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 만남 (1)
기사회생을 쓰는 동시에 청화의 등에 갖다 댄 손바닥에 공력을 쏟아부었다.
순간 부풀었던 청화의 몸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청화에게 들어간 독기가 진정되는 듯 보였다.
치지직.
순간 청화의 옷이 바깥쪽에서부터 녹아내렸다.
이상한 기운이 청화의 목을 감싸고 있었다.
분명히 그것은 기막이었다. 아니, 독막이라고 해야 할 것이었다.
그렇게 얇지는 않은 것으로 보아 ‘독 구름’이라는 표현이 적절할지도 몰랐다.
그 독 구름은 청화의 몸을 완벽히 감싸려고 하며 겉옷을 으스러뜨렸다. 곧, 그것은 등에 댄 한빈의 손을 향해 달려왔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 일.
한빈은 손을 뗄 수 없었다.
순간 독 구름이 한빈의 손목을 끊어 놓을 듯 덤벼들고 있었다.
독 구름이 칼날 모양이 되어 한빈의 손목을 잘라 놓으려 칼질을 해 댔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고 했던가.
한빈의 손목에서 가느다란 핏줄기가 비쳤다.
그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손목에서 흘러나온 핏줄기를 독기가 피해 가고 있었다.
마치 한빈의 피를 무서워하는 것만 같았다.
독 기운은 한빈의 손목을 빼고는 청화를 완벽하게 감쌌다.
얼마나 지났을까?
청화의 몸을 감쌌던 독 기운이 먼지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밖에서 그 모습을 보던 가주 대행 당광현이 외쳤다.
“다들 뒤로 피하거라!”
당광현의 말에 모두가 뒷걸음치며 몇 발짝씩 물러났다.
뒤로 물러난 당광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모두 잘 들어라. 여기에서 저 독을 통제할 수 있는 자는 없다.”
“네. 맞습니다, 형님. 그런데 저 문을 그대로 둬도 되겠습니까?”
당광민이 가주 처소의 문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먼지처럼 흩어진 독 기운이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었다.
“흠.”
당광현이 침음을 뱉었다.
안에 있는 자들을 위해서도 밖에 있는 사람을 위해서도 문을 닫는 것이 맞았지만, 지금은 가까이 갈 수 없었다.
그때 당기명이 달려가 문고리를 잡았다.
독 기운이 폭풍처럼 당기명을 향해 달려왔다.
마치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당기명은 있는 힘을 다해 문을 닫았다.
자칫하면 문이 박살 날 정도의 힘을 담아서 말이다.
드르륵.
당기명은 겨우 문을 닫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틈이 있었다.
그 사이로 독 구름이 빠져나오려 하자, 당기명은 눈을 찔끔 감았다.
대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눈치챈 당기명이었다.
가주의 몸속에 있던 독은 만독비고에 있는 모든 독을 합한 것과 비슷한 양일지도 몰랐다.
그 독의 정수와 마주한다면 목은 녹아내릴 것이었다.
뭐지?
당기명은 고개를 갸웃했다.
예상외로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이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보니 한빈을 제외한 모든 이, 즉 가주와 청화의 의복이 완전히 녹아내렸다.
그리고 늑대처럼 날뛰던 독 구름도 잠잠해졌다.
그냥 잠잠해진 것이 아니라 독 구름이 어떤 모양을 만들고 있었다.
그것은 연꽃이였다.
사천당가에서 자란 당기명이 봐도 살벌한 독 구름이 연꽃 모양을 만들고 있다니?
게다가 독 구름에 담긴 기운까지 변하고 있었다.
천장에 뜬 연꽃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늘어나던 연꽃은 정확히 백팔 개에서 그 수가 멈췄다.
그때였다.
연꽃이 소나기처럼 아래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청화의 머리 위로 쏟아지고, 나머지는 한빈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툭. 툭.
이제는 연꽃 소나기가 만드는 소리까지 귓전에 울렸다.
그때였다.
다시는 볼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을 지켜보던 당기명이 눈을 크게 떴다.
청화의 어깨에 있는 점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순간 당기명은 자신의 어깨를 만졌다.
저 점은 자신의 어깨에도 똑같이 있었다.
저것은 벌모세수를 받으면서 생기는 점으로 사천당가의 직계에게는 반드시 생기는 흔적이었다.
