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293화 (293/621)

293. 미령산의 수적(水賊) (2)

미령산을 가리키는 한빈의 모습에 당기명은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바라봤다.

“휴.”

여러 감정이 들어 있는 숨소리였다.

사실 한빈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강호에서 사천당가를 건드릴 사람은 없다 자부했다.

뭐, 사천당가의 이름을 팔지 않아도 자신을 해할 수 있는 자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몇몇 사건을 겪으며 사천까지 무사히 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았다.

지금은 하북팽가의 막내 공자를 빨리 사천당가로 모시는 것이 중요했다.

당기명이 복잡한 마음으로 미령산을 바라보고 있을 때 한빈은 마차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이제 출발을 하기 위해서였다.

마차 앞에서는 설화와 청화가 한빈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령산을 가로지르는 것으로 진로는 결정된 것 같았다.

당기명은 고민하듯 팔짱을 끼고 미령산을 바라봤다.

조금이라도 안전하게 저곳을 통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노력하는 것이었다.

순간 당기명은 뭔가 결심했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그것도 잠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뭔가 결심하지 못하고 갈등하는 모습.

한참을 망설이던 당기명이 결심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당기명이 당독대를 바라봤다.

“지금 즉시, 사천당가의 깃발을 내린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왜 깃발을 내리라는 말입니까? 미령산만 넘어가면 사천이 코앞인데, 괜히 내렸다가 우리가 사천당가인지 모르고 시비라도 붙으면 어떻게 합니까?”

“지금 네 판단이 확실하냐?”

“당연하죠. 이제까지 사천당가의 깃발을 보고 가까이 다가오는 무림 방파가 있었습니까?”

“칠음현에서 우리가 사천당가인지 모르는 사람이 있었더냐?”

“그야…….”

“나는 이제야 깨달았다. 우릴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가장 무서운 상대라는 것을 말이다.”

“흠, 그것도 맞는 말씀이긴 한데…….”

“사천당가의 깃발을 숨기는 건 두 가지 이유다. 첫째는 우리를 노리는 적의 시선에 노출되지 않기 위함이고 두 번째는 우리의 힘을 숨기는 것이다.”

“아, 힘이라면……. 네, 이해했습니다.”

당독대가 뿌듯한 표정으로 가슴을 팍팍 쳤다.

적의 눈치를 본다고 할 때는 반발심이 생겼는데 힘을 숨긴다고 하니 왠지 이해가 되었던 것이다.

가슴이 뿌듯해지는 당독대였다.

그 모습을 보던 당기명이 웃음기 어린 얼굴로 다시 말했다.

“그럼, 실시하도록.”

“네, 알겠습니다. 공자님.”

당독대가 포권하며 나머지 수하들에게 외쳤다.

“대주님의 지시대로 깃발을 숨긴다!”

그의 말에 수하들이 사천당가의 깃발을 내린 후.

깃발을 곱게 접어 마차에 보관했다.

그들이 막 출발하려 할 때였다.

뒤쪽에서 말을 탄 무리가 황토색 구름을 일으키며 다가왔다.

다가닥.

다가닥.

그들은 한빈 일행이 안중에도 없다는 듯 말을 몰았다.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고 당기명을 비롯한 사천당가 무사들은 허리에 찬 검집을 만졌다.

만일에 사태에 대비해 공격하고 있던 것이다.

황토색 먼지의 주인공들은 한빈 일행을 향해 점점 다가왔다.

모두가 긴장한 가운데 한빈만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그들 누구도 한빈의 표정을 알아챈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긴장을 하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당기명을 비롯한 무사들이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하고 있던 순간이었다.

휘잉.

황토색 먼지를 피우며 달려오던 무리는 한빈과 당기명 일행을 무시하고는 지나갔다.

당기명은 눈매를 좁히며 그들을 뒷모습을 바라봤다.

황색 무복에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황색 무복을 입는 문파라?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고민은 여기까지였다. 저들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후.”

안도의 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봤다.

일단 여기서 사천까지 최단거리로 가는 것이 지금의 목표.

그것을 위해서는 앞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야 했다.

주위를 둘러보던 당기명이 눈썹을 꿈틀했다.

갑자기 살기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살기가 피어오르는 곳은 청화와 설화가 있는 쪽이었다.

뭐지?

당황한 당기명은 재빨리 청화에게 달려갔다.

검을 빼 들고 달려간 당기명은 청화의 앞에서 멈칫했다.

지금의 가공할 살기는 바로 청화와 설화에게서 피어나오는 것이었다.

항상 해맑게 웃던 청화와 설화였다.

