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 무가지회 (4)
한빈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답했다.
“내 표정이 왜?”
“꼭 사고 치시기 전 표정 같아서요.”
“아, 그냥 배가 고파서 그러지.”
말을 마친 한빈은 요리를 한 점 집어 입에 털어 넣었다.
그 모습에 현문이 말했다.
“허허. 사고는 벌써 친 거 아니오, 팽 공자?”
“에이,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돼요. 이건 사고 축에도 못 껴요, 아저씨.”
설화가 한빈 대신 답하자 현문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이게 사고 축에도 못 낀다면……. 벌써 강호가 떠들썩해야 하는 거 아닌가?”
“우리 공자님이 항상 말씀하시는 게 있어요.”
“어디 말해 보게.”
“사고 치는 게 나쁜 게 아니라고요.”
“허, 그건 태어나서 처음 듣는 말 같소만.”
현문은 힐끔 한빈을 바라봤다.
강호의 기인들과는 결을 달리하는 인재가 분명했다.
사고 치지 말란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라 온 그였다.
설화가 말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때 설화가 말을 이었다.
“사고 치는 게 나쁜 게 아니라 걸리는 게 나쁜 거라고 하셨어요. 그치, 청화야?”
“맞아요.”
청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요리는 한 점 집었다.
현문은 어안이 벙벙해져 한빈을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친 한빈은 말했다.
“이건 영업 비밀입니다. 그러니 혼자만 알고 계십시오.”
“아, 비밀은 지키겠소.”
현문이 어색하게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 * *
그날 밤.
무가지회에 온 몇몇 무림세가의 숙소에는 불이 꺼지지 않았다.
그들 중에는 강호에서 지략가를 배출해 내기로 유명한 제갈세가도 있었다.
제갈세가의 숙소에서는 가문이 배출해 낸 최고의 지략가라 부르는 제갈공민이 팔짱을 끼고 있었다.
무인과는 달리 학자의 복장을 한 그는 무공보다 진법과 학문에 능한 이였으며, 정의맹의 군사직을 맡은 이였다.
그는 가주의 동생이기도 하며, 가주 제갈공영이 가장 믿는 가문의 지낭이었다.
마흔 중반인 그는 무림맹의 최고 군사직을 벌써 십 년 이상 맡고 있었다.
그런 그의 표정이 일렁이는 호롱불만큼이나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서찰 한 장이 펼쳐져 있었다.
표정을 수습한 제갈공민의 메마른 입술이 힘들게 열렸다.
“이 서찰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있느냐?”
“…….”
제갈공민의 물음에 답하는 자는 없었다.
모두 서로를 바라보며 눈짓을 할 뿐이었다.
그 눈짓의 뒤에는 고개를 갸웃하며 모른다는 신호를 주고받았다.
제갈공민이 물었다.
“휘야, 네가 이 서찰을 발견한 것이 언제라 했느냐?”
“정확히 두 시진 전입니다. 제가 식사를 하고 돌아와 보니 제 탁자에 이 서찰이 놓여 있었습니다.”
“흠.”
제갈공민이 턱수염을 쓸어내렸다.
그의 심각한 표정은 이 서찰 한 장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이 서찰에 따르면, 가주와 가주의 아들인 제갈수와 제갈명이 사로잡혀 있다.
물론 그를 따라온 제갈세가의 수많은 식솔과 함께 말이다.
제갈공민은 이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자신과는 다르게 가주 제갈공영은 무림 백대고수에 이름을 올릴 만큼 무위가 뛰어나다.
그것뿐이겠는가?
가주의 호위를 맡은 자 중 몇몇은 초절정의 고수였다.
말도 안 되는 무위를 가진 상대가 나타난다면 그들이 철저히 눌릴 수도 있겠지만, 지금 가장 이상한 것은 소식 한 통 없다는 점이다.
제갈세가는 어떤 경우에서라도 마지막 소식을 전할 수 있도록 전서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소식이 없다는 것은, 전서구를 날릴 시간조차 없었다는 뜻이었다.
거기에 더해 그 많은 고수 중 한 명도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런 무위를 가진 집단은 딱 둘이 있었다.
하나는 황실이고 하나는 마교였다.
하지만, 둘 다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다.
잔혈마도 사건 이후로 정의맹은 천산에서 넘어오는 마교 세력에 대한 감시를 더욱 철저히 했다.
