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 만독비고 (2)
쇠막대를 들고 모인 무사들의 모습에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것도 잠시 당광현이 손짓하자, 무사들은 쇠막대를 손잡이에 꽂아 넣는다.
손잡이에 쇠막대를 꽂아 넣자 양쪽 손잡이는 십자 모양이 되었다.
그 상태에서 당광현이 한빈을 바라봤다.
“진짜 들어가야 하겠는가?”
“네, 들어가야 하겠습니다.”
“왜 저곳을 원하는지 물어봐도 되겠는가?”
“그건……. 비밀입니다.”
“흠.”
당광현이 당황한 표정으로 수염을 쓸어내렸다.
그러고는 힐끔 한빈의 등을 바라봤다.
한빈은 큼직한 짐을 등에 메고 있었다.
당광현은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이 갔다.
한빈이 찾는 것은 만독비고의 보물이 아니라 바둑판 모양의 사각형이 들어갈 만한 곳이었다.
아마도 그것을 위해 만독비고에 들어가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마지막까지도 한빈을 들여보내야 하는지는 의문이 들었다.
은인을 저 안에 들여보내기가 꺼림칙했으니.
그것도 잠시, 결심했다는 듯 표정을 굳힌 당광현이 손을 내저었다.
“문을 열어라.”
그와 동시에 무사들은 십자 모양으로 된 막대를 돌렸다.
그것을 본 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여닫는 문인 줄 알았더니 기관 장치가 되어 있던 것이었다.
무사들이 쇠막대를 돌리자 문이 좌우로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여닫는 문이라고 생각하는 한 절대 열지 못할 문이었다.
그때 당광현이 말했다.
“이제 들어가게. 문을 더 열면 사천이 위태롭다네.”
“네, 감사합니다.”
한빈은 당광현에게 포권한 후, 만독비고를 향해 걸어갔다.
사사-삭.
한빈은 바람 소리만 남기고 만독비고 안으로 사라졌다.
한빈이 사라지자 이를 지켜보고 있던 설화가 입을 벌렸다.
“아, 공자님!”
“괜찮을까요?”
청화가 묻자 설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을 거야. 계산 없이 움직일 분이 아니거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설화의 눈썹이 살짝 떨렸다.
설화는 이곳으로 오면서 몇 번이나 반복해서 만독비고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저 안은 사람이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라는 것이 그 설명의 요점이었다.
평범한 사람은 저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즉사할 수 있다고 한다.
지금 문을 연 무사들은 사천당가에서도 정예이며, 그런 정예도 저 안으로는 한 발도 들어가지 못한다고 한다.
십 년 전 실수로 저 안쪽에 손을 넣은 정예 독인은 중독을 피하기 위해 한쪽 팔을 그 자리에서 잘라 냈다고 했다.
그런데 피독주도 없이 저 사지로 걸어 들어간다고?
설화는 왠지 찝찝했다.
설화는 자신의 허리춤에 든 주머니와 한빈이 사라진 문틈을 번갈아 봤다.
설화가 정신없이 고개를 흔들자 옆에 있던 청화가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언니, 이제 우리 가요.”
“음, 그래 청화야.”
그때였다.
당광현이 외쳤다.
“이제 만독비고를 닫는다!”
그의 외침에 정예 독인들이 쇠막대를 돌리기 시작했다.
촤르륵.
안쪽에서 기관 장치 돌아가는 소리가 울리자 입구가 닫히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만독비고의 문틈 사이로 두 가닥의 바람이 휙 하고 지나갔다.
곧 만독비고의 육중한 철문이 닫혔다.
탁.
당광현은 고개를 갸웃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워낙 한빈에게 집중하느라 자신의 곁을 스친 두 가닥 바람을 이제야 신경 쓴 것이다.
한참 동안 고개를 갸웃하던 당광현이 비명을 질렀다.
“세화야, 아니 청화야!”
당광현이 그제야 청화가 자리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물론 옆에 같이 있던 설화도 자리에 없었다.
그런다면 지금 지나간 두 가닥의 바람은?
당광현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 * *
만독비고 안으로 들어온 한빈은 눈을 크게 떴다.
생각보다 강한 독기 때문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눈을 감았지만, 계속해서 글귀가 지나갔다.
[독(毒) : 사십(四十)]
[독(毒) : 사십오(四十五)]
[……]
역시 당광현이 설명한 대로였다.
그가 왜 말렸는지도 알 것 같았다.
