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296화 (296/621)

296. 사천당가의 사정 (2)

그 의원을 데려온 당기수가 가주 침실의 문고리를 잡았다.

“하, 할아버지!”

“그만하거라.”

당기수의 아비인 당광민이 낮은 목소리로 말렸다.

“일단 뭐라도 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숙부님, 아버님.”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벌써 쾌차하셨을 것이다.”

“…….”

당기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때 의원이 말을 이었다.

“며칠 내로 손끝부터 괴사가 시작될 겁니다.”

“멈출 수, 아니 늦추는 방법이 있겠소?”

“그건……. 괴사한 부분을 절단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라도 희망이 있다면 그렇게 하겠소.”

“그런데 그건 가주님도 원하지 않으실 겁니다. 괴사한 부위를 절단하게 되면 하루 정도는 늦춰지겠지만, 그다음 날 절단된 부분부터 괴사가 시작됩니다. 지금 병은 혈맥이 전혀 돌지 않아서 발생하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그때마다 절단하게 되면 환자는 생지옥을 겪게 될 것입니다.”

“음.”

당광민은 깊은 침음을 삼켰다.

분위기가 착 가라앉은 상황에서 그는 뭔가 생각났는지 의원에게 물었다.

“기수가 말하기를 당신은 강남에서 화타의 현신이라고 하던데 정말 방법이 없겠소?”

“저는 그저 조금 잘난 의원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지금 필요한 것은 화타가 아니라 화타의 형입니다.”

“화타의 형이라…….”

“화타가 늘 한 말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의술은 형들의 반의반도 못 미친다고요. 큰형은 얼굴빛만 보고 미리 병을 예방하며 작은형은 병이 미미한 상태에서 미리 치료하기에 중증이 이르는 법이 없다 했지요. 그에 반면 화타 자신은 환자가 고통 속에서 신음할 때야 병을 알아본다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병은 화타가 와도 못 고칠 병입니다.”

“그런 자가 어디 있겠소?”

“하남정가 가주의 병을 고친 인물이라면 화타의 형들에 버금가는 의술을 가지고 있을 거라 의원들 사이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아니면 해남에서 신의라 불리는 의원을 불러오시든가요. 하지만, 둘 다 모시기는 힘들 듯싶습니다. 어디 있는지를 알 수 없는 분들이니까요.”

“음, 그렇다면…….”

당광민은 조용히 북쪽을 바라봤다.

그때까지 아무 말 없던 소가주 당광현이 나지막이 말했다.

“아직 우리 기명이가 도착하지 않았으니 기다려 보자꾸나. 녀석의 호위 휘가 말하기를 기인을 만났다고 하더구나.”

“기인이라면 대체 누굴 말하는 겁니까? 형님.”

“그건 나도 모른다. 다만 기인을 모시고 간다는 이야기만 전하라더구나.”

그때였다.

수하 하나가 그들의 이야기에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지금 강호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강북 어느 의가의 장주를 모시고 오는 길이라고 합니다.”

“의가의 장주라고?”

당광현이 눈을 크게 떴다.

옆에 있던 당광민도 급격히 표정이 풀렸다.

그 수하의 말대로였다.

개방이 하남까지 소문을 퍼뜨린 결과 사천까지 흘러들게 된 정보였다.

물론 강북에 위치한 의가에서 장주가 오고 있다는 것은 와전된 것이었다.

그때 수하가 다시 말을 이었다.

“당기원 공자도 지금 해남에서 의원을 모시고 온다고 합니다.”

“기원이도 의원을 모시고 온다고?”

“네, 지금 막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순간 그들 사이에서 활기가 돌았다. 이제 희망이 조금 보인 것이다.

가주의 손자 둘이 각각 의원을 데려온다 하니 거기에 마지막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다.

수하가 사라지자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그 침묵을 깬 것은 당광현이였다.

“만약 두 의원으로도 안 된다면 만독비고를 열 것이다.”

“헉.”

“그건 안 됩니다.”

당광민과 당기수가 연달아 소가주 당광현을 말렸다.

당광현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버님을 고칠 수 있는 희망은 만독비고에 담긴 전설을 해독하는 수밖에 없다.”