그런데 이런 살기를 피우다니?

설화는 무공을 익혔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청화는 무공에는 문외한이라 알고 있었다.

그런데 설화가 피워내는 살기는 보통 사람의 것이 아니었으나 청화가 피워내는 살기도 평범하지 않았다.

당기명은 청화의 눈을 바라봤다.

눈가가 촉촉한 것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이 아이에게 언제부터인지 묘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당기명이었다.

당기명이 물었다.

“무슨 일이지?”

“오, 오라버니가 사 준…….”

청화는 말끝을 흐렸다.

대신에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고사리 같은 청화의 손에는 베어 물고 반쯤 남은 찹쌀떡이 들려있었다.

당기명은 옆에 있는 설화도 확인했다.

설화도 반 정도 먹다 남은 당과를 망연자실 바라보고 있었다.

당기명은 지금의 상황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찹쌀떡과 당과를 먹다가 왜 살기를 피운다는 말인가?

당기명이 달래듯 청화에게 말했다.

“진정하고 천천히 말해 보아라.”

“당 오라버니가 사 준 찹쌀떡에 이렇게 흙이 묻었어요.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이렇게 됐어요.”

청화는 찹쌀떡을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네. 그놈들이에요. 그놈들이 찹쌀떡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갔어요.”

청화가 아직도 황토색 먼지가 자욱한 곳을 가리켰다.

그때 설화도 끼어들었다.

“제 것도요. 이렇게 됐어요. 다시 만나면 그냥 안 둘 거에요.”

그때 주변을 돌아보고 온 한빈이 나타났다.

“죽일 놈들이네. 먹는 거에는 장난 안 치는 게 강호의 도리거늘. 진정해라. 산만 넘으면 꽤 번화한 거리가 나오니 당 공자가 새로 간식거리를 사 주실 거다.”

한빈이 기분 좋게 당기명을 가리켰다.

당기명은 자신도 모르게 품속에 있는 전낭을 어루만졌다.

사천이 얼마 남지 않았다지만,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한빈이 사람 좋은 얼굴로 당기명의 옆에 붙었다.

“당 공자.”

“네, 팽 공자님, 제게 말씀하실 거라도…….”

“혹시 급전이 필요하십니까?”

“급전이라니요?”

“지금 보니 가져온 돈도 다 바닥이 드러난 것 같은데,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저렴하게 융통해 드리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필요하면 말하란 이야기요. 남들보다 저렴하게 드리리다.”

말을 마친 한빈은 조용히 앞장서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당기명은 넋이 나간 듯 입을 벌렸다.

* * *

그들이 막 산 중턱을 지나치려 할 때였다.

산 위쪽에서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챙.

챙.

순간 한빈이 나지막이 말했다.

“먼저 올라가 볼 테니 다들 천천히 오시죠!”

그 말을 마친 한빈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사사-삭.

신기루처럼 사라진 한빈을 본 당기명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잠시만 기다리시죠. 팽 공자님!”

하지만, 한빈은 기척조차 남기지 않은 상태였다.

당기명은 흥분한 듯 주위를 둘러봤다.

한빈이 잘못된다면 이제까지 고생한 것이 모두 헛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혈맹호대와 악비광 그리고 서재오는 아무렇지 않게 걸어가고 있다.

당기명은 다급하게 그들에게 외쳤다.

“일단 제가 가서 팽 공자님을 돕겠습니다!”

“지금 누굴 걱정합니까? 그냥 놔두십시오.”

악비광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혼자 저렇게 올라가면…….”

“이제까지 보셨잖습니까? 다람쥐가 호랑이 걱정하는 것과 똑같으니 우리는 천천히 올라가죠. 당 공자.”

악비광은 아무렇지 않게 위쪽을 가리켰다.

그때 서재오도 끼어들었다.

“그건 악 공자 말이 맞소. 우리는 그냥 천천히 올라가서 결과나 봅시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네, 됩니다.”

“그럼 매화검협의 말씀을 믿지요.”

매화검협이란 말에 서재오가 입꼬리를 올렸다.

한빈 덕분에 졸지에 얻은 별호지만, 왠지 이 별호로 불릴 때면 기분이 좋았다.

이런 표정은 당기명에게도 안도감을 주었다.

당기명은 그제야 표정을 풀었다.

* * *

한빈이 구걸십팔보를 펼치며 다급하게 올라간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싸움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한빈의 예상대로라면 지금 맞붙고 있는 자들은 둘 다 정파였다.

서로 죽이지는 않겠지만, 상대를 굴복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었다.

