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 무가지회 (3)
그 소리에 맞춰 한빈이 청화를 바라봤다.
“청화야, 너도 앉아. 일단 당과부터 먹고 찹쌀떡은 조금 있다 사러 가자.”
“진짜 괜찮은 거예요?”
“에이, 괜찮다니까? 아, 참 잊은 게 있네.”
“그게 뭔데요?”
청화가 고개를 갸웃하자 한빈이 품속에서 천을 꺼냈다.
그러고는 설화와 청화에게 나눠 줬다.
설화는 그러려니 하면서 당과를 베어 물고 청화는 신기하다는 듯 천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게 뭐예요?”
“아, 이거 복면이야.”
“복면이요?”
“복면은 대체 왜요?”
“원래 싸움은 공평해야 하는 법이야.”
“흠, 지금 보면 현문 아저씨 혼자서도 잘하고 있는데요.”
청화가 지금 셋과 맞서는 현문을 가리켰다.
혼자 잘하는 게 아니라 살살 밟아 주고 있는 과정이었다.
한빈은 진득한 웃음과 함께 말을 이었다.
“원래 싸움이라는 건 쪽 수를 맞춰야 하는 게 강호의 법칙이지.”
“그런데 왜 복면이 필요해요?”
“저쪽도 복면 썼잖아.”
한빈은 면사를 쓴 여인을 가리켰다.
청화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저건 복면이 아니라 면사예요, 공자님.”
“그래, 면사긴 하지. 그런데 얼굴을 가리는 건 똑같잖아.”
“우리 얼굴은 다 보여 줬잖아요.”
“에이, 그 정도로 우리를 유심히 봤으면 그런 시비도 걸지 않았겠지. 청화야, 너는 길을 가면서 네가 밟는 개미 얼굴을 기억하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개미 얼굴을 어떻게 기억해요?”
“그래, 당연히 기억 못 하겠지. 아마 저자들 눈에는 우리가 개미로 보였을 거야.”
“음, 조금 이해가 되려고 해요.”
“일단, 당과부터 먹고 복면은 다음에!”
말을 끊은 한빈은 당과를 한입 베어 물며 현문과 겨루고 있는 무사들을 바라봤다.
대충 누군지 감이 잡혔다.
저들은 한빈이 의심하고 있는 가문 중 하나인 위씨세가였다.
거기에 더해 전생의 악연으로 갚아 줄 빚이 남아 있는 무림세가였다.
이렇게 보니 동귀어진을 하며 몸이 조각날 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하다.
물론 모두 전생의 기억이었다.
한빈은 조용히 여인의 뒤쪽을 바라봤다.
그곳에서는 지시를 기다리는 스무 명의 무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냥 놔두면 무가지회에서 현문을 두고 재판을 열어야 할 상황이 올 수도 있었다.
챙! 챙!
싸움이 더욱 격렬해진다.
현문의 주먹에서 권기(拳氣)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밟아 주려는 것처럼 보였다.
한빈은 슬쩍 설화를 바라봤다.
“다 먹었어?”
“네, 공자님. 이거 진짜 맛있는데요. 아까 도망간 당과 장수가 돌아올까요?”
“너 같으면 오겠어?”
“아. 그럼 안 되는데…….”
설화는 싸움에는 관심 없고 오로지 당과 장수 걱정뿐이었다.
한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설화야, 이제 일하자.”
“네, 준비할게요. 공자님.”
설화가 자연스럽게 복면을 썼다.
그러고는 옆에서 멀뚱거리는 청화에게 남은 복면을 씌웠다.
물론 한빈은 이미 복면을 쓴 후.
팔짱을 끼며 상황을 살폈다.
설화는 뜀박질 준비를 하듯 입맛을 다시며 한빈의 신호를 기다렸다.
옆에 있는 청화는 멀뚱거리며 설화가 움직이길 기다리고 있었다.
기를 뿜으며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현문의 주먹이 무사의 검을 반 토막 내고 그의 복부에 꽂혔다.
마치 방아깨비가 튀듯 날아가는 상대 무사.
그것을 본 위씨세가의 여인이 소리쳤다.
“다들 저놈을 쳐라!”
그것을 시작으로 뒤쪽에 버티고 있는 무사들이 움직였다.
타다닥.
마치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스무 명이 넘는 무사가 현문을 에워쌌다.
세 걸음의 간격을 두고 내뻗은 검.
현문의 입장에서는 고슴도치에게 에워싸인 느낌일 것이다.
그때 현문의 뒤쪽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출발!”