그 결과, 마교는 지금 내분으로 중원으로 올 여력이 없음을 알아냈다.
잔혈마도가 영단산에서 벌인 사건은 그의 독자적이 소행이라는 것이 제갈공민의 결론이었다.
그렇다면 황실은?
황실은 더욱 명분이 없었다.
차기 황위에 대한 태자들 간의 싸움이 본격화된 시점에서 무림에 눈을 돌릴 틈이 없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황실에 무림에 개입해서 얻어질 이득이 없다는 것이다.
둘 다 아니라면 새로운 세력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사실 그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정의맹 총군사인 제갈공민의 정보망에도 걸리지 않는 마교에 버금가는 세력이라?
이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때 옆에서 보고 있던 제갈공민의 동생 제갈공려가 물었다.
제갈공려는 제갈공민과는 나이 차가 꽤 나는, 서른 후반 정도의 여인어었다.
“오라버니, 간단하게 생각하죠? 그쪽에서 요구하는 조건은 뭐예요?”
“일단 남궁가주를 만나서 이런 요구를 하라는구나.”
“무슨 요구요?”
“직접 봐라.”
제갈공민이 서찰을 호롱불 앞에 세로로 펼쳤다.
제갈공려가 눈을 가늘게 뜨고 제갈공민의 가리킨 곳을 읽었다.
“용봉지회…….”
“그래, 용봉지회를 열라는구나.”
“지금 그럴 상황은 아니잖아요.”
“그러게 말이다. 사천당가의 가주는 병세의 차도에 진척이 없고, 거기에 사도련은 지금 남북이 결집하는 상황이다. 그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 모였는데 용봉지회라니?”
“그런데 남궁세가의 가주가 승낙할까요?”
“날이 밝는 대로 알아봐야지. 만약 용봉지회를 쉽게 승낙한다면 이 일과 관련이 있을 것이야. 그렇다면 경우의 수는 두 가지지.”
“두 가지라면요?”
“이 일의 주모자와 관련이 있거나, 아니면 우리처럼 똑같이 협박을 받거나 말이야.”
“그래서 남궁세가 가주를 만나 보시게요?”
“그래, 만나야지. 우리가 지금부터 알아볼 것 역시 두 가지다.”
“두 가지라니요?”
“하나는 남궁세가의 가주를 떠보는 것이고…….”
“또 하나는요?”
“이 서찰의 진위를 알아내는 것이다. 너라면 해낼 수 있을 것이니, 이 일은 네게 맡기겠다.”
“흠.”
“할 수 없을 것 같으냐?”
“아니에요.”
“그래야지. 네가 여자만 아니었다면 정의맹의 총군사는 네 자리였을 것이야.”
“알고 있어요, 오라버니.”
“겸손은 전장에 저당 잡히고 온 게로구나.”
“현재 상황에서 겸손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그래, 그럼 이제부터 부탁한다. 밖에 일은 공려 너에게 모두 맡길 테니 필요하면 정의맹의 힘까지 모두 쓰거라.”
제갈공민은 품에서 패 하나를 꺼내 제갈공려에게 던졌다.
휙!
제갈공려가 패를 받아 확인하더니 씩 웃으며 품에 넣었다.
“총군사 패네요. 이거면 정의맹 사천 지부를 다 차출할 수도 있겠네요.”
“신중히 써라.”
“네, 그럼 휘는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그리하거라.”
“그럼 안쪽은 오라버니한테 맡기고 이만 가 볼게요.”
제갈공려는 살짝 고개를 숙인 후 조카인 제갈 휘를 바라봤다.
“휘야, 너는 나랑 가자.”
“네, 고모님.”
말을 마친 둘은 방 안에서 바람처럼 사라졌다.
둘이 사라지는 모습을 본 제갈공민은 다시 한번 서찰을 바라봤다.
그가 생각하는 가장 최상의 결론은 이 서찰이 단순한 협박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지금 이곳 무가지회로 오고 있는 가문과 소식이 완벽히 끊어졌다는 것이다.
* * *
창가에 기대어 밤하늘을 바라보던 한빈은 눈매를 좁혔다.
다급하게 달려가는 듯한 두 명의 발소리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발소리에 신경 쓰는 이유는 하나였다.
그 소리는 상당히 은밀했다.
다급하다면 이곳 사천당가에서 기척을 숨길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소란을 일으켜서라도 그 다급함을 알리는 게 맞았다.
