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292화 (292/621)
  • 292. 미령산의 수적(水賊) (1)

    서찰을 잡는 팽대위의 수법도 범상치 않았다.

    손끝에서 투명한 기운이 일렁인다.

    자세히 보면 손끝이 아니라 손바닥 전체에서 투명한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가장 놀란 것은 팽혁빈이었다.

    팽대위의 수법은 바로 하북팽가의 권장법 중 최고라 할 수 있는 혼원장(混元掌)이었다. 그중에서도 흡조(吸爪).

    즉 호랑이의 발톱으로 날아가는 새를 잡는다는 수법이다.

    날카로운 발톱으로 새를 잡지만, 죽이지는 않고 놀릴 수 있다는 수법.

    이 수법은 공격의 수법도, 수비의 수법도 아니었다.

    혼원장을 수련하기 위한 중간 초식.

    그런데 팽대위가 흡조를 최고 수준까지 사용해서 서찰을 넘기는 모습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팽혁빈이 보기에 혼원장 중 흡조를 사용한 이유는 간단했다.

    서찰이 상하지 않으면서 최대한 빠르게 넘기기 위함이 분명했다.

    이 부분이 가장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었다.

    글자 하나를 뚫어져라 봐도 풀지 못하던 문자를 저렇게 빠르게 넘기면서 해석한다라?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귀찮아서 그냥 넘기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팽대위의 모습을 보면 혼신의 힘을 쏟고 있음이 분명했다.

    물론 팽혁빈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모두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넘기고, 다시 반대로 넘기고를 반복하고 있는 팽대위의 모습에 모두는 입을 벌렸다.

    그때였다.

    팽대위의 손이 멈췄다.

    그런데 손만 멈춘 것이 아니었다.

    마치 명상에 잠기듯 눈까지 감더니 모든 동작을 멈추었다.

    한참 동안 앉아 있던 팽대위는 이번에는 의자에서 내려와 가부좌를 들었다.

    모두가 멍하니 그를 보고 있을 때 팽대위가 깊은숨을 쏟아 냈다.

    “후…….”

    호흡 하나에 기묘한 기운을 담고 있었다.

    마치 무아의 경지에 빠져드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를 알아챈 홍칠개와 독고련이 서로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조용히 의자와 식탁을 치우기 시작했다.

    팽대위의 수행에 방해가 될까 배려하는 것이다.

    다른 이들도 그들의 행동이 옳다는 것을 잠시 후 알게 되었다.

    팽대위가 가부좌를 풀더니 눈을 감은 상태에서 일어났다.

    스슥.

    그의 발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수식을 취한 그가 상체를 움직였다.

    모두 그가 행하는 동작이 뭔지 알 것 같았다.

    그것은 팽가의 도법임이 분명했다.

    손에 도(刀)는 쥐고 있지 않지만, 가상의 적을 향해 도법을 펼치고 있었다.

    획!

    횡으로 베더니 어느덧 팽대위의 도법은 천장을 향해 솟구쳤다.

    팡!

    바위도 깨뜨릴 듯한 기세.

    그의 동작 하나하나는 은밀함 속에 힘을 담고 있었다.

    팽대위의 동작은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자 멈췄다.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처음 기수식 그대로 동작을 멈춘 팽대위의 모습은 경건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보던 팽혁빈이 나지막이 외쳤다.

    “오호단문도!”

    팽혁빈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재빨리 입을 막았다.

    다른 문파 그리고 사파의 인물까지 팽대위의 깨달음을 돕고 있는데, 자신이 방해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모두가 팽혁빈에게 시선을 돌렸다.

    팽혁빈이 쏟아지는 시선을 감당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릴 때, 팽대위가 눈을 떴다.

    “됐습니다. 오호단문도를 완벽하게 정리했습니다. 여러분들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팽대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한 표정으로 모두를 향해 포권했다.

    물론 그의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초승달처럼 걸려 있었다.

    잠시 침묵으로 휩싸인 연회장.

    하지만, 얼마 안 가 홍칠개가 물었다.

    “대체 어떻게 해석을 했다는 말인가?”

    홍칠개는 깨달음보다도 어떻게 해석했는지가 궁금할 따름이었다.

    모두가 포기했던 서찰의 해석.

    그런데 그것을 끝까지 마다하던 팽가의 집법당주가 성공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독고련이 홍칠개의 등을 찰싹하고 쳤다.

