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 불상 깎는 노인 (2)
이제까지 침착하던 설화마저 당황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아직도 출구가 안 보여요!”
“일단!”
한빈이 재빨리 나무 상자를 닫았다.
그러고는 상자를 다시 사각형의 홈으로 넣었다.
순간 유골이 있던 자리의 뒷면이 스르륵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빈이 말을 이었다.
“저쪽으로 튀자!”
* * *
잠시 후.
커다란 석벽 앞에 선 한빈의 일행.
설화와 청화가 눈을 크게 떴다.
사천당가의 선조가 만들어 놓은 길이었다.
그렇기에 분명 빠져나갈 곳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앞쪽에 석벽이 가로막고 있는 것이었다.
설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사천당가는 치밀하네요.”
“미안해요, 언니.”
“백 년 전에 벌어진 일인데, 네가 왜 미안해?”
“그래도요. 뭔가 책임감을 느껴요.”
“네가 사천당가 출신이라는 걸 알게 된 것도 얼마 안 됐잖아.”
“그래도 미안한 건 어쩔 수 없죠.”
둘이 주거니 받거니 한탄을 하고 있을 때 한빈이 설화를 바라봤다.
“설화야.”
“왜요? 공자님.”
“혹시 화섭자 있으면 줘 봐라.”
“있긴 있는데 왜요?”
“진룡파혼검은 오늘은 못 쓸 것 같고. 아무래도 이걸 써야겠다.”
한빈은 허리에 맨 짐을 풀어놨다.
“그게 뭐예요?”
“벽력탄.”
“그걸 위험하게 왜 가지고 다니세요?”
“이럴 경우를 대비해서지.”
한빈이 굳건히 버티고 있는 석벽을 가리켰다.
그때 청화가 조심스럽게 끼어든다.
“공자님의 준비성은 중원 제일인 것 같아요.”
“뭐, 사람은 준비해야 하는 법이다. 여기서 나가면 벽력탄을 줄 테니 평소에 지니고 다녀.”
“벽력탄을 평소에…….”
“이런 일이 언제 벌어질지 모르잖아.”
한빈이 씩 웃으며 벽력탄을 석벽의 틈 사이에 꽂아 넣었다.
그러고는 설화에게 받은 화섭자를 당겼다.
화섭자의 심지에 불이 붙자, 한빈은 재빨리 꽂아 놓은 벽력탄을 향해 날렸다.
치칙.
심지가 타들어 가는 소리에 한빈이 외쳤다.
“옆으로!”
동시에 폭음이 터졌다.
콰-광!
연기가 사라지자 한빈 일행은 석벽을 확인했다.
석벽 앞에 다가선 청화가 눈을 크게 떴다.
“앗, 어떻게 해요? 석벽이 멀쩡해요.”
“어, 어떻게 이렇게 멀쩡할 수가 있죠? 공자님.”
설화도 고개를 갸웃했다.
한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석벽을 유심히 관찰했다.
진천뢰 정도의 위력은 없지만, 벽력탄이라면 석벽에 구멍을 냈어야 정상이었다.
그렇다면 이건 보통 석벽이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한빈은 조심스레 석벽으로 다가갔다.
천천히 석벽으로 다가가던 한빈은 발을 굴렀다.
쾅!
바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잠시 바닥에서 미세한 균열이 생겼다.
쩌-저적.
눈 깜짝할 사이에 한빈 일행은 아래로 꺼졌다.
* * *
한편 심미호가 이끌고 있는 수로 개선 작업 현장.
사천당가 근처에서 굴을 파고 있던 심미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지도에 표시된 곳이 막혀 있기 때문이었다.
집채만 한 커다란 돌부리가 앞에 버티고 있자, 심미호는 강유찬을 급히 불렀다.
현장에 온 강유찬도 한숨을 내쉬었다.
“휴……. 이건 도저히 못 뚫을 것 같소. 석공을 부른다고 해서 족히 한 달은 걸릴 것 같소만.”
“주군과 약속한 시각까지 딱 일주일 남았어요. 진천뢰라도 쓰셔서 뚫어야죠.”
“그건 불가능하오. 진천뢰를 이런 곳에 쓸 수 없소. 아니 가능하다 하더라도 사 공자가 아무도 모르게 정리하라고 하지 않았소.?”
“그럼 어떻게 해요? 어떻게든 시간 내로 마쳐야 하는데. 여기만 뚫으면 하루면 끝날 일을…….”
심미호는 말끝을 흐렸다.
미세한 진동이 발끝을 타고 전해졌기 때문이다.
강유찬도 그것을 느꼈는지 심미호는 재빨리 잡아끌었다.
