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 만남 (2)
옆에 있던 설화가 눈을 크게 떴다.
만난 지는 얼마 안 되었지만, 자매처럼 지내던 그들이었다.
“기억을 찾다니? 그럼 기억을 잃어버렸던 거야?”
설화가 묻자 청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언니. 지금부터 말할 것은 제가 어렸을 때의 기억이에요. 지금 보니 사천당가의 상징과 깃발 그리고 집안의 대들보까지 모든 게 생생해요.”
청화의 말에 모두가 눈을 크게 떴다.
마주 보고 있던 당무천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세화, 아니 청화라고 했지. 네가 기억나는 것을 말해 주지 않으련? 아니 나중에 말해 줘도 된단다.”
“지금 말할게요. 그러니까…….”
청화는 기억을 떠올리듯 말끝을 흐렸다.
그것도 잠시, 청화는 활짝 웃는 얼굴로 당기명을 바라봤다.
“그날 언니랑 뒤뜰에서 놀고 있을 때였어요. 언니와 그때 하던 놀이가 뭐였더라…….”
“그때 기억은 잊어라. 기억 안 해도 된다.”
당무천이 작게 고개를 흔들자 청화가 말했다.
“보물찾기였어요.”
그때 옆에서 지켜보던 당기명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그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자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몇몇은 숙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당기명은 지금 눈물을 흘릴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주먹을 꽉 쥐었다.
말은 안 하지만 모두의 얼굴에는 슬픔, 기쁨, 놀라움 등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하지만, 청화는 주변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때 누군가의 손에 납치되었어요. 이상한 아저씨였는데, 온몸에 녹색 빛이 도는…….”
청화는 쉬지 않고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녀의 이야기에 주변 사람들은 입을 떡 벌렸다.
납치범이 행한 술법으로 기억이 삭제되고 그의 꼭두각시가 되어 최근까지 살아왔다는 내용이었다.
납치범은 청화의 스승이자 부모 역할을 했다고 한다.
도중 당무천이 그녀의 이야기를 끊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자의 이름이 무엇이더냐?”
“저는 그자를 천독이라고 불렀어요.”
“지금 천독이라 했느냐? 그런 자는 처음 들어 보는구나. 그 정도의 독공을 가진 독인이라면 우리가 모를 리가 없는데…….”
“아마 모르실 거예요. 천독이라는 자도 은밀했지만, 그가 행한 일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일이 대부분이에요. 저도 은밀한 일들을 수행했어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자를 본 강호인 중 살아 있는 자가 없어요.”
“흠, 그렇게 간악한 자의 손아귀에서 탈출했다니 다행이구나, 다행이야. 모든 것이 하늘의 도움이구나.”
“하늘의 도움이 아니에요.”
청화는 손을 저으며 힐끔 한빈을 바라봤다.
“음, 내가 이야기를 끊었구나! 계속 이야기해 보아라.”
“제 마지막 임무가 장운현이라는 곳에서 독을 푸는 일이었어요. 그때…….”
청화가 이야기를 늘어놓자, 사천당가의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돌렸다.
한빈을 향한 뜨거운 시선.
뭐, 한빈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청화가 납치되었을 때부터 듣고 나자 사건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었다.
한빈은 그들의 시선에 미소만 지어 보였다.
청화의 이야기가 끝나자 당무천이 한빈을 향해 포권했다.
“고맙네. 우리 아이를 찾아 준 은혜는 잊지 않겠네.”
“아닙니다. 같은 무인으로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잊으신 게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인가?”
“지금은 안정이 먼저입니다. 가주님도 그렇고 청화도 그렇고 지금 당장은 휴식부터 취하심이 맞는 것 같습니다. 나머지 이야기는 차후 나누도록 하죠.”
“흠, 그게 맞겠군.”
“그리고 한 가지!”
한빈이 손가락 하나를 펴며 진지한 얼굴로 강조하자 모두가 마른침을 삼켰다.
당무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말해 보게.”
“오늘 일어난 일은 모두 비밀입니다.”
“비밀이라? 자네가 나를 치료한 것, 그리고 손녀가 돌아온 것을 비밀로 하라는 말인가?”
“그것뿐이 아닙니다. 가주님께서 쾌차하신 것도 비밀입니다.”
