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7. 무가지회 (2)
그 표정을 본 한빈이 눈매를 좁혔다.
“깜빡한 거라…….”
한빈은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리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설화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계획 중에 빠진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한빈이 설화에게 말했다.
“다 준비된 것 같은데, 설화야.”
“앗, 실망이에요.”
설화가 볼을 부풀리자 옆에 있던 청화도 하늘을 올려다보며 발끝으로 바닥을 긁적였다.
한빈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청화의 발끝을 보고 허탈하게 웃었다.
“하하.”
“이제 기억나셨어요? 공자님.”
“그래, 청화가 발끝으로 ‘당과와 떡’이라고 쓰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가자! 지난번에 약속한 건 지켜야지.”
한빈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앞서가자 누군가가 바람처럼 달라붙었다.
“공자, 내가 모시겠소.”
힐끔 옆을 보니 현문이었다.
한빈은 머리를 한번 감싸 쥐고 나서 현문에게 말했다.
“나중에 필요할 때 도와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평소에는 여기 둘을 호위해 주시면 됩니다.”
“오호, 알겠소. 공자. 내 설화와 청화에게 아무 일 없도록 하리다.”
“네, 감사합니다.”
한빈이 고개를 숙이자 현문은 뒤로 빠져 설화와 청화를 매의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뭐, 설화와 청화가 호위가 필요할지는 알 수 없지만, 당장은 현문의 과장된 행동이 너무 부담스러웠다.
설화가 한빈의 소매를 잡아당긴다.
“저분 부담스러워요.”
“설화야.”
“네, 공자님.”
설화가 기대감 가득한 눈으로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한 달만 참아라.”
“헉.”
설화가 한빈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그렇게 넷은 모처럼의 여유를 즐기기 위해 저잣거리로 나왔다.
한빈은 청화와 설화의 변한 모습을 당황스럽게 바라봤다.
그것은 외모가 아니라 성격이었다.
설화와 청화는 전보다 신중하게 간식을 골랐다.
아무래도 깨달음 덕분인 듯싶었다.
웬만하면 이 저잣거리에 있는 당과와 찹쌀떡을 다 쓸어 담으라 했다.
돈은 한빈이 낼 테니 나중에 맛있는 것만 골라 먹으라고도 했다.
하지만, 둘은 먹을거리를 꼼꼼히 살폈다.
마치 비싼 장신구를 사듯 그렇게 신중했다.
그때였다.
설화가 눈빛을 빛내더니 멀리 있는 당과 장수에게 달려갔다.
“아저씨, 이거 하나요.”
“흠, 그래.”
“여기 돈이요.”
“맛있게 먹어라.”
당과 장수가 손을 흔들자 설화가 당과를 한입 베어 물었다.
순간 설화의 눈이 커졌다.
“이거 진짜 맛있어요. 새벽에 딴 열매로 만든 것처럼 즙이 입 안을 적셔요, 공자님.”
“아, 그렇구나.”
“공자님도 한번 드셔 보세요.”
“나는 괜찮아, 설화야.”
“아니에요. 공자님 건 제가 사 줄게요. 헤헤.”
설화가 방긋 웃으며 돌아서서 당과 장수에게 돈을 내밀었다.
“일단 하나 주시고요. 나머지도 싸 주세요.”
“헉, 이걸 전부 다 싸 달라고?”
“요거 하나는 제가 내는 거고 나머지는 제 뒤에 계신 공자님이 내실 거예요.”
“진짜냐?”
당과 장수는 못 믿겠다는 듯 힐끔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이 활짝 웃자, 그제야 당과 장수의 표정이 밝아졌다.
당과 장수가 당과를 담으려 할 때였다.
그의 뒤편에서 한 무리의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들 중 하나가 슬쩍 고개를 내민다.
한 줄기로 딴 머리를 찰랑거리며 얼굴에는 면사를 쓴 채 당과 장수에게 상체를 기울였다.
살짝 출렁이는 상체에 당과 장수가 깜짝 놀랐다.
면사 속의 얼굴을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모든 것이 찰랑거렸기 때문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말이다.
육감적인 몸매에 당과 장수가 넋을 잃고 있을 때, 그녀가 입을 열었다.
“여기 있는 당과는 제가 다 살게요.”
“…….”
“여기 돈이요.”
여인은 손을 내밀었다.
은화 다섯 닢이 그녀의 손 위에서 찰랑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설화가 말했다.