이건 장운현에서 천독이 만들어 낸 독 기운의 몇 배는 될 정도였다.
한빈은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 와중에도 조여 오는 독 기운과 맞서야 했다.
탁. 탁.
얼마나 지났을까.
한빈의 눈앞에 지나가던 글귀가 떴다.
[독(毒) : 오십(五十)]
[만독지체에 한 걸음 다가섰습니다. 만독지체까지 남은 깨달음은 불과 오십 걸음. 당신의 성취를 축하드립니다.]
한빈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앞쪽에는 현철로 된 문이 버티고 있었다.
한빈의 세 걸음 뒤에는 독 기운이 일렁이고 있지만, 어떤 선을 기점으로 그 기운은 넘어오지 않았다.
“혹시 독진?”
한빈은 고개를 갸웃하며 혼잣말을 뱉었다.
한빈이 말한 독진은 사천당가에서 잃어버렸다고 하는 독 기운을 담은 진법의 종류였다.
아마도 사천당가의 옛 독진이 이 만독비고에 남아 있었던 것 같았다.
독진의 안과 밖은 천지 차이였다.
숨을 몰아쉰 한빈은 눈앞에 있는 현철로 된 문을 바라봤다.
한빈은 다리에 찬 단검을 꺼내 들고는 문의 두께를 가늠했다.
그것도 잠시, 한빈은 다시 단검을 넣었다.
한빈은 파혼검을 사용해서 저 문을 부수려 한 것이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니 저게 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독비고의 문만 해도 여닫이문처럼 만들어 놓았지만, 실제로는 기관 장치를 돌려 밀어 열어야 했다.
그렇다면 눈앞에 현철로 된 문이 단순한 문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한빈은 품속에서 지도를 꺼냈다.
주변을 밝히고 있는 야명주 덕분에, 지도를 살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만독비고의 지도를 살피던 한빈은 작게 신음을 토했다.
“흠.”
지금 눈앞에 있는 문은 지도에 없었다.
즉, 지도가 만들어진 후 만들어진 문이라는 것이었다.
이게 말이 되는가?
이 지도를 만들고 나서 바로 만독비고가 폐쇄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난데없는 문이라니?
한빈은 현철로 된 육중한 문을 다시 한번 살폈다.
문을 살피던 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어둠 속에서 작은 홈을 발견한 것이다.
한빈은 조심스럽게 홈 속에 손을 넣어 봤다.
순간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
그것은 쇠사슬이 분명했다. 한빈은 그 쇠사슬을 조심스럽게 당겼다.
순간 바닥이 출렁했다.
하지만, 더 이상의 변화는 없었다.
문을 다 살피고 난 한빈은 한숨을 내쉬었다.
문에 난 홈은 총 세 개였다.
그 세 개를 한 번에 당겨야 기관이 열리는 구조가 분명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하라는 옛 성현의 말씀이 있지 않은가!
한빈은 재빨리 용린검법의 초식을 운용했다.
‘구걸십팔보.’
‘전광석화.’
숨을 깊게 들이쉰 한빈은 재빨리 홈 세 개를 왕복하며 당겼다.
착. 착. 착.
다시 미세하게 흔들리는 바닥.
하지만, 변화는 없었다.
한빈은 눈매를 좁히며 기관 장치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찰나의 오차까지 용납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한빈은 품속에서 천잠사를 꺼냈다.
그의 생각은 간단했다.
홈 안의 쇠사슬에 천잠사를 묶어 놓고 동시에 당기면 기관이 열릴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한빈은 천잠사를 잡고 속으로 숫자를 헤아렸다.
하나, 둘. 셋!
재빨리 천잠사를 당기자 묘한 소리가 났다.
서걱!
동시에 천잠사가 두부 썰리듯 잘려 나갔다.
저 문은 사람의 손이 아니면 나머지는 썰어 버리는 장치까지 있는 것 같았다.
즉, 저 기관 장치를 열려면 두 명이 더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설화와 청화를 데려올 걸 그랬나?”
혼잣말을 뱉은 한빈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설화는 지금의 독진을 통과하지 못할 것이었다.
청화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완벽한 공독지체를 갖게 된 지 얼마 안 되는 그녀였다.
공독지체라는 것이 독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는 특이한 신체라지만,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이 독진과 마주했을 때 어떤 부작용이 나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이 문은 한빈 혼자의 힘으로 통과하는 것이 맞았다.
한빈이 턱을 괴고 있을 때였다.
뒤쪽에서 기척이 들려왔다.
