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300화 (300/621)

300. 만독비고 (1)

한참을 바라봐도 한빈은 그저 미소만 지을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당무천이 못 참겠다는 듯 물었다.

“그게 무엇인가?”

“가주님의 몸 상태입니다.”

“내 몸이라……. 내 몸이 완쾌되었다는 것은 자네도 알지 않나?”

“제 말은 완쾌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경지에 드셨음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새로운 경지라……. 완쾌는 되었지만 독공을 잃어버렸거늘,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당무천은 자신의 양손을 펼치고는 진기를 끌어올려 봤다.

어제 느꼈던 감각 그대로였다.

병이 완치되는 대신 평생 익혀 온 독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아무리 내공을 끌어올려도 몸은 반응하지 않았다.

사천당가의 내공인 사천독기공이 한 줌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

하지만, 누굴 원망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지금 살아 있다는 자체가 천운이니 말이다.

그런데 새로운 경지라니…….

의문이 꼬리를 물 때, 한빈이 입을 열었다.

“가주님을 중독시켰던 그 독 말입니다.”

“흠.”

“그 독의 정체를 알고 계십니까?”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네. 처음 보는 성질의 독이더군.”

“네, 맞습니다. 중원에서 쓰이는 독이 아닙니다. 그것을 어떻게 구하셨는지요?”

“암상에서 구했다네. 해남에서 나는 만년복어의 내단이라 들었네. 그 독만 있다면 만독지체를 이루는 것도 눈앞이라 생각했고.”

“네, 맞습니다. 만년복어의 내단은 맞지만, 그 속에 다른 독 하나가 들어 있었습니다.”

“음, 다른 독이라…….”

“천산의 천년투구꽃의 뿌리입니다. 뿌리의 진액 한 방울만으로도 황소를 죽일 수 있죠. 문제는 두 독이 서로 상극이라는 겁니다. 그 상극인 성질 때문에 서로 독성을 억제하죠. 그런데 내공으로 그 내단을 활성화하면 그 두 가지 독은 마치 살아 있는 듯 뛰어다니며 온몸의 다른 독을 잡아먹어 힘을 키웁니다.”

“그러고 보니 처음에는 속은 줄 알았다네.”

“속으신 것은 맞죠. 그 속에 독 하나를 더 품고 있으니까요. 차례대로 흡수하셨다면 지금처럼 안 됐겠지요. 그 독을 세외에서는 천지양독이라고 부릅니다. 해독제는 물론 없고요.”

“흠, 하늘의 뜻인 것을 어떻게 하겠나!”

“그런데 하늘은 가주님을 위해서 안배했습니다.”

“안배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천지양독이 가주님의 몸에 있는 독기를 모두 흡수했죠.”

“그렇지.”

“가주님은 다시 태어나신 겁니다. 청화 같은 공독지체로 말입니다.”

“…….”

“이것을 만져 보시겠습니까?”

한빈은 조그마한 환약 하나를 꺼내어 당무천의 앞에 내밀었다.

당무천은 환약을 무심코 받아 들었다.

그런데 환약이 바로 녹아내렸다.

당무천이 당황하고 있을 때 액체가 된 환약은 그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건 대체 무슨 일인가?”

“지금 보신 것처럼 가주님께서 독을 빨아들이셨습니다. 사천당가에 천하제일 독인이 둘이라니, 축하드립니다. 단, 가주님은 청화처럼 완벽한 공독지체는 아닙니다. 앞으로 수련하시는 정도에 따라 성취가 있으실 겁니다.”

한빈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포권을 했다.

가주 당무천은 눈가를 파르르 떨며 한빈의 손을 잡았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보게.”

“말해도 될까요?”

“그럼 당연하지. 기둥뿌리라도 뽑아 주겠네.”

“그럼 일단…….”

한빈이 먼저 요구한 것은 자신이 가져온 반쪽짜리 바둑판이 들어갈 만한 곳을 찾아 달라는 것이었다.

두 번째 요구는 무가지회를 노리는 세력을 일망타진할 계획에 도움을 달라는 것이고 말이다.

빼곡히 쓴 계약서에 당무천은 서명하며 한빈이 뒤이어 요구한 것도 들어주기로 했다.

모든 용무를 마친 한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이제 쉬십시오, 어르신.”

“수고했네. 자네와 약조한 모든 일과 이 계약 내용은 반드시 지키겠네. 다시 말하지만 정말 고맙다네.”