“그건 아니 되는 것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공독지체를 완성한 자가 나오기 전까지는 절대 열지 말라 하는 게 가문의 규율 아닙니까?”

이것은 사천당가에 있어서는 불문율.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독이 들어 있으므로 절대 만독비고는 열지 말라는 것은 가문의 규칙이었다.

그 독을 통제 못 하면 사천 지역을 통째로 날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말을 마친 당광민은 굳은 표정으로 형을 바라봤다.

그 시선에 당광현이 손을 내저었다.

“알았다. 일단 그 문제는 나중에 의논하자. 최소 호위만 이곳을 지키고 우리는 일단 무가지회에 신경을 쓰자꾸나. 이제 한 달밖에 남지 않았으니 말이다.”

말을 마친 당광현은 조용히 몸을 돌렸다.

가주가 병석에 있을 때는 소가주가 가주의 대행이었다.

큰 행사를 앞두고 넋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모두는 고개를 끄덕이며 각자의 자리를 향해 흩어졌다.

* * *

사천당가가 내우(內憂)로 어수선할 때, 한빈 일행은 잠시 걸음을 멈춰 호흡을 가다듬었다.

게걸음으로 가더라도 천릿길이 코앞이라는 속담처럼 드디어 한빈 일행은 사천당가까지 도착한 것이었다.

미령산에서 이곳까지 숨도 안 쉬고 달려온 결과였다.

사천당가까지 남은 거리는 불과 오백 걸음.

한빈을 호위하던 당기명은 사천당가의 담장이 보이자, 곧 쓰러질 것처럼 휘청였다.

그 모습에 당독대가 재빨리 그를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나는 괜찮다. 어서 가자.”

“네, 그런데 저 앞이 조금 어수선합니다.”

당독대가 가리킨 곳에는 인부들이 모여서 밥을 먹고 있었다.

가만 보니 수로 정비 사업이 한창인 것 같았다.

그 광경을 확인한 당기명이 말했다.

“흠, 그렇구나! 그럼 돌아가자꾸나.”

당기명은 손가락으로 다른 길을 가리켰다.

전 같았으면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을 테지만, 이제는 조심 또 조심할 수밖에 없는 당기명이었다.

하지만, 옆에 있던 한빈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가시죠, 여긴 안전합니다.”

“흠, 그렇다면 그냥 지나가겠습니다.”

당기명이 손짓하자 행렬은 인부들 사이를 지났다.

한빈은 그들 사이를 지나며 남들이 모르게 눈짓을 했다.

물론 그들은 적혈맹호대였다.

그들도 모른 척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았다.

그중 심미호가 한빈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한빈은 흡족한 표정으로 사천당가의 대문을 지났다.

잠시 후 한빈이 도착한 곳은 사천당가의 접객실이었다.

하북팽가의 두 배 크기의 접객실은 안을 채우고 있는 물건의 값어치도 두 배는 나갈 듯 보였다.

“역시 사천의 주인답네요.”

“하하, 과찬이십니다.”

당기명이 포권했다. 서로 덕담을 주고받고 있을 때, 시녀가 차를 들고 접객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 뒤를 따르는 사천의 둘째 당광민.

그를 본 당기명이 일어나 포권했다.

“숙부님을 뵙니다.”

“잘 다녀왔느냐?”

“네, 덕분에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갔던 일은…….”

당광민은 슬쩍 말꼬리를 흐리며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당기명이 재빨리 소개했다.

“이쪽은 강북의 생불이라 불리시는 천수장주이십니다.”

당기명은 일부러 하북팽가의 막내 공자라는 신분은 생략했다.

당기명도 하북팽가의 막내 공자라는 신분을 듣는 순간 당황했었다.

괜히 여기서 의심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당광민이 고개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아, 그랬군요. 저는 기명의 숙부 되는 사람이올시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보잘것없는 재주를 가지고 있는 사람일 뿐입니다. 일단 환자부터 봤으면 합니다.”

한빈의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사실 한빈이 의원을 자처한 것은 칠음현에서밖에 없었다.

그곳에서도 의원 복장을 했을 뿐이지 의원이라 한 적은 없었다.

한빈을 살핀 당광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시지요. 기명아, 의원님께 안내해 드려라.”