“제가 먼저 사기로 했어요.”
“…….”
하지만, 당과 장수는 아무 말도 없었다.
넋을 잃고 여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화가 발끈해서 외쳤다.
“이 당과는 제가 사기로 했어요!”
“물건을 말로 사는 게 아니지. 나처럼 돈으로 사는 거란다.”
“돈은 우리 공자님이 내줄 거예요.”
“아직 안 냈잖아.”
“낼 거예요. 정 먹고 싶으면 반씩 나누는 게 어때요? 제가 양보할게요.”
“호호, 네가 잘 모르나 본데 맛있는 건 나누는 게 아니란다.”
“…….”
“힘을 가진 자가 다 갖는 거야.”
“힘을 가졌다고 횡포를 부리겠다는 건가요?”
“횡포가 아니라 권리지. 강자지존! 그게 강호의 법칙 아닌가?”
“흠.”
설화는 잠시 망설였다.
예전이라면 상대의 목에 검을 들이댔을 것이었다.
하지만, 깨달음으로 성숙해진 것은 신체뿐이 아니었다.
정신적인 면도 성장한 덕분에 이제는 앞으로 일어날 몇 수를 예상하며 행동했다.
당과와 앞으로 벌어질 무가지회에서의 상황.
모든 계산을 끝마친 설화가 쓴웃음을 지었다.
“맘대로 하세요. 당과 하나 때문에 애꿎은 목숨을 날리고 싶지 않으니까…….”
물론 당신의 목숨이라는 건 생략했다.
여인의 득의양양한 표정이 면사 너머로 살짝 보인다.
한빈은 조용히 팔짱을 끼고 둘의 대화를 지켜봤다.
여인이 강자지존이라고 했으니.
당과 장수에게 산 당과를 빼앗겨도 할 말은 없을 터였다.
그런데 여인의 목소리가 유난히 귀에 거슬렸다.
한빈이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당과 장수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럼 여기 받으시고 당과는 우리가 알아서 가져갈게요.”
“…….”
당과 장수가 홀린 듯 돈을 받으려 할 때였다.
뒤쪽에서 껄껄 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현문의 웃음이었었다.
현문이 씩 하고 웃더니 오른발을 굴렀다.
팡!
동시에 당과를 올려놓은 가판이 흔들렸다.
내공이 담긴 그의 진각에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홀린 듯 여인을 바라보던 당과 장수도 번뜩 정신을 차렸다.
여인이 현문을 향해 외쳤다.
“무슨 짓이죠?”
“그건 당과 하나 사는 데 미혼술을 쓰는 당신에게 물어보고 싶군.”
“흠, 그건 당신이 알 바 아니죠.”
여인은 부정하지 않았다.
도리어 턱을 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그 모습에 현문이 미간을 좁혔다.
“나는 알 바 아니지만, 내가 보호할 저 아이한테는 상관이 있지.”
“보호할 아이라니요?”
“바로 눈앞에 있는 아이 말이요. 눈이 부시도록 예쁜 아이를 앞에 두고도 못 알아본다는 말이요?”
현문이 설화를 가리켰다.
여인이 코웃음 쳤다.
“당신이 그 애 아비라도 된단 말인가?”
“아비는 아니지만 한 달 동안 호위를 맡았소.”
“하하, 이런 아이의 호위라니 바닥까지 떨어진 인생이 훤히 보이는군요.”
여인의 면사에 비웃음이 비쳤다.
하지만, 현문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그 바닥을 오늘 한번 확인해 보려 하오.”
둘을 계속 실랑이를 이어 나갔다.
이대로라면 당과 때문에 칼부림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현문이 깨달음을 얻어 천살성 특유의 살심을 지웠다고 했는데, 지금 보니 변한 게 없는 것 같았다.
전생에도 비슷했다.
보통 무당의 현문이요. 이 한마디면 상대가 알아서 고개를 숙일 텐데 꼭 저렇게 일을 키워 나간다.
물론 한빈이 기분 나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올라간 입꼬리가 그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맡긴 일은 누구보다도 완벽하게 수행하는 것이 현문이었다.
비록 나이 차는 많이 나지만, 전생에서도 나이 든 몸을 이끌고 적을 썰고 다녔던 그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한빈이 설화와 청화를 보호하라고 한 것은 다치게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문은 설화의 마음이 다치는 것까지 생각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같은 편으로서는 미워할 수 없는 또라이였다.
