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 만독비고 (3)
“아악!”
청화가 비명을 지르자 한빈은 위쪽을 바라봤다.
현철로 된 육중한 뚜껑이 위쪽에 있고 그 사이에서 세 개의 쇠사슬이 나온 상태.
그때 한빈과 청화가 잡은 쇠사슬이 조금 올라갔다.
스르륵.
아마도 세 개의 쇠사슬이 서로 연결된 듯 보였다.
하나가 내려가면 두 개는 거기에 맞춰 살짝 올라가는 듯 보였다.
그때 설화가 가지고 있던 피독주 주머니가 바닥에 떨어졌다.
치지직!
피독주를 담았던 가죽 주머니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설화가 놀란 듯 재빨리 쇠사슬을 잡고 위쪽으로 천장에 바싹 붙었다.
한빈이 청화를 보며 외쳤다.
“청화야, 너도 위쪽으로 붙어라!”
한빈 일행은 모두 천장에 몸을 붙이고 상황을 지켜봤다.
이대로 있으면 밑에서 흘러나오는 열기로 통구이가 될 상황이었다.
물론 이 기관 장치가 자신들을 곱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라고 한빈은 장담할 수 있었다.
전생에서도 이와 비슷한 경우를 당한 적이 있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이렇게 놔둘 것이면 이런 시련도 주지 않았을 것.
아니나 다를까. 천장이 기다렸다는 듯 조금씩 내려오기 시작했다.
드드륵.
모두 천장 끝까지 붙어 있었지만, 이대로라면 무사할 수 없었다.
일단 저 밑에 무엇이 있는지를 살펴야 했다.
한빈은 재빨리 공력을 끌어 올려 천근추의 수법으로 무게중심을 자신의 쪽으로 끌었다.
동시에 설화와 청화가 잡고 있던 쇠사슬이 움직였다.
깜짝 놀란 설화가 쇠사슬을 고쳐 잡으며 물었다.
“공자님, 왜 그래요?”
“아무래도 내가 조금 내려가 봐야겠다.”
“그러다가 큰일나요, 공자님.”
“가만있다가는 더 큰일이다, 설화야.”
한빈이 말하는 중에도 그가 잡고 있던 쇠사슬이 내려왔다.
촤르륵.
지금 아래를 살펴볼 수 있는 것은 한빈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용린검법 중 회복의 속성으로 대충 차 한 잔 마실 시간은 버틸 수 있을 것이었다.
내려오던 쇠사슬이 멈췄다.
탁.
열기가 어찌나 강한지 용린검법 실력편의 구결 중 회복을 나타내는 ‘복(復)’ 자가 계속 줄어들고 있었다.
한빈의 예상과는 다르게 버틸 수 있는 시간은 더 줄어들었다.
순간 눈앞에 용린검법의 글귀가 반짝이기 시작했다.
[실력편에 담을 수 있는 새로운 속성이 발견되었습니다.]
뭐지?
고개를 갸웃한 한빈은 아래를 바라봤다.
아래쪽에는 붉은 실선이 보인다.
한빈은 안력을 돋워 그 실선을 자세히 살폈다.
자세히 보던 한빈이 신음을 토해 냈다.
“흠.”
아래쪽은 마치 용광로의 쇳물이 모여 있는 듯 시뻘건 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이 이 열기의 정체였다.
열기가 속성의 정체라는 건데, 현재 상황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용린검법의 글귀였다.
그때 위에서 설화가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공자님! 무슨 일이에요?”
“아쉬워서 그런다.”
“아쉽다니, 뭐가요?”
“고기라도 가져왔으면 맛나게 구워 먹을 거 아니냐?”
“아, 공자님!”
설화는 안심했는지 누그러진 목소리로 외쳤다.
위쪽에 있는 설화와 청화가 흔들리면 위험해지기에 안심시키려고 농담을 건넨 것이었다.
일단은 성공.
한빈은 아래를 보며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하나의 문제로 봐야 했다.
본래 있던 기관 장치를 이곳에 들어온 누군가가 바꾼 것이다.
누군가는 사천당가의 사람임이 분명했다.
독진을 펼친 이건, 독진을 뚫고 들어온 이건. 모두 독에 능통하지 않다면 여기까지 발길을 들여놓기 힘들 테니까.
그렇다면…….
고민하던 한빈은 공독지체의 깨달음을 떠올렸다.
그것은 독공으로 펼칠 수 있는 호신강기.
한빈은 실력편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다른 속성은 모두 사십에 머물고 있지만, 독은 무려 오십.
한빈은 조용히 독이라는 글자를 바라봤다.
순간 독이라는 글자가 줄어든다.