“조심하시오.”
“앗.”
강유찬에게 이끌린 심미호의 뒤쪽으로 집채만 한 바위가 굴러오기 시작했다.
드르륵.
강유찬은 재빨리 화산파의 경공술인 매화신보를 펼쳤다.
파파박.
심미호의 손을 잡은 강유찬이 돌덩이를 겨우 피했다.
다행히 그 돌덩이는 통로가 아닌 막다른 길에 틀어박혔다.
팡!
먼지가 자욱하게 쌓였다가 스르륵 가라앉자 심미호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한빈이 눈앞에서 상의에 묻은 먼지를 털며 걸어오고 있었다.
거기에 처음 보는 두 명의 여인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심미호는 순간 이게 저승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그때 서서히 걸어오던 한빈이 입을 열었다.
“아, 심 부대주. 왜 거기 있어?”
“앗, 진짜 주군이세요?”
“나 맞아. 그런데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그건 제가 물어볼 말이죠. 제게 수로 공사 맡기셨잖아요.”
“그랬지, 그런데 왜 이곳에 있어?”
“여기가 사천당가 담장 밑이에요.”
“여기가? 분명히 뒷산으로 들어갔는데…….”
한빈이 고개를 갸웃하다가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러고는 뭔가 생각난 듯 말을 이었다.
“여기를 생로(生路)로 만들어 놨군.”
“생로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건 나중에 말해 줄 테니 물이나 좀 줘 봐. 진짜 죽겠네.”
“여기요.”
심미호가 죽통에 든 물을 건네자 뒤쪽에서 누군가 손을 내밀었다.
“부대주 언니, 저도 주세요.”
“혹시 저를 아시나요?”
“저 설화예요.”
“네가 설화라고? 가만 보자, 그러니까…… 조금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저 맞아요. 지난번에 언니가 당과 상한 거 사 주셔서 배탈도 났었잖아요.”
“어, 진짜 설화네. 키는 갑자기 왜 이렇게 큰 거야?”
“일이 좀 있었어요.”
“키만 큰 게 아닌데 피부도 그렇고 몰라보겠네! 거기에…….”
심미호는 말끝을 흐렸다.
어떤 기연인지는 몰라도 너무 부러웠기 때문이다.
심미호의 시선은 설화의 가슴에 멈춰 있었다.
이번 임무가 끝나면 그 기연이 어떤 것인지 꼭 캐물을 작정이었다.
* * *
사흘 후.
사천의 입구에 있는 화수 객잔.
한빈은 팔짱을 끼고 객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빈은 심미호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린 후 개방의 안내를 받아 이곳으로 바로 왔다.
개방이 전한 이야기에 따르면, 이 화수 객잔에는 팽혁빈 일행이 묵고 있다고 했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 저들과 합류해서 사천당가로 돌아가면 되었다.
아쉬운 점이라고 한다면 용린검을 완벽하게 복구하는 방법을 알아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한빈이 막 화수 객잔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한빈의 기감이 갑자기 발동했다.
주변에서 심상치 않은 기척을 느꼈기 때문이다.
한빈의 시선이 향한 곳은 객잔에서 오십 걸음 정도 떨어진 소나무였다.
그 소나무 밑에는 허름한 복장의 노인이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잠시 그곳을 바라보던 한빈은 조용히 노인에게 다가갔다.
청화가 막 한빈에게 물어보려는 찰나, 설화가 입술에 검지를 갖다 댔다.
“일단 가 보자.”
“알았어요, 언니.”
뒤따르는 설화와 청화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빈은 노인의 앞에 아무렇지 않게 쪼그려 앉았다.
하지만, 노인은 한빈에게도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설화는 옆에 서서 아무 말 없이 한빈과 노인을 바라봤다.
노인은 조각칼로 끊임없이 불상을 깎고 있었다.
조그맣긴 해도 노인이 어떤 불상을 조각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인자한 미소가 담긴 관음보살의 불상이었다.
사사-삭.
사사-삭.
노인은 마치 사과껍질을 깎듯이 불상을 만들고 있었다.
하나가 만들어지면 옆으로 치우고 다시 나무 조각을 잡고 불상을 깎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벌써 한 시진 동안 같은 상태였다.
옆에 있던 청화가 못 참겠다는 듯 조심스레 노인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그 불상 파는 거예요?”
“…….”
노인은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불상만 깎았다.
그때였다.
한빈이 노인의 허락도 없이 불상 하나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노인은 여전히 쳐다보지도 않았다.
한빈은 씩 웃더니 불상을 툭 부러뜨렸다.
순간 노인의 눈이 빛났다.