다급하게 고개를 돌려 보니, 손 하나가 독진을 뚫고 나왔다.
한빈은 재빨리 그 손을 잡아끌었다.
휙.
끌려 나온 것은 청화의 상체.
청화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공자님, 좀 세게 당겨 주세요.”
“알았다.”
한빈이 힘을 주자 청화의 다른 팔을 잡고 있는 설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둘의 모습에 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청화야 공독지체라 하지만, 이 독진을 뚫고 나온 설화가 이해가 안 된 것이었다.
“대체 어떻게 여길…….”
한빈은 말을 잇지 못했다.
설화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토할 것처럼 입술을 꾸물거리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설화는 뭔가를 바닥에 토해 냈다.
한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설화가 뱉어 낸 것을 자세히 봤다.
그것은 구슬이었다.
한빈은 대충 상황을 깨달았다.
설화는 독진을 통과하기 위해 피독주를 한 주먹이나 입 속에 머금었던 것이다.
한빈이 물었다.
“저 많은 피독주를 대체 어디서 구한 것이냐? 설화야.”
“헤헤, 청화가 줬어요.”
“청화가?”
한빈이 고개를 갸웃하자 청화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변명하듯 말했다.
“지나가는 길에 창고 앞에 떨어져 있기에, 제가 주워 왔어요.”
“아.”
한빈이 입을 떡 벌렸다.
저렇게 귀중한 것이 떨어져 있다는 것은 누가 봐도 거짓말이었다.
거기에 더해 저 정도의 양이면 사천당가의 기둥뿌리 하나 정도는 뽑았다고 봐야 했다.
그걸 아무렇지 않게 슬쩍하다니.
평소 얼굴에 철판을 깔고 다니는 한빈이었지만, 지금은 할 말이 없었다.
“흠, 여기까지 와 준 건 고맙다. 저 피독주는…….”
한빈이 말끝을 흐리자 설화와 청화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은 한빈이 말을 이었다.
“사천당가에는 비밀로 하자.”
“앗.”
청화가 깜짝 놀란 듯 입을 벌렸다.
설화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를 들어 올렸다.
“역시 공자님이에요. 그러실 줄 알았어요.”
잠시 웃음이 스치고 한빈은 현철로 된 문에 대해서 설명을 늘어놓았다.
설명을 듣고 난 설화가 물었다.
“그럼 동시에 당기면 되는 거네요.”
“동시에 당겨야 한다. 조금의 오차가 있다면 잘못하면 아까 말한 천잠사처럼 손이 잘려 나갈 수도 있다.”
“괜찮아요. 공자님하고 같이 하면 위험한 일은 없을 것 같아요. 그렇지, 청화야?”
“맞아요, 언니. 해 볼게요.”
청화도 고개를 끄덕였다.
한빈은 다시 그들에게 작동법을 설명한 뒤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지금이다.”
한빈의 신호에 따라 쇠사슬을 잡아당겼다.
순간 바닥이 다시 출렁였다.
그런데 그냥 출렁이는 것이 아니라 바닥이 사라졌다.
그 상태에서 문이 한빈 일행을 덮쳐 왔다.
한빈이 외쳤다.
“쇠사슬을 놓치지 말아라!”
동시에 그들이 잡고 있는 쇠사슬이 밧줄처럼 늘어졌다.
차르륵.
차르륵.
그 소리에 맞춰 한빈 일행은 끝없는 낭떠러지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위쪽을 보니 현철로 된 문이 뚜껑처럼 덮인 채 아래쪽으로 오고 있었다.
한빈 일행을 매단 채 떨어지는 뚜껑.
솨악.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이 정도의 속도와 깊이라면 화경의 고수라도 생사를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때였다.
한빈 일행을 매단 채 아래로 떨어지던 뚜껑이 멈췄다.
뚜껑이 멈추자 아래로 내려오던 힘과 맞물려 한빈 일행은 출렁하고 상하로 움직였다.
순간 갑자기 열기가 느껴졌다.
뼈까지 태워 버릴 듯한 열기가 점점 가까워졌다.
청화가 비명을 내질렀다.
“공자님, 뭔가 이상해요! 막 열이 나요!”
“공자님, 밑에 뭔가 있는 것 같아요! 신발이 타려고 해요!”
설화가 쇠사슬을 잡고 바둥거렸다.
차르륵.
그때 위에서 묘한 소리가 나며 설화가 잡고 있는 쇠사슬이 출렁하며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