오십이었던 독이 사십구, 사십팔…….
계속 줄어들고 있었다.
동시에 한빈을 덮쳐 오던 열기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독으로 호신강기를 펼친다라?
어떤 심득에 의한 것이 아니라 독이라는 글자를 바라보자 저절로 독이 반응한 것이다.
한빈은 위쪽을 힐끔 바라봤다.
공독지체인 청화는 저 용광로에 떨어진다고 해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설화.
이 문제를 최대한 빨리 풀어야 했다.
한빈이 뚫어져라 용광로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강호에 흩어진 구결 중 일부를 발견했습니다.]
[실력편의 속성이 추가되었습니다.
[화(火) : 일(一)]
독에 이어 화라고?
한빈이 눈을 크게 떴을 때 다시 글귀가 나타났다.
[속성 추가로 실력편의 속성의 한계가 늘어납니다.]
[실력편(實力編)]
[속(速) : 사십일(四十一)]
[……]
사십에서 멈췄던 전체 속성이 독에 맞춰 오십으로 변경된 것 같았다.
그때였다.
드르륵.
다시 천장이 내려왔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한빈은 직감할 수 있었다.
한빈은 안력을 더욱 돋웠다.
아래쪽 시뻘건 쇳물 사이로 기관 장치가 얼핏 보인다.
‘저곳에 내려가서 기관 장치를 작동시킬 수 있다면?’
한빈은 힐끔 실력편의 속성을 확인했다.
독이 이십 개고.
화가 이십 개다.
독이 줄어든 까닭은 독 기운으로 호신강기를 펼쳤기 때문이었다. 반면 화 속성이 늘어난 것은 그만큼 열기가 한빈을 괴롭혔기 때문이다.
독은 줄었지만, 새로 생긴 화 속성이 늘어난 것은 어찌 보면 한빈에게는 행운이었다.
묘하게 균형을 맞추고 있는 상황.
지금이 기회라 생각한 한빈은 쇠사슬을 잡고 있던 손을 놨다.
순간 위쪽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공자님!”
“앗, 공자님!”
한빈은 그 비명에 아랑곳하지 않고 눈을 가늘게 떴다.
한빈이 이렇게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새로 얻은 화의 속성 때문이었다.
지금 상태로는 어떤 열기로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잠시, 쇳물에 가까워지자 조금씩 열기가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 한빈의 시야에 사각형의 홈이 얼핏 들어왔다.
분명히 지도에서 봤던 그 홈이었다.
한빈은 공중에서 등에 멘 반쪽짜리 바둑판을 풀었다.
저 홈에 정확히 끼워 넣어야 마지막 관문이 열리는 것이 분명했다.
기회는 딱 한 번이었다.
바닥에 추락하면서 저곳에 열쇠 역할을 할 바둑판을 끼워 넣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겠지만, 한빈에게는 누워서 떡 먹기였다.
‘백발백중.’
한빈이 떨어뜨린 바둑판이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쇳물 사이로 들어갔다.
순간 시뻘건 쇳물이 마른 논바닥에 흡수되는 물처럼 스르륵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제 바닥과는 불과 오 장.
한빈은 재빨리 공력을 끌어 올려 경신술을 펼쳤다.
‘구걸십팔보.’
팍!
바닥을 한 번 박찬 한빈은 공중으로 다시 떠올랐다.
아직 바닥에 쇳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쇳물이 빠지자 옆쪽의 문이 열렸다.
그곳에서는 물이 흘러나왔다.
달궈졌던 바닥과 물이 만나자 순간 그곳은 수증기로 가득 찼다.
치지직.
한 치의 앞도 볼 수 없는 상황.
위쪽에서 뭔가가 떨어지고 있었다.
‘혹시 현철로 된 천장?’
피할까 고민하던 한빈은 눈매를 좁혔다.
떨어지는 문에서 기척을 느꼈기 때문이다.
사사-삭.
한빈은 공중으로 뛰어올라 내려오는 물체를 잡았다.
그 물체는 하나가 아닌 둘.
공중에서 물체를 낚아채고 바닥에 착지한 한빈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
“아. 고마워요, 공자님.”
“저도요.”
그 물체의 정체는 설화와 청화였다.
“잡고 있던 쇠사슬이 끊겼어요.”
“바닥에 있는 쇳물이 사라지면 자연스럽게 끊기는 것 같구나.”
말을 마친 한빈은 벽 양쪽으로 난 문을 바라봤다.
둘 중 하나는 지도에도 없는 공간이었다.
분명히 문이 하나만 있었을 텐데…….
지도상에 표시된 것은 문이라는 한자로 된 표시 하나였다.
