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 오호단문도의 비밀 (3)
팽혁빈은 고개를 갸웃하며 광개를 바라봤다.
그 모습에 광개가 손사래를 치며 말을 이었다.
“그 서찰, 원래 그랬습니다. 저도 몇 번 봤지만, 무슨 내용인지를 해석이 안 됩니다.”
“저희 가문의 비급을 보신 겁니까?”
“허허, 사 공자가 봐도 좋다 했습니다.”
“헉, 한빈이가 가문의 비급을 보라고 했다니…….”
“팽가의 사람만이 풀 수 있는 비급이라 했습니다. 뭐, 저는 봐도 모른다나 뭐라나……. 그런데 정말 아무리 봐도 모르겠더군요. 솔직히 저는 이게 비급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갑자기 제가 까막눈이 된 건 아닌지 하는 착각마저 들게 만드는 비급이었습니다.”
“광개 소협이 봐도 모른다고 하시니 제가 난해하다고 느끼는 것이 정상인 것 같습니다.”
“팽가의 사람만 풀 수 있다고 사 공자가 못 박았으니 아마 팽 공자님은 해석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 친구가 조금 독특하긴 해도 아무 말이나 뱉는 친구는 아니니까요.”
“네, 저도 동생을 믿습니다. 하지만, 이건 너무 난해하군요.”
“그럼 해석 잘하시고…… 저는 무제자 어르신께 가 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광개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돌아섰다.
그가 이리 기뻐하는 이유는 한 가지였다.
비급을 해석 못 하는 것이 자신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광개는 처음 서찰을 열어 봤을 때 꽤 흥분했었다.
가문의 비급을 봐도 좋다고 한 한빈이 고맙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건 해석이 가능한 글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내용은 빠져 있었고, 가끔씩 나오는 글자는 서로 연결되지도 않았다.
예를 들어 ‘꽃’이라는 글자가 나오면 한참 띄워진 곳에 ‘공자’라는 글자가, 또 한참 후에 ‘저녁’이라는 글자가 나오는 식이었다.
서찰 한 장에 쓰인 글자의 개수는 불과 서른 개 정도.
아마 정상적인 내용으로 서찰을 꽉 채웠다고 하면 글자 수가 못해도 오백 자는 넘었을 것이다.
이러니 도저히 해석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중에는 오기가 생겨서 산길을 걸으면서도 서찰을 해석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가 나뭇가지에 부딪히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것이 다반사였다.
덕분에 지금 광개의 몸 곳곳에는 멍 자국들로 가득했다.
광개가 그렇게나 노력했는데도 해석 못 한 서찰을 팽혁빈이 단번에 해석했다면 많이 서운했을 것이었다.
뭐, 한편으로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에 답답하기도 했다.
홍칠개에게 걸어가던 광개는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서찰 한 장 때문에 이렇게 많은 고민을 하는 자신이 우스웠던 것이다.
“하하, 내가 언제부터 이딴 것을 신경 썼다고!”
소리가 제법 컸는지 산새들이 급히 자리를 피하려는 듯 날갯짓한다.
푸드덕.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팽혁빈은 기가 찼다.
광개의 광이 미칠 광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만, 가끔 저렇게 미친 행동을 할 때면 그가 어떻게 하남분타주까지 올랐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고개를 흔들던 팽혁빈은 말끝을 흐리며 조용히 서찰을 다시 바라봤다.
팽혁빈도 한빈에게 대충 들은 적이 있었다.
혼원벽력도가 불완전한 것은 오호단문도가 완전하지 못한 이유 때문이라 했었다.
하지만, 오호단문도는 팽혁빈이 생각하기에 문제가 없었다.
초식이 불완전하다면 오호단문도를 펼칠 때 부자연스러워야 했다.
하지만, 지금의 오호단문도는 기름을 칠해 놓은 듯 초식과 초식 사이가 부드럽게 이어져 있는 상태다.
기의 흐름도 문제없고 말이다.
워낙 엉뚱한 동생이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지만, 하남분타주까지 동원해서 이렇게 비급을 보내올 줄은 몰랐다.
팽혁빈의 눈이 마치 숨은 그림을 찾는 것처럼 바쁘게 서찰 위를 훑고 지나갔다.
하지만 터져 나오는 것은 한숨밖에 없었다.
“휴…….”
한숨의 의미는 제법 복잡했다.
분명 숨겨진 뜻이 있을 것이었다.
팽혁빈은 상념에 잠긴 채 조용히 산을 올랐다.
이제는 산 중턱까지 왔다.
하지만, 아직도 서찰에 대한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았다.
그때 팽대위가 말했다.
“아무래도 이쯤에서 쉬는 게 좋을 것 같다.”
“아, 제가 서찰에 정신이 팔려서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팽혁빈은 고개를 숙인 뒤 주변을 바라봤다.
자세히 보니 오십 걸음 밖에 공터가 있었다.
팽혁빈은 공터 쪽으로 걸어가며 뒤쪽 행렬을 향해 외쳤다.
“모두 이곳에서 쉬어 간다! 이쪽으로!”
그의 말에 모두는 공터로 모였다.