“네, 강호인으로서 할 도리를 한 거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한빈은 작게 웃었다.

설화는 옆에서 고개를 갸웃했다.

강호인으로서 할 도리를 했다고 하면서 받아 갈 것은 다 받아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화는 나름대로 한빈에게 많이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불현듯 아직 멀었다고 생각했다.

당무천은 눈을 가늘게 뜨며 한빈과 자신의 손녀를 번갈아 봤다.

이렇게 한빈에게 퍼 준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단순히 생명의 은인이어서는 아니었다.

잘하면 한빈을 가문으로 들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한빈은 자신의 손녀를 청화라 부르며 친동생을 대하듯 잘해 주지 않는가?

시녀라 하지만, 분명히 그 이상의 관계였다.

그렇다면 몇 년 후에 손녀의 혼기가 찬다면 한빈을 데릴사위로 들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다른 가문이라면 힘들겠지만, 사천당가라면 가능했다.

지금 아무리 퍼 줘도 언젠가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올 재물이기에 그리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것은 사천의 주인으로서 당연히 갖는 자신감.

당무천이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손녀가 일어났다.

그 모습에 당무천이 물었다.

“왜 일어나느냐?”

“할아버지, 그게 무슨 말이에요? 공자님이 일어났는데 당연히 가야죠.”

“그게 무슨 말이냐? 세화야.”

“그건 옛날 이름이고 그냥 청화라고 불러 주세요, 할아버지.”

“그래, 청화야. 어딜 간다고 하는 것이냐?”

“일단 공자님을 모시기로 했으니 당연히 따라가야죠. 심심할 때 놀러 올게요. 할아버지.”

“그게 무슨…….

“저는 그만 가 볼게요.”

청화는 당무천에게 꾸벅 절을 하고 한빈을 따라 사라졌다.

당무천은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봤다.

“키워 놓으면 다 소용없다더니…….”

그는 말을 맺지 못했다.

생각해 보니 자신은 손녀를 키운 적이 없었다.

납치범의 손에서 손녀를 구해 준 것도 한빈이고.

죽어 가던 손녀를 신비한 의술로 구해 준 것도 한빈이었다.

그리고 손녀를 공독지체로 만들어 준 것도 한빈이었다.

핏줄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사천당가에 손녀를 묶어 놓을 수 있을까?

당무천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아직도 깨달음이 얕구나. 얕아.”

혼잣말을 뱉은 당무천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 * *

다음 날.

소가주 당광현이 한빈을 조용히 불렀다.

한빈의 요구 사항을 들어주기 위함이었다.

당광현이 한빈을 이끌고 온 곳은 사천당문의 뒤쪽에 있는 절벽이었다.

그 절벽의 중간쯤에는 깊숙하게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만독비고(萬毒秘庫)]

만독비고 앞에 선 사람은 한빈과 당광현 그리고 설화와 청화, 당기명이었다.

이 다섯 명은 고개를 들어 만독비고를 바라봤다.

한빈과 설화 그리고 청화는 호기심에 눈을 빛냈지만, 사천당가의 사람들은 표정이 어두웠다.

두꺼운 강철로 된 문을 확인한 한빈은 당광현을 바라봤다.

“여기가 제가 요구한 그곳입니까?”

“아마도 그럴 것 같네.”

“그럴 것 같다는 건 아닐 수도 있다는 겁니까?”

한빈의 질문에 당광현은 품속에서 가죽으로 된 두루마리를 꺼내 펼쳤다.

쫘르륵.

그 가죽 위에는 지도가 그려져 있었고 가장 위쪽에는 만독비고라는 글자가 찍혀 있었다.

“여기를 보게.”

당광현은 한 곳을 가리켰다.

한빈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곳을 바라봤다.

그의 검지가 가리키는 곳에는 사각형 문양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이게 제가 가지고 있는 바둑판과 같은 크기입니까?”

“그건 모르네. 만독비고에 들어간 자는 몇 대째 아무도 없으니 말일세.”

“음, 확실하지 않다는 말씀이군요.”

“처음에는 그저 독을 보관하는 창고였네. 그러다가 독이 하나하나 쌓이고. 때로는 가문의 보물을 넣어 두기도 했지.”

“그런데 몇 대째 들어가지 않았다는 건 무슨 말씀입니까?”