동시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현문을 에워싸던 무사들이 밖에서부터 털썩 쓰러지기 시작했다.
마치 수수깡이 쓰러지듯 힘없이 쓰러지는 무사들.
지시를 내렸던 여인이 당황한 듯 검을 뽑아 들었다.
“네놈들은 대체 누구냐?”
말을 마친 여인은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바로 바닥에 쓰러졌다.
기묘한 점혈 수법으로 마혈을 제압당한 것이다.
쓰러진 여인의 시야에 가죽 신발이 지나간다.
‘저, 저건…….’
여인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이 모든 일을 저지른 것은 물론 한빈이었다.
한빈은 현문에게 가서 얼굴에 복면을 씌웠다.
“이게 뭐 하시는 겁니까? 공…….”
“쉿, 정의를 위해서는 신분을 숨겨야 하는 법입니다.”
말을 마친 한빈은 설화와 청화에게 턱짓했다.
설화는 재빨리 그들의 품을 뒤지기 시작했다.
청화도 설화에게 질세라 재빨리 그들의 품을 뒤졌다.
설화와 청화는 눈 깜짝할 사이에 무사들의 품에서 전낭을 수거해 왔다.
현문은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하북팽가의 사 공자 덕분에 깨달음을 얻기는 했지만, 그의 무위가 이리 신묘할 줄은 몰랐다.
지금 본 무위만으로 평가하자면 세상을 떠난 자신의 사부보다 더 위였다.
현문은 갑자기 뒷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지난번에 자신과 설전을 벌였던 것이 무력이 약해서가 아니라 깨달음을 전해 주기 위해서라 생각하니 한빈의 모습이 더욱 경건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도 잠시.
한빈의 시녀들이 그들의 품을 뒤져 전낭을 챙기자 이제는 아예 넋이 빠진 현문이었다.
거기에 한빈이 신분을 비밀로 하라며 복면까지 씌웠다.
대체 저들의 정체가 무엇일까?
현문의 의문이 끝없이 늘어날 때 한빈이 말했다.
“그만 가시죠. 돈도 넉넉하니 오늘은 제가 내겠습니다.”
“어, 그러시오.”
현문이 고개를 끄덕이자 한빈이 휘적휘적 앞으로 나아갔다.
한빈이 여인의 앞을 지났을 때였다.
바람결에 여인의 면사가 벗겨졌다.
그곳에서는 절세가인이라 해도 될 정도의 외모의 여인이 드러났다.
달빛이 비치는 호수와도 같은 은은한 눈동자.
백옥을 깎은 듯한 피부에 오뚝 선 콧날.
지나가는 남정네라면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녀의 호수 같은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복면을 쓴 괴한, 즉 한빈이 여인을 바라봤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여인의 눈이 커졌다. 마혈을 제압당했지만, 아직 목소리는 낼 수 있었다.
“누, 누구냐? 나를 어찌하려는 것이냐? 나를 욕보이려면 그냥 죽여라.”
“그건 나중에…….”
말끝을 흐린 한빈은 여인을 지나갔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의 착각.
한빈은 내공을 실어 그녀를 밟았다.
팍!
내공이 실린 오른발이 그녀의 몸에 작렬하자 몸이 공중으로 떴다 가라앉았다.
순간 그녀는 정신을 잃었다.
* * *
일방적인 구타가 이루어진 현장에서 한참 떨어진 객잔에서는 복면을 벗은 넷이 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의 음식이 앞에 나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오향장육에서 사천의 요리인 매콤한 게 요리까지.
사천에서 유명하다는 요리를 모두 차려 놓은 것만 같았다.
요리를 한 젓가락 집은 현문이 물었다.
“아까는 왜 그런 것이오?”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게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목숨 아니오? 공자.”
“네, 목숨이지요.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럼 무엇이오?”
“바로 돈입니다.”
“흠.”
“상대를 응징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돈을 빼앗는 거라 생각합니다.”
“돈을 빼앗는다고 해도 또 나쁜 짓을 할 게 아니오?”
“그때 또 빼앗으면 되죠.”
“그건 저잣거리의 왈패들이나…….”
“그런 고정관념을 버리셔야 합니다.”
“그게 어떻게 고정관념이오. 이건 정파로서의 도리가 아니요?”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
“득어망전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모든 고정관념을 버리십시오.”
“허허.”
“왜 그러십니까?”
“깨달음이 머릿속에서 잡히려 하오.”