즉, 문이 하나만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는 함정일 수도 있었다.
그때 청화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한빈이 바라보고 있던 문과 반대에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청화가 말했다.
“이곳에서 익숙한 냄새가 풍겨요.”
“진짜?”
설화가 고개를 갸웃하며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때 다시 위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한빈이 재빨리 외쳤다.
“다들 피해!”
동시에 한빈은 자신이 바라보고 있던 문으로 몸을 던졌다.
이어서 들리는 굉음.
쿵!
위에 있던 천장이 떨어진 것이 분명했다.
이 기관을 설계한 자는 미치광이임이 틀림없었다. 분명 사천당가의 후인을 위한 안배일 터.
사천당가의 누가 이곳을 발견한다고 해도 백이면 백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일단 다행인 것은 설화와 청화도 무사히 반대쪽으로 피신했다는 것이었다.
한빈은 조용히 안쪽을 바라봤다.
역시 안쪽에 눈이 휘둥그레질 보물은 없었다. 사실 한빈이 찾고 있는 것은 딱 한 가지였다.
방안을 둘러보던 한빈이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은 반 토막 난 검신이었다.
한빈은 왼쪽 다리에서 반 토막 난 검을 꺼냈다.
벽 쪽에 걸려 있는 검신을 잡아 본래 가지고 있던 검과 맞춰 봤다.
순간 눈앞이 환해졌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주변에 일던 바람도 멈췄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빈의 눈앞에 글귀가 떴다.
[용린검을 찾았습니다. 용린검에 대한 깨달음이 부족합니다.]
[용린검이 완성되면 용린검법의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한빈은 글귀와 토막 난 검을 번갈아 바라봤다.
자신이 들고 있는 토막 난 검이 용린검이라 불리는 보물이 분명했다.
하지만, 토막 난 검에 변화는 없었다.
이것을 원상 복구 하려면 깨달음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였다.
조용히 심호흡한 한빈은 용린검법의 실력편을 다시 바라봤다.
몸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조용히 실력편을 바라보던 한빈의 눈이 커졌다.
[실력편]
[……]
[복(復) : 오십(五十)]
[……]
모든 속성이 회복되었다. 지금 한빈이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하나였다.
깨달음의 결과이거나.
아니면 모든 속성이 회복될 만큼 시간이 지났거나 말이다.
만일 후자라면 반대편으로 간 설화와 청화가 문제였다.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고 온 둘을 그냥 둘 수는 없었다.
한빈은 가로막은 현철 덩어리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것도 잠시, 용림검의 토막 두 개를 다시 갈무리한 한빈은 오른쪽에 찬 혈랑검을 꺼냈다.
‘진룡파혼검!’
한빈의 단전에 기운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 기운이 심장으로 뻗어 나간다. 심장에 있던 기운이 혈랑검을 잡은 손으로 휘몰아쳤다.
투명하게 빛나는 혈랑검.
한빈은 그대로 진룡파혼검의 기운을 앞으로 쏘아 냈다.
팡!
지진이라도 난 것 같은 굉음 덕분에 벽에 쌓였던 흙들이 후드득 떨어졌다.
한빈은 다시 기운을 모았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쇳덩이는 겉만 현철이 아니라 현철로 된 철판을 겹겹이 쌓아 만든 물건이었다.
거기에 더해 시뻘건 쇳물이 흐르던 공간을 모두 덮고 남을 정도니 보통 벽과는 차원이 달랐다.
팡!
한빈은 심의 속성이 바닥날 때까지 진룡파혼검을 펼쳤다.
검객인지 두더지인지 모를 정도로 한빈은 재빨리 장애물을 제거해 나갔다.
퉁!
마지막 남은 현철 덩이는 진룡파혼검의 초식이 필요 없이 그저 발길질 한 번으로 넘어갔다.
반대편 방을 둘러보던 한빈은 떡하고 입을 벌렸다.
설화와 청화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한빈은 혈랑검을 수습하고는 설화와 청화를 살폈다.
그들을 살피던 한빈은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설화의 들숨과 날숨을 타고 현기가 흐르고 있다.
청화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무아지경에 들었다는 것이었다.
한빈은 깨달음의 순간을 지켜 주고 싶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설화와 청화가 동시에 눈을 떴다.
처음에는 본인들도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한빈과 눈이 마주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자님!”
“어, 어떻게 오셨어요?”
둘이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전과 다름없이 겸손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한빈은 그 익숙함 속에 낯선 모습을 발견했다.
그런데, 딱 짚이지는 않는 그런 낯섦이었다.
뭐지?
한참을 보던 한빈은 그 이유를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