“백 년 전에 사천에 대지진이 일어난 적이 있네.”

“음, 저도 들어 본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때 모든 독이 섞였네.”

“독이 섞였다면…….”

“처음에는 이곳을 청소하기 위해 독에 일가견이 있는 무사들을 보냈지만, 그들은 돌아오지 못했네.”

“사천당가에서 넣어 둔 독이면 해독제가 있을 거 아닙니까?”

“모든 독이 섞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네. 그때 당시 태상가주로 당대 천하제일 독인이셨던 어르신도 돌아오지 못했지. 그분이 견디지 못하는 독이라면 어느 누가 가도 마찬가지라는 결론을 내렸지.”

“그럼 저곳은 못 들어가는 겁니까?”

“불가능하다고 본다네. 어찌나 독기가 강렬한지 안쪽에서 가끔 독풍이 문을 때린다네. 그 후에 우리 가문에서는 결정을 내렸지. 저곳을 영원히 폐쇄하자고 말일세. 아마 저곳이 터진다면 사천 지역에서 무사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일세.”

“제가 들어간다면요?”

“들어가는 건 좋지만, 나올 수 있는 확률이 없다네.”

“그런데 저를 여기로 안내한 이유는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일세. 아버님이 얘기하더군, 자네와 한 모든 약속에 있어서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고 말일세.”

“흠, 그럼 제가 결정을 내려야겠군요. 사천당가의 입장에서는 이곳을 알려 주신 거로 약속은 지킨 셈이 되는군요.”

“그렇지만, 들어가지 않길 바라네. 나는 가문의 은인이 한 줌 재로 변하는 건 원치 않네. 사실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반대일세.”

“음.”

한빈이 턱을 어루만지며 만독비고를 바라봤다.

용린검법의 남은 흔적을 찾기 위해서는 꼭 저 안을 확인해야 했다.

하북팽가에서 찾은 것은 낡은 검의 반쪽이였다.

그렇다면 저곳에 그 나머지 반쪽이 있을 터였다.

그 검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용린검법의 상승 단계로 인도해 줄 것은 분명했다.

고민을 마친 한빈이 말했다.

“제가 들어가겠다고 계속 고집한다면요?”

“허허, 나는 말리고 싶네. 하지만 사천당가의 그 어떤 누구도 자네를 막을 수 없네.”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한빈이 씩 웃자 당광현은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가 한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저곳에 들어간 가문의 사람들은 모두 돌아오지 못했다.

그렇다고 말릴 수도 없는 것이, 독과 의술에 대해서는 사천당가보다 더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눈앞에 있는 하북팽가의 사 공자였다.

위험하지만 말릴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그때였다.

설화가 한 발 나섰다.

“공자님, 저도 갈래요.”

“저도 같이 갈 거예요.”

청화도 거들었다. 순간 당광현의 동공이 한계까지 커졌다.

설화는 모르겠지만, 청화는 어떠한가?

당가에서 완벽한 공독지체에 이른 최초의 독인이었다.

그런데 저 사지로 걸어 들어가겠다고?

이건 말려야 했다.

당광현이 입술을 달싹일 때 한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건 안 된다. 둘 다 여기에 남아라.”

“위험하다잖아요. 그러니 제가 도와드려야죠.”

설화가 전과는 다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한빈은 그 모습에 씩 웃으며 답했다.

“설화야, 너 같으면 당과가 가득 든 보물 창고에 너 혼자 가겠느냐? 아니면 남과 가겠느냐?”

“그야…….”

“나도 똑같다. 저곳에는 나만의 보물이 있을지도 모른다.”

“솔직히 당과가 가득 든 보물 창고라고 해도 공자님하고는 같이 갈 거예요.”

“저도요.”

청화도 손을 번쩍 들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손을 내저었다.

“이건 협상이 아니다. 그렇다고 부탁도 아니고. 이건 명령이니 따르도록 해라.”

한빈의 말에, 설화와 청화가 뒤로 한 발 물러났다.

둘을 확인한 한빈은 당광현을 바라봤다.

“그럼 준비해 주시죠.”

“네, 알겠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만독비고를 열기 위한 사람을 준비시켜 놨습니다.”

당광현은 손뼉을 쳤다.

짝.

그 소리에 사천당가의 무사로 보이는 여러 명이 손에 기다란 쇠막대를 들고 만독비고 앞으로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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