도망간다.
“허, 저거 무슨 소리야.”
“빨리 가자. 진짜 귀신 나온다.”
“그래, 여긴 언제 와도 무서워.”
아이들이 낙향장에서 멀어질 때, 그곳에서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다리에 전서를 동여맨 비둘기였지만, 워낙 가축이 많은 이곳이기에 누구도 눈여겨보는 이는 없었다.
한편, 낙향장의 구석에 있는 창고.
창고를 둘러싼 양계장과 옆에 흐르는 물소리 덕분인지 이곳은 더욱 음침해 보였다.
그 창고 안에서 복면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잘 들어라. 여기서 탈출을 시도하는 자가 있다면 남아 있는 자 중 둘을 죽인다고 했지?”
그의 입술 쪽 복면이 실룩인다.
그러더니 그는 가지고 있던 보자기를 바닥에 툭 던졌다.
보자기가 데구루루 구르더니 백발에 도인 풍모를 지닌 사람의 앞에 멈췄다.
그의 이름은 제갈공영.
실종된 제갈세가의 가주였다.
사실 실종이란 말을 쓰는 것은 옳지 않았다.
자신이 이곳에 납치되었다는 것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제갈세가의 행렬이 함정에 빠져 이렇게 납치를 당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산공독에 당한 이유도 있지만, 적 중 하나의 무력이 천하 십대고수에 버금갈 정도로 고강했다.
제갈공영은 적의 정체에 대해 추측해 봤지만, 이곳이 어디인지도 알 수 없었다.
지금 그의 앞에 있는 복면인은 그가 마주했던 십대고수에 버금가는 무력을 지닌 이는 아니었다.
고수의 오른팔 정도의 위치에 있는 자 같았다.
그는 지금 보따리 하나를 던져 놓고 자신에게 확인할 것을 재촉하고 있었다.
제갈공영은 조심스럽게 보따리를 열었다.
순간 제갈공영을 침음을 흘렸다.
“음.”
그에 비교해 뒤쪽에서는 여기저기에서 비명이 터졌다.
“악!”
“대체 저건…….”
그도 그럴 것이, 보따리에 담긴 것은 제갈세가 호위 중 하나의 머리였다.
제갈공영이 최대한 표정을 수습하려 노력할 때 뒤쪽에서 누군가 고함을 질렀다.
“네놈이 내 수하를 죽여?”
내공을 실리지 않았지만, 그 감정 때문인지 그 목소리는 창고 내부를 울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가주의 둘째 아들인 제갈명.
지금 목이 잘린 무사가 바로 제갈명의 호위였다.
그가 못 참고 앞으로 나가려 하자, 제갈공영이 막았다.
“진정하여라, 명아.”
“아버님, 제가 저자를…….”
“지금 우리에게 저자에 대항할 힘이 있느냐?”
“…….”
제갈명은 아무런 답도 할 수 없었다. 아비 제갈공영의 말대로 지금 나서는 것은 객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모습에 복면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역시 제갈세가군. 머리가 잘 돌아간단 말이야. 아마도 지금 머릿속에서는 우리 정체가 뭔지, 이 위기를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계산을 하고 있겠지?”
“…….”
“그게 제갈세가다운 것이지. 하지만, 내가 얘기했지? 한 명이 도망치면 두 명이 죽어야 한다고.”
복면인은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조금 전 앞으로 나온 제갈명이 있었다.
그 모습에 제갈공영이 다급하게 외쳤다.
“네가 목을 벤 자는 여기서 도망친 자가 아니지 않으냐?”
제갈공영은 바닥에 뒹구는 머리를 가리켰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틀 전 사천당가로 가는 도중 습격을 받았다.
그중 운이 좋게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수하가 하나 있었다.
제갈공영은 그 수하가 자신들의 위치를 사천당가에 모인 이들에게 전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참변을 당한 채 돌아왔다.
이제 믿을 것은 동생인 제갈공민뿐이었다.
대충 상황을 보니, 이들은 동생에게 일회성이 아닌 계속된 요구를 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동생 제갈공민은 이곳과 연결된 선을 찾아내어 자신을 구출하리라 믿었다.
비록 시일이 걸릴지라도…….
그때 복면인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제갈 가주의 말이 맞아. 그래도 벌은 내려야겠어. 어떤 벌이 좋을까?”
복면 속으로 희미하게 웃은 그는 손뼉을 쳤다.
짝짝!
그 소리에 맞춰 복면인 둘이 소리 없이 나타났다.
그 두 명 중 한 복면인은 우두머리 복면인에게 물었다.
“대주, 부르셨습니까?”
“심심하던 차에 잘되었다. 준비한 것을 걸어라.”
우두머리 복면인의 말에 수하가 재빨리 품속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
그러고는 벽 쪽에 두루마리를 걸었다.
두루마리를 걸자 그림 하나가 쫙 펼쳐졌다.
제갈세가의 식솔들은 그 그림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해야 했다.
그림은 다름 아닌 사람의 신체를 그려 놓은 그림이었다.
조금 이상하다면 안쪽에 뼈까지 세부적으로 그려 놨다는 점이었다.
그때 복면인이 말했다.
“자, 지금부터 놀이를 시작하겠다. 이건 혈맥이 아니라 신체에 뼈를 그려 놓은 것이지.”
“그건 대체 왜…….”
“제갈 가주는 우리 몸의 뼈가 몇 개인 줄 알고 있나?”
“…….”
“정확히는 이백여섯 개야. 이백여섯 개. 그런데 의원도 아닌 내가 이렇게 잘 알고 있을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그냥 닥치고 들어. 내 취미가 산 채로 뼈를 빼는 거야. 내가 그 시범을 보여 줄까 해. 여기 장난감도 있으니 뭐, 일단 한 개만 빼 보자고.”