‘청화가 사천당가 사람? 그것도 할아버지에게 벌모세수를 받은…….’
당기명은 생각을 이어 나갈 수 없었다.
연꽃 중 하나가 갑자기 당기명에게 튀었기 때문이다.
“앗.”
당기명은 비명을 터뜨리며 의식을 잃었다.
그의 비명과는 관계없이 방 안의 상황은 모두 마무리되었다.
방 안에 가득 찼던 독 구름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자취를 감추었다.
대신 가주와 청화는 나체 상태로 눈을 감고 있었다.
한빈은 정신을 차리긴 했지만, 시선은 허공을 향해 있었다.
[공독지체의 깨달음을 공유합니다.]
[지금부터는 독에 대한 이해도를 다시 높일 수 있습니다.]
[만독지체로 한 걸음 다가섰습니다.]
[공독지체의 깨달음으로 공독지체의 효능을 일각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공독지체의 효능은…….]
끝없이 이어지는 설명에 한빈은 미소를 지었다, 글귀의 내용을 정리한 한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빈은 그제야 청화와 가주의 상태를 알아챘다.
한빈은 주변을 돌아보다가 자신의 겉옷을 벗어 청화를 덮어 줬다.
가주는 완벽한 나신은 아니었다.
가만 보니 얇은 내복은 입고 있었다.
“비싼 거 입고 계시네.”
한빈은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뱉었다.
가주가 입고 있는 것은 분명 천잠사로 만든 속옷이었다.
암기의 분야에서는 중원 최고라 불리는 양반이 천잠사라니!
역시 있는 놈이 더한다는 옛 속담이 딱 들어맞았다.
한빈이 어이없다는 듯 가주를 바라보고 있을 때 천장에서 그림자 하나가 내려왔다.
한빈이 그쪽을 바라보자 설화가 뭐 씹은 표정으로 다가왔다.
“공자님, 저 이번에는 진짜 죽을 뻔했어요.”
“독에 대한 깨달음이 지금보다 낮았다면 큰일 날 뻔했어. 다행이야.”
한빈이 천장과 설화를 번갈아 봤다.
설화는 천장에 붙어서 독 구름을 피한 것이다.
뭐, 마지막까지 피하지는 못했다.
작은 연꽃 세 개가 설화에게 날아가는 것을 봤다.
설화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 연꽃 세 개라면?
이제 사천당가에서도 설화만큼 독에 대한 내성을 지닌 이는 열 손가락 안에 꼽을 것이다.
“여기 보세요. 전에 공자님이 사 주신 옷이 이렇게 됐어요.”
설화가 자신의 옷을 보여 줬다.
그녀의 말대로 옷의 끝자락은 다 부서져 있었다.
“그 옷은 내가 몇 벌이고 다시 사 주지. 당과도 함께.”
“정말이죠?”
설화가 표정을 바꾸자 한빈도 마주 웃었다.
그때 사천당가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방 안의 상황을 본 당광현이 한빈을 바라봤다.
뭐, 깨어 있는 자라고는 한빈과 설화밖에 없었다.
당광현이 머뭇거리다 한빈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가주님의 상태부터 확인하셔야 하는 게 아닙니까?”
“아, 그렇군요. 일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광현은 한빈에게 공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방 안의 광경을 보면, 누가 그곳에 있어도 무사할 수 없었다.
그런데 한빈은 옷까지 멀쩡한 것이 아닌가?
분명 내공으로 기막을 펼쳐 독 구름을 막은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화경의 고수가 분명했다.
단순한 화경의 고수가 아닌 삼존에 버금가는 고수였다.
물론 이것은 착각.
한빈은 그저 독 기운과 소통했을 뿐이었다.
덕분에 깨달음도 얻고 말이다.
하지만, 당광현의 생각은 달랐다.
하북팽가의 막내 공자라는 신분과 지금의 무공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지금 상황과 신분을 본다면 가능성은 한 가지였다.
그것은 하북팽가의 전대 고수가 반로환동했을 것이라는 가능성이었다.
상념을 지운 당광현은 재빨리 가주의 완맥을 잡았다.
완맥을 잡은 당광현의 눈썹이 꿈틀댔다.
당황한 그의 표정에 동생인 당광민이 달려들었다.
“형님, 아버님은…….”