한빈이 씩 웃음을 짓고 있을 때 격렬하게 양쪽 무리가 부딪혔다.

챙! 챙!

황색 무복의 무리와 도적들로 보이는 무리가 결전을 벌이고 있었다.

검과 검이 만들어 내는 공명음이 산자락에 울려 퍼졌다.

한빈은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그들의 싸움을 바라봤다.

서로 공방을 주고받는 모습은 생각보다 팽팽했다.

게다가 서로의 생명은 노리지 않았다.

상대를 굴복시키는 데 목적이 있는 듯 보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격렬한 움직임 때문인지 황색 무복이 색이 점점 변했다.

원래 황색 무복이 아니라 먼지 때문에 황토색이 되었던 것이다.

먼지가 날아가자 본래 푸른색 무복이 어느 정도 나타났다.

반면에 상대는 변함이 없었다.

꾀죄죄한 몰골로만 봐서는 개방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해를 등지고 싸움을 구경하던 한빈의 앞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한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형님, 왜 안 나섭니까?”

악비광이 고개를 갸웃하며 한빈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옆을 힐끔 본 한빈이 답했다.

“내가 왜 나서?”

“저 도적들 때문에 올라오신 거 아닙니까?”

“도적은 무슨 도적. 우리의 적은 저놈들이야.”

한빈은 푸른색 무복을 흩날리며 검술을 펼치고 있는 무리를 가리켰다.

한참을 보던 악비광이 고개를 갸웃했다.

“왠지 낯이 익습니다. 형님.”

“당연하지. 쟤네 남궁세가잖아.”

“헉, 남궁세가요?”

“아까 우리를 스치고 올라갔던 놈들이 바로 저놈들이야.”

“그런데 남궁세가인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저는 아무리 봐도 모르겠던데요.”

“옷은 먼지가 쌓았어도 검집에 각인된 독수리는 잘 보이더라고.”

한빈이 피식 웃었다.

한빈의 말대로 독수리는 남궁세가의 상징이었다.

적어도 정파 중에는 독수리를 문파에 상징으로 쓰는 것은 남궁세가밖에 없었다.

한빈의 말대로 그들의 검집과 검파에는 독수리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악비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랬군요. 그런데 왜 남궁세가가 적이라고 하십니까?”

“당과와 찹쌀떡을 못 먹게 했잖아. 그 책임은 물어야지.”

“당과와 찹쌀떡이라니…….”

“나는 은혜와 원수는 잊지 않는 놈이야. 아까 그러고도 사과 한마디 없이 갔으면 값은 치러야지.”

“그렇다고 저 도적과 싸우는 남궁세가의 뒤통수를 친다는 말씀입니까?”

“내가 왜 쟤네 뒤통수를 쳐? 저렇게 싸우다 보면 승패는 결정 날 테고. 그때 나서면 알아서 숙일 텐데 뭐.”

“아무리 그래도 같은 정파인데, 도적한테 당하는 남궁세가를 보고 있으라고요? 그건 말이 안 됩니다. 형님.”

악비광은 단창 두 개를 툭툭 털더니 하나로 결합했다.

그러고는 도적들을 향해서 바로 달려들 것처럼 콧김을 뿜었다.

마치 황소가 발을 구르는 모습과도 흡사해 보였다.

그때 한빈이 말했다.

“저기 여자 두령 잘 봐.”

“여자 두령이요? 아까 상인이 말한 여자 두령이요? 그 살벌하다는 그 두령 말씀이시죠?”

악비광은 저 구석에서 남궁세가의 수장으로 보이는 자와 검을 겨누는 여자 두령을 바라봤다.

상인이 왜 살벌하다고 했는지를 알 것 같았다.

그것은 여자 두령의 기세 때문이었다.

기세가 마치 천산혈랑이 이를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았다.

한참을 보던 악비광이 고개를 갸웃했다.

검술이 어딘가 눈에 익었기 때문이다.

남궁세가 검술이 눈에 익은 것은 당연하지만, 여자 두령의 검술 또한 낯설지가 않았다.

그때 한빈이 말했다.

“내가 찾아 준다고 약속잖아. 비광아. 나 약속 지켰다.”

한빈이 해맑게 웃었다.

하지만, 악비광은 한빈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지 눈이 돌아갔다.

눈에 흰자만 남은 악비광이 창을 꼬나 쥐고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저 남궁세가 새끼들이!”

악비광은 먼지를 일으키며 기세를 피웠다.

그 모습에 한빈은 입맛을 다셨다.

“쩝, 이거 참. 그래서 혼자 올라온 건데…….”

한빈이 말끝을 흐리며 악비광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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