    “이 눈치 없는 늙은이 같으니라고. 생각해 봐, 어떻게 해석했냐고 물어보는 건 가문의 비급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과 똑같지.”

    “허허, 그런가…….”

    홍칠개가 미안한 표정으로 천장을 올려다볼 때였다.

    팽대위가 서찰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가 저 서찰을 해독할 수 있었던 것은 단 한 가지 이유입니다.”

    “그게 뭔가?”

    “제가 글을 읽는 것을 싫어해서입니다.”

    “글을 읽는 것을 싫어하는데, 어찌 그놈이 보낸 문서를 해독할 수 있단 말인가?”

    홍칠개의 표정에는 더욱 진득한 의문이 피어났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

    악소천도 한 발 앞으로 나왔다.

    “허허, 그런 기이한 일은 내 듣도 보도 못했네,”

    황보만청도 거들었다.

    모두가 웅성거리고 있을 때, 팽대위가 묘한 웃음을 피워 냈다.

    “글자가 아니라 그저 점으로 인식하면 됩니다.”

    팽대위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서찰을 재빨리 넘겼다.

    순간 모두의 눈이 커졌다.

    한 장씩 봤을 때는 몰랐는데, 빨리 넘기자 여러 장이 겹쳐 보였다.

    중요한 점은 여러 장이 겹쳐 보이자 그림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것은 도를 쓰고 있는 무사의 형태였다.

    그것을 본 팽혁빈이 재빨리 팽대위를 말렸다.

    “숙부님, 그건 우리 가문의 비급…….”

    “아니다. 이건 비급의 일부분일 뿐이지. 이걸 안다고 해서 오호단문도의 파훼법을 안다든지, 초식을 알 수는 없단다. 혁빈아.”

    그 말에 팽혁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의 대화에 홍칠개가 서찰을 바라봤다.

    모든 서찰을 합쳐 놓으니 분명 그림이었다.

    그런데 그림만 봐서는 대체 무엇을 말하려는지를 알 수 없었다.

    홍칠개가 팽대위에게 물었다.

    “내가 다시 봐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그럼 잠시 보겠네. 참, 이 서찰에 대한 해독은 다 끝난 거지?”

    “네, 다 끝났습니다. 그 서찰은 이제 필요 없습니다.”

    팽대위가 씩 웃었다.

    어찌 보면 이것은 자신감.

    팽가가 아니라면 그 누가 봐도 종잇조각에 불과하다는 말이었다.

    서찰을 가지런히 모은 홍칠개의 손끝에서 뜨거운 기운이 올라왔다.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입을 벌렸다.

    옆에서 지켜보던 팽혁빈은 놀라 손을 뻗었다.

    하지만, 홍칠개는 그 손을 피하더니 더욱 기운을 끌어올렸다.

    팽혁빈은 더 이상 말릴 수 없었다.

    서찰이 활활 타기 시작했던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재가 된 오호단문도의 비급.

    팽혁빈이 물었다.

    “어르신! 대체 왜 그러신 겁니까?”

    따지듯 묻는 팽혁빈의 어깨를 팽대위가 가볍게 눌렀다.

    “앗, 숙부님.”

    “무제자 어르신은 우리를 위해서 태우신 거니, 신경 쓰지 말아라. 오히려 저런 결정을 내리신 어르신께 감사해야지.”

    말을 마친 팽대위는 홍칠개를 바라보더니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홍칠개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제일 눈치가 뛰어나군. 역시 글공부를 하면 글자에만 집착하지, 눈치는 꽝이라니까. 하하.”

    홍칠개의 웃음에 모두는 고개를 갸웃했다.

    팽대위만이 마주 웃다가 팽혁빈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자신이 깨달은 오호단문도를 알려 주기 위함이었다.

    연회장에서 나온 팽혁빈이 물었다.

    “어르신은 왜 비급을 태우신 겁니까?”

    “저것을 놔두면 남은 사람들이 아마 호기심 때문에라도 눈에 불을 켜고 오호단문도의 흔적을 찾겠지.”

    “일리가 있네요.”

    “문제는 저 그림이 우리한테나 비급이지, 다른 이들에게는 독약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네?”

    “그림은 기의 흐름까지 나타내고 있다. 혹시라도 저 그림을 따라 하다가는…….”

    말끝을 흐린 팽대위는 못을 긋는 시늉을 했다.

    뭐, 골로 간다는 뜻이었다.

    연회장 앞 연무장에 선 팽대위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시작하자.”

    “네, 그런데 그냥 시작만 하면 됩니까?”