“알겠습니다, 숙부님.”

인사를 건넨 당기명은 급하게 한빈을 데리고 가주의 처소로 향했다.

다급한 당기명의 소매를 한빈이 살짝 끌어당겼다.

“치료하자면 준비부터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깜박했군요. 필요하신 도구를 말씀해 주시면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치료에 필요한 건 저 둘입니다.”

한빈은 설화와 청화를 가리켰다.

깜짝 놀란 당기명이 물었다.

“공자님의 시녀만 필요하단 말씀입니까?”

“네, 맞습니다. 그리고 주변의 경계입니다. 혹시 치료를 방해하는 자가 있다면 적으로 간주해도 좋습니다.”

“사천당가는 안전합니다. 절대 그럴 리는 없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럼 믿겠습니다.”

말을 마친 한빈이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 소리에 맞춰 설화가 청화의 손을 잡고 나타났다.

* * *

하지만, 당기명의 호언장담은 불과 차 한 잔 마실 시간 만에 허물어졌다.

“당기명, 대체 왜 저자를 데려온 것이냐?”

가주의 처소를 지키고 있던 당기수가 한빈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분은 강북에서 유명한 천수장주입니다.”

“천수장주라고? 내가 전에 하북팽가에 간 일이 있어서 잘 안다. 분명히 그자는 하북팽가의 넷째 공자가 아니더냐? 그것도 무공도 모르는…….”

“시간 없으니 비켜 주시죠.”

“비킬 수 없다. 지금 해남에서 용한 의원이 오고 있다. 그런데 저런 사기꾼에게 할아버지를 맡길 수는 없다.”

“비키시지요. 안 그러면…….”

당기명이 말끝을 흐리며 검집을 잡았다.

그 모습에 당기수의 눈빛은 더욱 사나워졌다.

가주를 치료해서 얻을 공 따위는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그가 이렇게 나서는 것은 순전히 가문을 위해서였다.

하북팽가에 갔을 때 동네북처럼 휘둘리는 한빈의 모습을 본 당기수였다.

그것이 불과 이 년 전의 일이었다.

그런 자가 의원이랍시고 오니 믿음이 갈 수가 없었다.

당기수도 검집을 잡았다.

가문의 직계끼리 칼부림이 날 상황.

한빈이 중간에 쓱 끼어들었다.

“이러지 말고 좋게 말로 하시죠.”

말을 마친 한빈의 손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픽!

당기수의 마혈을 제압한 것이다.

점혈을 당한 당기수가 털썩 쓰러지자, 한빈이 아무렇지 않게 그를 끌어안아 바닥에 뉘었다.

그 모습에 당기명이 물었다.

“말로 하자고 하셨잖습니까?”

“중간에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괜히 입만 아플 것 같아서요.”

한빈의 말은 사실이었다.

전에 하북 최고의 겁쟁이라 불리던 자신을 봤다면 아무리 설명을 해도 못 믿을 것이었다.

어떤 원인이라도 한빈은 가주의 상세를 반전시킬 방안이 있었다.

물론 완치는 하늘의 뜻에 맡겨야 했다.

일단 사천당가 가주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먼저였다.

그리고 무가지회를 무사히 넘기는 것이 목표였다.

씩 웃은 한빈이 굳게 잠긴 문을 가리켰다.

“그럼 안내하시죠.”

“들어가시죠.”

당기명은 문을 열고 가주를 향해 걸어갔다.

초췌해진 가주 당무천을 본 당기명이 눈물을 글썽였다.

“할아버지. 어쩌다가 이렇게…….”

흐느끼는 당기명을 한빈은 말없이 끌어냈다.

그러고는 가주 당무천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한참을 보던 한빈은 나지막한 소리로 청화를 불렀다.

“청화야, 가까이 와라.”

“네, 알겠어요.”

한빈은 눈을 가늘게 뜨고 가주 당무천을 바라봤다.

지금 가주의 상태가 생각보다 위중했기 때문이다.

한빈이 보기에는 분명 중독된 상태였다.

아마 다른 이라면 어떤 독인지 분간을 못 할 것이 분명했다.

이것은 중원에 존재하는 독이 아니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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