“대체 무슨 이유에서…….”
“그건 잠시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내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네. 지금 이야기를 안 해 주면 주화입마에 들 것 같네!”
“청화, 그러니까 손녀분을 납치한 무리가 지금 사천당가와 이번에 열릴 무가지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이러면 이해하실는지요?”
“흠.”
“지금은 안정이 먼저입니다.”
“알겠네.”
말을 마친 당무천은 당광현에게 눈짓했다.
그와 동시에 사천당가 무사들은 조용히 가주의 방을 빠져나갔다.
한빈도 청화를 남겨 놓고 당기명과 함께 방을 나왔다.
그런데 누군가가 초조한 눈빛으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당기수.
당기수가 한빈을 향해 포권했다.
“죄송합니다. 저의 잘못된 판단으로 대의를 그르칠 뻔했습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의원님을 못 믿고 방에 들어가려고 했던 걸 말씀드리는 겁니다. 죄송합니다.”
당기수는 한빈을 하북팽가 사 공자가 아닌 의원으로 대하고 있었다.
한빈이 웃었다.
“하하, 괜찮습니다. 해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보호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까?”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의원님.”
당기수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하북팽가에서 내놓은 자식인 줄 알았던 사 공자가 중원 최고의 의원이라니!
이 놀라움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때 한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수라는 게 말입니다. 그 과정은 용서되지만, 결과까지 용서받을 수는 없는 법이지요. 만약 가주님께서 잘못되셨다면 당 공자는 씻을 수 없는 죄를 남기게 되셨을 겁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려는 건 그게 아닙니다.”
“의원님, 말씀하시지요.”
“당 공자가 제게 빚을 졌다는 걸 말씀드리려는 겁니다.”
“아.”
당기수는 입을 떡 벌리며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실수는 인정하지만, 묘하게 수렁에 빠져드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기수는 빚이라는 단어의 뜻에 대해 물어보려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이미 한빈은 사라진 후였다.
* * *
다음 날.
사천당가는 당무천이 정신을 차리기 전과 똑같이 돌아가고 있었다.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가주가 깨어났다는 것을 모르고 걱정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실패한 모양이지.”
“그러게 말이야.”
“그럼 사천당가는 어떻게 되는 건가?”
“어떻게 되기는. 부자는 망해도 삼 년은 간다는데, 설마 바로 잘리기야 하겠어? 그래도 삼 년은 버티겠지.”
“삼 년이 아니라 삼대 아닌가?”
“그럼 내 손자까지는 여기서 일할 수 있겠네그려.”
“웃지 말게. 그러지 않아도 초상집 분위기인데 괜히 밉보여서 쫓겨나면 어떻게 할 텐가.”
사내의 타박에 상대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때 정문을 통해 들어오는 상인들이 보였다.
“저기 무가지회를 위해 쓸 짐들이 들어오는군.”
“그래도 한 곳에서 들어오니 일이 수월하네그려.”
“자네 말이 맞네. 금와 상단이 아니었으면 이렇게 쉽게 못 했을 걸세.”
사내 둘은 금와 상단이 들여오는 물품을 받기 위해 그곳으로 달려갔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두 쌍의 눈동자가 있었다.
바로 당무천을 만나러 가는 중인 한빈과 설화였다.
잠시 금와 상단과 사천당가의 식솔을 관찰하던 한빈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 모습에 설화가 물었다.
“수상하죠?”
“에이, 뭐가 수상하다고 그래?”
“저쪽 금와 상단이요. 묘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아요.”
“설화가 많이 컸네. 이제는 냄새를 구분할 줄도 알고.”
한빈이 씩 웃자 설화가 말을 이었다.
“그거 칭찬이죠? 공자님.”
“응, 칭찬 맞아.”
“헤헤, 그럼 우리 청화 보러 가요.”
설화의 말에 한빈이 발걸음을 옮기며 웃었다.
한빈은 당무천을 보러 가는 건데 설화는 당무천이 아닌 청화를 보러 가는 것이었다.
잠시 후.
한빈은 당무천의 처소로 들어갔다.
몸은 완벽하게 회복됐지만, 한빈이 부탁한 대로 남들에게 완쾌된 몸을 보여 주지 않기 위함이었다.