“그것도 버리십시오. 오늘은 그냥 맛있게 요리를 즐기다 들어가면 됩니다.”
“그럼 하나만 물어보겠소.”
“얼마든지 물어보시죠.”
“아까 그 여인에게는 왜 그런 것이오?”
“아, 마지막에 힘을 쓴 거 말씀입니까?”
“그렇소.”
“돈이 없었습니다. 그때는 몸으로 때워야죠.”
“아.”
현문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는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자신이 불상을 깎은 십 년의 세월이 모두 헛수고였다는 것이었다.
지금 보니 자신에게 깨달음을 준 하북팽가의 사 공자는 전성기 때 자신보다 더 악랄했다.
불상을 깎아야 할 사람은 분명 사 공자였다.
그런데 달리 보면 그는 부처만큼이나 자애로운 심성을 가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이 동전의 양면과도 같았다.
이것이 현문이 오늘 얻은 깨달음이었다.
현문이 혼자만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득어망전이라…….”
물론 한빈에게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한빈이 밟았던 여인이 위지약이라는 점이다.
위지약이 누구던가?
한빈의 수하를 죽였으며 마지막을 함께한 여인.
조각조각 난 살이 섞였으니 그 인연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더 중요한 이유도 있었다.
전생의 인연 때문인지 위지약의 몸에서 진청색 점이 빛났다.
덕분에 구결 하나를 더 획득할 수 있었다.
[용안으로 구결을 확인합니다.]
[지급 구결 천(天)을 획득하셨습니다.]
[……]
[지급(地級) - 만(滿), 천(天)]
한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밝게 웃었다.
* * *
두 시진 후.
사천당가의 접객실은 비상이 걸렸다.
사천당가에서 가장 큰 전각인 접객실은 무가지회를 위해 무림세가의 집행 위원들에게 자리를 내어 준 상태였다.
세가의 수장들이 모인 집행부는 지금 한 가지 사건 때문에 술렁이고 있었다.
지금 세가의 가주 혹은 책임자들의 자리인 상석에 있는 사람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곳에서는 위지약과 그녀의 수하들이 사색이 된 채 서 있었다.
그들 중 위씨세가의 원로가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
“분명 무가지회에 참석하는 걸 알고 습격했어요.”
“흠. 그런데 목숨을 잃은 자는 없던 것 같구나.”
“돈을 빼앗고 저를 욕보였어요.”
“이런 천인공노할!”
“대체 어떻게 욕을 보였다는 말이냐?”
“마구 짓밟았어요.”
“허허, 여인의 순결은…….”
“그게 아니라 그냥 밟았어요.”
“허허,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것이냐?”
“그게 아니라 진짜로 저를 발로 밟고 수하들의 돈을 다 빼앗아 갔어요.”
“무가지회에 오는 무림세가를 노리고 강도 행각을 벌였다는 것이냐?”
“네, 뒤에서 습격해 오는 바람에 저도 당할 수밖에 없었어요.”
위지약은 자신의 치부를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적절히 섞었다.
덕분에 세가 연합의 수뇌들은 범인에 대해서 조금도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때 하북팽가의 대표로 무가 연합에 참석한 팽대위가 물었다.
“어떻게든 범인을 잡아야 우리 십대세가와 강호의 모든 무림세가의 체면이 설 것이다. 작은 단서라도 있으면 말해 보아라.”
“맨 처음 본 얼굴을 기생오라비 같았다는 것만 기억나요. 하지만, 제가 그자의 신발을 봤어요.”
“신발이라…….”
“분명히 금와 상단의 간부들이 신는 신발이었어요.”
순간 상석에 앉아 있던 집행부 전체가 술렁였다.
“금와 상단이라면 이곳의 행사를 주관하는 상단이 아니오?”
“허허, 그렇습니다.”
그때였다.
위씨세가의 원로가 손을 휘휘 저었다.
“그건 우리 아이의 착각일 것 같소. 금와 상단에서 그럴 일을 벌을 확률을 극히 드물다고 생각하오.”
“그래도 지금 증언이 있는데…….”
“우리 아이가 충격 때문에 실언을 한 것 같소만.”
위씨세가의 원로는 일을 무마하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 * *
순간 한빈은 자신의 가죽 신발을 어루만졌다.
그곳에는 금와 상단의 표식이 붙어 있었다.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가죽 신발의 표식을 떼어 냈다.
이것은 한빈이 이간질을 위해 미리 준비해 놓은 것이었다.
한빈의 표정을 본 설화가 물었다.
“공자님, 표정이 왜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