평온하던 그의 눈에 살기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노인은 조각칼을 나무 위에 박았다.
푹.
나무 위에 박힌 것은 조각칼의 날뿐이 아니었다.
조각칼의 손잡이까지 깊숙이 들어가 버렸다.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한빈을 가리켰다.
“일어나거라, 아이야.”
“…….”
이번에는 한빈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그가 박아 넣은 조각칼을 빼내었다.
한빈은 노인은 바라보지 않고 조용히 조각칼로 나무를 깎았다.
순간 노인이 기세를 피워 냈다.
그의 주변에 기막이라도 펼쳐진 것처럼 기세가 설화를 옥죄었다.
설화는 조용히 그들의 동작을 바라보며 심호흡했다.
만독비고에서의 깨달음이 없었다면 감당할 수 없는 기세였다.
옆을 힐끔 보니 청화는 벌써 독공으로 호신강기를 피워 내고 있다.
청화의 호신강기는 그 독 기운이 밖으로 퍼지지 않고 철저히 갈무리되고 있다는 점에서 놀라웠다.
청화를 건들지만 않는다면 주변에 있다는 것만으로 피해당할 일은 없다는 뜻이다.
독이라는 건 퍼뜨리는 것보다 갈무리하는 것이 더 힘든 법.
노인은 청화를 보더니 기세를 죽였다.
표정을 수습한 노인이 물었다.
“공독지체라……. 사천당가의 무인인가? 사천당가가 드디어 키워 냈군. 하늘의 뜻이구나. 하늘의 뜻.”
“사천당가 이전에 저는 공자님의 시녀이고 설화 언니의 동생이에요.”
“공자님이라고? 거기에 시녀라고? 천하의 공독지체가?”
노인이 넋이 나간 듯 중얼거리자 청화가 한빈을 가리켰다.
“네, 맞아요. 공자님을 모시는 시녀예요.”
“허허, 그럼 네 언니도 사천당가라는 이야기겠구나?”
노인은 고개를 돌려 설화를 바라봤다.
“저는 사천당가 사람 아닌데요?”
“그럼 어느 문파의 제자인고? 아까 보니 호흡이 정파의 것이던데.”
“그건 비밀이에요.”
“허허.”
“공자님이 낯선 사람 보면 말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이놈이 그랬다는 거지?”
노인은 시선을 돌려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은 쉬지 않고 조각칼로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한참을 바라보던 노인이 물었다.
“대체 너는 어디에서 온 누구인고?”
“…….”
“고얀 놈 같으니라고!”
노인이 언성을 높이자 설화와 청화가 노인과 한빈 사이를 가로막았다.
잠시 눈싸움이 이어지고 설화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공자님은 하북팽가 사람이에요. 할아버지도 정파 사람인 듯한데 그만하세요.”
“그만하라고? 꼭 내가 먼지 시비를 건 것 같구나.”
“그야…….”
설화는 말을 맺지 못했다.
생각해 보니 조용히 불상을 깎고 있던 노인에게 시비를 건 것은 자신의 주군 한빈이었다.
힐끔 한빈을 보니 그가 깎고 있는 나무의 형태가 갖춰지고 있었다.
설화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
“우리 공자님이 부러뜨린 불상 보상하려고, 새 불상을 깎고 계시잖아요. 그러니까 기다려 봐요.”
“허허, 내가 십 년을 깎은 불상이다. 저놈이 불상을 제대로 깎을 수 있겠느냐?”
“그럼 당연하죠. 저하고 내기할래요?”
“오냐, 내기하자. 너는 무엇을 걸 테냐?”
“그건 할아버지가 말해 봐요. 저는 태어나서 내기에서 진 적이 한 번도 없거든요.”
“그럼 목이라도 걸 테냐?”
“그건 제가 불리하죠.”
“불리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할아버지의 남은 수명과 제 남은 수명이 어떻게 똑같아요? 내기는 양쪽 저울이 맞아야 성립하는 거라고 공자님께 배웠어요.”
“허허, 또 이놈 얘기구나.”
“그럼요, 우리 공자님이 얼마나 똑똑한데요.”
“하북팽가에서 똑똑한 놈이 있다는 얘기는 못 들었는데.”
“하북팽가의 사 공자라고 하면 얼마나 유명한데요.”
“팽가의 넷째라고? 혹시 겁쟁이라고 불리는 그놈이 바로 이놈이냐?”
“왜 우리 공자님께 이놈 저놈 하세요. 그건 예전 일이고 지금은 우리 공자님이 강북에서 최고예요.”
설화와 노인 사이에 설전이 오갈 때였다.
이제까지 말이 없던 한빈이 옷깃을 펄럭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