“무사하시다. 아니 그 어느 때보다 상태가 좋으시다. 마치…….”
“마치 뭡니까?”
“몇십 년은 젊어지신 것 같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겉모습은 전과 같으시지, 속은 반로환동한 듯싶구나.”
“네?”
당광민이 혼란스러운 듯 고개를 내저을 때였다.
가주 당무천의 몸이 들썩였다.
“윽.”
가벼운 신음과 함께 눈을 뜬 당무천.
당무천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미음도 못 먹고 살이 썩어 들어가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모습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모르는 일.
당광현이 급하게 당무천을 부축했다.
“아버님, 일어나지 마십시오.”
“아니다. 이젠 괜찮다. 내 손녀부터 보자꾸나.”
“손녀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내 손녀 말이다, 손녀. 어디 있느냐?”
그의 목소리에 담겨 있는 감정은 마치 풍랑을 만난 돛대처럼 마구 흔들렸다.
깜짝 놀란 당광현이 말렸다.
“아버님, 아직 정신이 없으셔서 그러신 것 같은데…….”
“멀쩡하니 비켜라.”
“아버님, 제발 고정하십시오.”
당광현이 보기에 가주 당무천은 실성한 것처럼 보였다.
당관현은 당무천의 마혈을 제압하기 위해 진기를 끌어올렸다.
그때였다.
누군가 뒤쪽에서 달려왔다.
“아버님, 잠시만요.”
고개를 돌린 당광현의 눈에 깨어난 당기명이 달려왔다.
“기명아, 몸은 괜찮은 것이냐?”
“할아버지 말씀이 맞습니다. 저도 가문 직계의 흔적을 분명히 봤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놀란 것은 당광현뿐이 아니었다.
모두가 멍하니 당기명을 보고 있었다.
당기명은 그들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청화를 향해 달려들었다.
당무천도 비틀거리며 청화를 향해 걸어갔다.
모두는 그 모습에 입만 벌리고 있었다.
청화의 손을 잡은 당무천이 말했다.
“진짜 네가 맞느냐?”
하지만, 청화는 눈을 뜨지 않은 상태.
옆에 있던 당기명이 말했다.
“할아버지, 제가 어깨에 있는 점을 봤습니다. 분명 할아버지가 직접 벌모세수를 해 준 우리 가문의 직계가 맞아요. 할아버지가 벌모세수를 해 준 사람이라고는 딱 넷밖에 없잖아요. 그렇다면 얘가…….”
“분명히 세화가 맞다.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세화가 대체 왜 여기에……. 아니 왜 이제야 나타났단 말이야. 그리고 거기에 죽어 가던 나를 구하다니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세화는 괜찮은 겁니까?”
“흠.”
청화의 상태를 본 당무천은 침음을 삼켰다.
그때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던 한빈이 말했다.
“괜찮을 겁니다. 지금 청화는 깨달음을 정리하는 중인 것 같으니 자리를 비켜 주시죠.”
한빈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마치 감정이 없는 듯한 고저 없는 목소리는 모두의 정신을 번뜩 들게 만들었다.
한빈의 눈빛에 모두는 뒤쪽으로 물러서서 몸을 돌렸다.
자신의 무엇을 해야 할지를 깨달은 것이다.
그들은 검집을 움켜쥐고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무려 한 시진이 넘게 자리를 떠나지 않고 호법을 섰다.
그 안쪽에서는 가주 당무천과 한빈 그리고 설화가 작은 원을 그리듯 청화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때 청화가 깨어난 듯 소리를 냈다.
“끄응.”
* * *
네 시진 후.
같은 장소인 가주의 침실에는 이번 사건과 관련된 소수가 모여 있었다.
사천당가에서는 가주 당무천, 소가주 당광현과 그의 동생 당광민 그리고 당기명이 자리했다.
다른 한쪽에는 청화를 중심으로 한빈과 설화가 앉아 있었다.
그들의 사이에는 찻잔이 모락모락 김을 내고 있었지만,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사실 한빈도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청화를 보고 가주 당무천이 손녀라고 했을 때는 과장 좀 보태면 주화입마에 들 듯 놀랐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모두는 할 말은 많지만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때 청화가 빙긋 웃더니 입을 열었다.
“저 기억을 찾았어요. 다는 아니지만, 어릴 적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