    “잠시만 기다리거라.”

    팽대위는 팽혁빈의 어깨에 술잔을 올려놓았다.

    “대체 이건…….”

    “이게 한빈이 전한 수련 방법 중 하나다. 술잔에서 술이 넘쳐 떨어지면 안 된다. 우리가 알고 있던 오호단문도의 첫 번째 오류는 호랑이가 처음부터 발톱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 지금부터는 발톱을 숨기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야.”

    팽대위가 말을 마쳤을 때 연회장에서는 갑자기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울리는 고함.

    “이놈!”

    “오해입니다.”

    이것은 독고련과 황보만청의 목소리였다.

    팽대위는 연회장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서로 다툴 이유는 홍칠개가 제거했는데 왜 분란이 일어났는지가 이해가 안 되었다.

    사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단순히 황보만청의 말실수 때문이었다.

    한빈을 사위 삼아야겠다는 황보만청의 입버릇이 독고련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그때였다. 황보만청이 연회장에서 튀어나왔다.

    그 뒤를 독고련이 쫓으며 외쳤다.

    “그놈을 눈독 들이는 놈은 정파고 사파고 그냥 두지 않을 것이야!”

    “독고련 선배, 왜 그러십니까?”

    황보만청은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때마침 그의 눈에 팽대위와 팽혁빈이 들어왔다.

    황보만청이 다급히 외쳤다.

    “자네들 나 좀……!”

    그의 말에 팽대위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혁빈아, 장소를 옮기자.”

    “네, 숙부님.”

    * * *

    십 일 후.

    한빈 일행은 호북과 호남의 경계선을 지나고 있었다.

    이제 산 하나만 넘으면 사천을 코앞에 둔 상황이었다.

    칠음현의 사건 이후로 그들에게 위기는 없었다.

    뭐, 그동안 달라진 것이라고는 설화와 청화가 제법 묵직한 짐을 걸치고 있다는 점뿐이었다.

    중간에 번화가를 만나면 당기명은 호주머니를 털어 청화 선물을 사 줬다.

    물론 청화의 성화에, 설화까지 챙겨야 했기에 그의 주머니는 이제 먼지만 날리는 상황이 되었다.

    한빈은 당기명이 청화에게 자상하게 구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그들이 산의 입구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였다.

    상인 하나가 등짐을 지고 내려오더니 한빈 일행을 바라봤다.

    고개를 갸웃하다가 걸음을 멈칫하는 상인.

    그러다가 또 아무렇지 않게 걷는다.

    한빈은 그 모습이 신기했다.

    그때 한빈과 눈이 마주친 상인이 못 참겠다는 듯 걸어왔다.

    “그냥 지나가려다 아무래도 한 말씀 드려야겠습니다.”

    상인은 통성명도 없이 못 참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한빈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씀하세요.”

    “웬만하면 돌아가시지요.”

    “돌아가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여기 도적들이 진을 치고 있습니다.”

    “지금 보니 무사히 내려오신 것 같은데…….”

    “아닙니다. 그 도적들은 무림인에게만 시비를 겁니다. 그런데 그 기세가 얼마나 흉포한지 무사히 내려오긴 했지만, 아직도 오금이 저려서 죽겠습니다.”

    “흠, 이쪽에 산적이 있다는 것은 듣지도 못했습니다만.”

    “산적은 없습니다.”

    상인의 말에 주변에 있던 일행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산에 도적이 있다고는 해 놓고 산적은 없다고 하니 황당한 것이다.

    그들의 표정을 본 상인이 입을 열었다.

    “수적이라고 하더이다. 그런데 그 이름 모를 여자 두령의 눈빛이 얼마나 무섭던지……. 산적이든 수적이든 관계없습니다. 저는 다시는 저 산을 넘지 않을 겁니다. 내 할 말은 다 했으니 알아서 판단하십쇼.”

    상인은 그 말을 남기고 조용히 떠났다.

    그가 점점이 사라지자 당기명이 한빈에게 다가왔다.

    “산에 산적이 아니라 수적이라니, 신기하군요.”

    “뭐, 확인해 보면 되겠지요.”

    “여길 지나가시려고 합니까?”

    “신기한 일이 있으면 구경하고 가야 하는 게 강호의 도리 아닌가요?”

    “그래도 갈 길이 바쁜데 돌아가시는 게…….”

    “짚이는 데도 있으니 올라가죠.”

    한빈이 씩 웃으며 미령산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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