한빈은 재빨리 내공을 일으켰다.
‘구걸십팔보.’
한빈이 막 자리를 뜨려는 순간, 두 개의 신형이 나타났다.
“공자님, 어디 가세요?”
“뒷간에 간다.”
“그런데 왜 구걸십팔보를 펼치려고 하세요?”
“하하, 설화가 눈썰미가 많이 늘었네.”
“헤헤. 고마워요, 공자님. 그럼 저희도 같이 가도 되죠?”
“그래, 같이 가자.”
한빈이 슬쩍 턱짓하자 신형 하나가 더 나타났다.
스르륵.
설화와 청화가 뒤를 돌아보며 눈을 크게 떴다.
그곳에는 현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현문이 점잖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호위해야 할 대상이 움직이니 저도 따르겠소. 그래도 되겠소이까? 공자.”
“오지 말라면 안 오시겠습니까?”
“흠…….”
“편하게 자리하시지요. 그런데 기척은 최대한 죽이셔야 합니다.”
“물론이오, 공자.”
현문이 고개를 끄덕이자 한빈이 씩 웃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한빈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품 안을 뒤적였다.
품에서 꺼낸 것은 서책이었다.
한빈은 멀리 떨어진 탁자를 바라봤다.
‘백발백중.’
한빈은 서책을 탁자에 날렸다.
휙.
서책이 탁자에 떨어지자 한빈은 뒤도 안 돌아보고 구걸십팔보를 운용했다.
사사삭.
풀잎 스치는 소리만 남긴 채 한빈이 사라졌다.
뒤를 이어서 비슷한 소리가 한빈의 숙소에 울려 퍼졌다.
다음 날 아침. 한빈이 사라진 숙소.
한빈과 이번 무가지회를 상의하기 위해 들른 팽대위와 팽혁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침부터 방 안이 너무 썰렁했던 것이다.
팽혁빈이 다급하게 주위를 살폈다.
“한빈아, 어디 있느냐?”
“흠, 벌써 튄 것 같구나.”
팽대위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자, 팽혁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튀다니요?”
“이 정도 소란이면 설화나 청화 둘 중 하나는 와야 정상이겠지.”
“음. 그런 것 같습니다, 숙부님.”
“그런데 다 같이 안 오는 것을 보면 어딘가로 튄 게 분명하지.”
“그것도 맞습니다.”
“문제는 한빈이가 이렇게 튈 때마다 꼭 사고를 쳤다는 점이지.”
“헉, 그건…….”
팽혁빈의 눈빛이 떨렸다.
그냥 사라진 게 아니라 세가의 운명을 좌우할 무가지회에서 사고를 친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그때였다.
팽대위가 고개를 갸웃하며 탁자 위를 바라봤다.
“저 서책은 뭐지?”
“서책이라니요……?”
고개를 돌린 팽혁빈이 말끝을 흐리며 탁자로 달려갔다.
책자를 들어 본 팽혁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책자에는 아무런 제목이 적혀 있지 않았다.
팽혁빈은 책자를 펼치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리 봐도 뜻을 알 수 없는 내용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책자의 내용은 간단했다.
가문의 이름과 표시였다.
첫 번째 장에는 무가지회에 참석하는 가문의 이름이 적혀 있었으며 가문의 반 정도에 표시가 되어 있었다.
표시는 간단하게 한 일(一)로 가문을 그어 놓았다.
다음 장을 보면 가문은 반 정도로 줄어들어 있었다.
그중 반 정도의 가문에 같은 표시가 되어 있었다.
마치 살생부와도 같은 이 표시는 대체 뭐란 말인가?
팽혁빈은 숙부인 팽대위를 바라봤다.
“이건 좀 이상합니다.”
“아니다. 네가 알아서 판단해라.”
“네, 알겠습니다.”
팽대위는 재빨리 서책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남들이 보면 오해받을지 모르는 서책을 이곳에 그냥 둘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 * *
사천과 중경의 경계선에 있는 귀락천.
귀락천은 물줄기가 여름에도 서늘해서 귀신이 물놀이를 한다고 전해지는 작은 강줄기였다.
덕분에 사람들은 이곳을 방문하기를 꺼린다.
실제로도 물놀이를 온 아낙네나 아이들이 종종 실종되곤 하는 곳이라 관아에서도 이곳의 출입을 금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