복면인이 씩 웃으며 제갈명을 가리켰다.
순간 제갈명의 눈이 커졌다.
복면인은 아무렇지 않게 제갈명의 아혈을 찍었다.
픽.
순간 제갈명이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부르르 떨었다.
복면인은 표창 하나를 가주 제갈공영에게 전했다.
“자, 이거 잡아.”
“이걸 대체 왜 내게 주는 것이냐?”
제갈공영은 진심으로 그 뜻을 알지 못했다.
복면인은 그 모습에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토했다.
“하하. 몰라서 묻는 건가? 내가 말했잖아. 저기에 던져서 맞히는 뼈를 뽑아 주지. 잘 선택해야 할 거야. 참, 못 맞히면 그때부터 뽑아야 할 뼈를 두 배씩 올릴 테니 그렇게 알아.”
“이놈아! 하늘이 무섭지도 않으냐?”
“우리가 하늘이야. 퉤!”
“…….”
“싫으면 내가 던질까? 난 허벅지 뼈가 좋더라. 그거 하나 빼면 백에 아흔아홉은 우르르 무너지더라고. 몸뿐 아니라 정신까지 말이야.”
잠시 후.
창고 안에서는 제갈명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아악!”
그의 뼈를 살 속에서 빼낸 복면인은 자랑스러운 듯 그 뼈에 흐르는 핏물을 털어 냈다.
툭툭.
피를 닦아 낸 그는 제갈명에게서 뽑은 뼛조각을 자신의 가죽 주머니에 넣었다.
* * *
한편, 다음 날 정오.
제갈공려는 서찰을 통해 몇 가지 단서를 얻을 수 있었다.
서찰이 놓인 시간과 그 근처에 있던 하인들.
그리고 그들의 소속을 통해서 서찰을 가져다 놓은 용의자를 넷으로 추릴 수가 있었다.
하지만, 무작정 그들을 잡아서 족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만에 하나 꼬리를 자르고 숨기라도 한다면, 자신의 큰 오라버니 즉, 가주 제갈공영은 더 큰 위험에 처하게 된다.
서찰에는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 적혀 있으니까.
그런 이유로 제갈휘만 데리고 은밀히 움직이는 중이었다.
그녀의 옆을 따르는 제갈휘는 연신 마른침을 삼키고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투덕거리며 싸웠지만, 큰일이 닥쳤을 때 믿을 수 있는 것은 형제밖에 없다고 항상 가슴에 새긴 그였다.
그 가르침을 준 것은 제갈휘의 아버지였다.
그런데 아비와 형제가 동시에 납치를 당하다니?
이런 일은 제갈세가 역사상 한 번도 없었던 없었다.
제갈휘의 표정을 본 제갈공려가 말했다.
“휘야,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네. 알겠습니다, 고모님.”
“그래. 네가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가족도 구할 수 있는 법이란다. 그리고 구하는 것에서 만족하면 안 되는 거 알지?”
“네?”
“우리 가문의 가훈이 무엇이더냐? 은혜도 원한도 두 배로 갚는다는 게 아니냐? 이 원한은 두 배로 갚는다.”
“네, 고모님.”
제갈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때였다.
제갈공려가 말했다.
“대상이 움직인다. 둘이니 만약에 흩어지면 내가 왼쪽을 맡는다.”
“네, 알겠습니다.”
제갈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에 이어서 제갈공려도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몇 쌍의 눈이 번뜩이고 있었다.
그 눈빛의 주인 중 하나가 물었다.
“언제까지 쫓으실 거예요?”
“아무래도 좀 더 쫓아야 할 것 같은데. 힘들면 돌아가도 돼, 설화야.”
“아니에요. 저는 이렇게 산책하는 게 좋아요. 너도 그렇지, 청화야?”
“저도 이런 산책이 좋아요. 헤헤.”
그들의 대화에 현문이 끼어들었다.
“이게 산책이오?”
“이 정도면 산책이죠.”
설화가 답하자 현문은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처음 볼 때는 철없는 무림세가의 막내 공자로만 알았다.
그리고 깨달음을 줬을 때는 그저 학문이 높은 줄로만 알았다.
물론 그 후 시녀인 설화와 청화조차 무공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았다.
거기까지만 해도 이해가 안 되었는데, 두 시녀는 지금 미행을 산책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대체 저들은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일까?
현문은 천살성을 타고난 자신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고 확신했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저들에 비하면 자신은 순탄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때 한빈이 말했다.
“자, 출발하겠습니다.”
동시에 네 개의 신형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빈 일행이 멈춘 곳은 저잣거리에 있는 장신구 가게의 앞이었다.
물론 앞쪽에는 한빈이 미행하고 있는 제갈세가의 두 인물이 있었다.
한빈은 제갈세가에 횡액이 닥쳤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것은 그들의 표정이 말해 주고 있었다.
그들의 동작 하나하나가 절실했으며 그들 표정은 암울하게 그지없었다.
천하의 제갈세가가 횡액을 당했다고?
사실 갸우뚱하는 부분도 없잖아 있지만, 적이 함정을 파고 기다리는 무가지회이기에 어떤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어쩌면 제갈세가가 이번 사건에서 가장 큰 열쇠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한편 일꾼들의 뒤를 미행하던 제갈공려는 슬며시 제갈휘에게 눈짓했다.
제갈휘가 입 모양으로 말했다.
“왜 그러십니까?”
“뒷간 좀 갔다 오마.”
“네, 그럼 저는 조용히 지켜보고 있겠습니다.”
“그래. 얼마 안 걸릴 테니 혹시라도 이동하면 표식을 걸어 놓아라.”
볼일을 보고 오겠다는 것치고는 제갈공려의 표정은 진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