물론 한빈은 다른 이에게 자신이 이렇게 비춰진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한빈은 시선을 돌려 여인을 바라봤다.
현문도 현문이지만, 상대도 조금 이해가 안 되었다.
미혼술은 아니지만, 내공이 담긴 목소리로 당과 장수를 자극했다.
미혼보단 최면에 가까운 수법.
당과 하나 사는 데 저리 나온다라?
미쳤을 확률은 구 할이요.
나머지 일 할은 또라이라는 데 손목을 걸 수 있었다.
그때 현문이 슬쩍 턱짓한다.
옆으로 나오라는 이야기였다.
여인이 코웃음을 치며 발걸음을 옮겼다.
“흥, 진짜 바닥을 보고 싶은 모양이로군요.”
“누가 볼지는 잠시 뒤에 알겠지.”
현문의 말이 끝나자 여인은 뒤쪽을 힐끔 바라보며 손뼉을 쳤다.
짝!
그 소리에 맞춰 무인 세 명이 그녀의 앞으로 나왔다.
여인이 말했다.
“원래 닭 잡는 데는 소 잡는 칼을 쓰는 법이 아닌 건 아시죠? 닭도 과대평가지만요.”
여인이 팔짱을 끼고 턱짓하자 세 명의 무사가 현문을 에워쌌다.
그 모습에 당과 장수도 입을 떡 벌렸다.
당과에 칼부림이 날 줄을 몰랐던 것이다.
당과 장수는 재빨리 자리를 떴다.
먹고살려고 당과를 파는 것이다. 여기에 있다가는 음식을 넘길 목이 달아나게 생겼다고 판단했다.
한참을 달리던 당과 장수는 자신의 손에 묵직한 감각을 확인했다.
손을 펴 보니 여인으로부터 받은 은화가 그대로 있었다.
이거면 저 당과의 세 배는 될 터였다.
당과 장수의 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세 명의 무사와 뒤쪽에는 여인이 버티고 있었다.
여인은 언제라도 싸움에 끼어들 준비를 하듯 허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허리에 연검을 찬 듯 보였다.
설화는 자신을 중심으로 일어난 이번 사건 때문에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여기가 산중이라면 조용히 저들의 목을 땄을 것이었다.
게다가 새로 온 현문이라는 아저씨는 자신을 예쁜 아이라 하며 앞으로 나섰다.
그때부터 현문이란 아저씨에 대해 느꼈던 부담스러운 마음은 눈 녹듯 사라졌다.
억울한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가슴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설화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
고개를 돌려 보니 한빈이었다.
“공자님, 왜요?”
“안 먹어?”
한빈이 가리킨 것은 당과였다.
설화의 눈이 커졌다. 한빈은 벌써 당과를 손에 쥐고 맛있게 베어 물고 있었다.
“헉, 공자님. 현문 아저씨가 싸움이 났는데요.”
“걱정하지 마. 아무 일 없을 거야.”
“아무리 그래도…….”
“문제는 쟤네지. 무가지회에서 참석한 가문이 아니면 좋겠네. 괜히 미리 척질 필요는 없으니까?”
한빈이 어깨를 으쓱하자 설화가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그럼 안심해도 되는 거예요?”
“뭐, 설령 무가지회에 참석하는 가문이라고 해도 안심해. 그건 나중에 처리하면 되지 뭐.”
“그럼 일단 마음 놓고 있을게요.”
“일단은 즐겨.”
“뭘 즐겨요? 공자님.”
설화가 눈을 크게 뜨고 묻자 한빈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게 뭐라고 했지?”
“싸움 구경이잖아요.”
설화가 자신 있게 말했다.
“그건 틀렸어.”
“그럼요?”
“이렇게 맛난 당과를 먹으며 구경하는 싸움이지.”
한빈은 작게 웃자 설화가 물었다.
“그래도 돈 안 내고 먹는 건 좀…….”
“아까 쟤가 냈어.”
한빈은 싸움에 정신이 팔려 있는 여인을 가리켰다.
“헉.”
비명을 토한 설화가 힐끔 청화를 바라봤다.
“진짜야?”
“네, 언니, 아까 돈 주고 저리로 갔어요. 그런데 저도 먹어도 돼요? 헤헤.”
“응, 그래.”
설화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과가 깔린 판을 통째로 앞에 둔 그들은 싸움이 벌어지려 하는 곳을 바라봤다.
그때였다.
챙!
첫 번째 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