한빈이 처소로 들어가자 당무천이 활짝 웃으며 맞았다.
“왔는가? 간밤에 불편한 곳은 없었고?”
“그건 제가 어르신께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요.”
“맞는 말이군, 맞아. 내가 허언을 했네, 하하.”
호탕하게 웃는 당무천의 소매를 옆에 있던 청화가 잡아당겼다.
“그렇게 웃지 마세요. 할아버지, 우리 공자님이 조심하시라고 했잖아요.”
“그래, 알았다, 알았어. 내가 손녀 말을 들어야지 누구 말을 들을까.”
“네. 조심하세요, 할아버지.”
청화가 빙긋 웃었다. 청화의 웃음에는 현기까지 감돌았다.
그 모습에 한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청화는 환골탈태에 버금가는 깨달음을 얻었다.
완벽한 공독지체를 완성한 것이다.
아마 손녀와 이렇게 하루를 보낸 당무천은 그 변화를 알아챘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당무천이 갑자기 한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고맙네.”
“그 말씀은 어제도 하셨잖습니까?”
“그 말이 아니네, 당가에 보물을 내려 줘서 하는 말이네. 원하는 게 있으면 다 말해 보게.”
“저는 같은 무의 길을 걷는 자로서 마땅히 해야 될 일을…….”
“음, 나한테 예를 차릴 필요는 없네. 우리 손녀한테 들었네. 계약을 그리 좋아한다지? 그래서 준비했네.”
당무천은 뒤쪽에서 종이 한 뭉치를 꺼냈다.
딱 봐도 백 장은 넘을 것 같은 종이 뭉치를 한빈에게 내놓더니, 그는 이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 정도면 되겠는가?”
당무천이 말을 마치자 청화가 옆쪽에 있는 벼루와 붓을 내민다.
“이번에는 제가 준비했어요.”
청화는 설화를 보고 씩 웃었다.
그들의 모습에 한빈이 어색하게 웃었다.
“준비도 안 됐는데 갑자기 이러시면…….”
“상대가 준비하기 전에 내미는 것이 이쪽 손실도 적지. 어차피 내어 줘야 할 거라면 말이네.”
“하하,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한빈이 웃으며 붓을 잡았다.
‘전광석화.’
한빈은 붓을 검이라 생각하고 용린검법의 심득을 담았다.
사사-삭.
사사-삭.
용이 하늘을 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필체. 붓끝은 벌새의 날개처럼 톡톡 튀며 움직였다.
당무천은 한빈의 붓놀림에 어느새 빠져들었다.
한빈의 붓끝은 검의 끝과 다름없었다.
먹물을 종이에 묻히는 것이 아니라 찍고 있었다.
‘붓을 검처럼 놀리는구나!’
감탄도 잠시, 당무천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제야 한빈이 하북팽가의 사 공자라는 것이 기억난 것이다.
사실 눈을 뜨기 전까지만 해도 한빈이 반로환동한 고수라 생각했다.
그런데 진짜 하북팽가의 사 공자였던 것이다.
이렇게 젊은 자가 어떻게?
거기에 자신의 가문에 공독지체라는 보물을 안겨 줬다.
그것도 강북 오대세가의 직계가?
당무천은 자신의 의문을 종이에 적어 한 장씩 쌓아 놓는다면 저 하늘 위 뜬구름까지 다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한빈의 붓끝이 멈췄다.
탁.
상념에서 깨어난 당무천의 눈이 커졌다.
백 장도 넘는 종이에는 한눈에 봐도 글자들이 빡빡하게 들어차 있었다.
이렇게 종이를 내밀었을 때, 그의 의도는 간단했다.
사천당가는 배포가 크니 마음대로 요구해 보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백 장도 넘은 종이를 가득 채운다고?
이건 기둥뿌리가 아니라 아예 땅까지 내놓으라는 것이 아닌가?
당무천은 표정을 수습하고 물었다.
“이게 다인가?”
대범해 보이는 말투 속에는 떨림이 숨어 있었다.
한빈이 웃으며 답했다.
“종이가 모자랍니다.”
“아, 모자란다라…….”
“그러고 보니 말씀 안 드린 게 있는 것 같습니다.”
한빈이 묘한 웃음을 짓자 당무천이 눈을 크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