팽혁빈의 수하들은 낙엽이 덮인 공터 위에 천을 깔고 자리에 앉았다.
그때 수하 하나가 말했다.
“공자님, 바닥이 이상합니다.”
“앗, 바닥이 울퉁불퉁합니다. 자리를 다시 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공자님.”
여기저기서 불만이 튀어나왔다.
팽혁빈이 심각한 표정으로 재빨리 외쳤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을 살펴라!”
“존명.”
모두는 깔았던 천을 걷어 내고 낙엽을 치우기 시작했다.
사삭, 사삭.
그들은 마치 보법을 펼치듯 발로 빠르게 낙엽을 걷어 냈다.
팽혁빈이 이 일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이유는 바닥에 깔려 있는 것이 암기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때문이었다.
노고수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다고 하지만, 미리 설치해 놓은 함정이나 깔아 놓은 암기는 또 다른 문제였다.
낙엽을 다 치우고 난 수하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공자님, 이 자리가 수상합니다.”
“공자님, 여기도 수상합니다.”
“아무래도 자리를 뜨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동시에 터진 다급한 보고에, 팽혁빈은 재빨리 자리를 살폈다.
팽혁빈은 왜 자리가 울퉁불퉁했는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바닥에 깔린 많은 도토리와 밤 때문이었다.
낙엽을 걷어 내자 도토리와 밤이 쓸려 나갔지만, 아직도 많은 열매가 바닥에 남아 있었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에 눌렸는지는 몰라도, 도토리들이 바닥에 박혀 있다는 점이었다.
팽혁빈은 재빨리 나무 위로 올라갔다.
휙!
나무 위로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본 팽혁빈은 입을 크게 벌렸다.
“헉.”
이유는 한 가지였다.
도토리가 눌려 땅에 박힌 모양이, 마치 사람이 누워 있는 자국처럼 보였던 것이다.
산중에서 사람들이 단단한 도토리 열매 위에 누워 있었다면 그것은 아마도 시체일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영단산을 오르던 무인들이 변을 당한 것이 분명했다.
팽혁빈은 급히 안력을 돋궜다.
그가 찾는 것은 핏자국이었다. 결전이 펼쳐졌다면 분명히 자국이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묘하게 핏자국의 흔적은 없었다.
낙엽은 쓸어 내면 되지만, 곳곳에 있는 바위 위 흔적까지는 지울 수 없는 일. 그러니 흔적은 남을 수밖에 없었다.
나무 위에 걸터앉아 흔적을 찾던 팽혁빈의 귀에 누군가가 속삭였다.
“별거 아닌 것 같소만. 내가 보기에는 숙면을 취하고 간 듯한 느낌이오.”
고개를 돌려 보니 광개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그래도 수상합니다. 산중에 대량의 도토리가 한곳에 모여 있다는 것도 그렇지만, 그 위에서 잠을 잘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건 분명히 변을 당한 흔적이 분명합니다.”
“저쪽에 보니까 싸운 흔적은 있는데 뭐, 비무 이상은 아닙니다.”
“싸운 흔적이라고요?”
“그럼 혹시 한빈이가 사파와 일대 결전을…….”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내가 지난번에 본 게 영단산 바로 아래였소. 딱 보기에도 대접을 잘 받고 온 것 같더이다.”
“대접을 잘 받았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팽혁빈이 놀라 물었다.
광개가 말한 대접을 다른 의미로 해석한 것이다.
“제 말은 그게 아니고 진짜 대접을 잘 받은 느낌이었습니다. 뭐, 안색도 좋았고.”
“그럼 다행입니다.”
팽혁빈은 자리에서 내려와 수레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노고수들과 상의하려는 의도였다.
그때였다.
홍칠개가 갑자기 오른손을 들었다.
조용히 하라는 신호였다.
눈매를 좁힌 홍칠개가 갑자기 어디론가 뛰어갔다.
사사-삭.
그야말로 전광석화와 같은 움직임.
다급한 그의 행동에 모두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들 중 경공에 있어서 홍칠개를 따를 자는 없었다.
갑자기 사라진 홍칠개를 찾으러 가다가는 더 큰 낭패를 당할 수 있었다.
팽혁빈이 수하들에게 소리쳤다.
“모두 경계 태세를 갖추어라!”
그의 말에 수레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였다.
팽대위도 서도를 뽑아 들고 주변을 살폈다.
그것도 잠시, 낙엽 스치는 소리와 함께 홍칠개가 나타났다.
팽혁빈은 홍칠개의 모습을 급히 살폈다.
다행히도 누군가가 부딪친 흔적은 없었다. 단순한 정찰이라 결론을 내리려고 하는데, 홍칠개의 오른손에 들린 술병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홍칠개가 사라질 당시에는 없던 술병이었다.
팽혁빈이 물었다.
“어르신, 그 술병은 대체 어디서 나신 겁니까?”
“전에 알던 할망구한테 뺏어 왔네. 한잔할 텐가?”
“그게 아니라, 그렇게 갑자기 사라지셔서 저희는 적이 나타난 줄 알고 긴장했습니다.”
“적은 적이지만, 오늘만은 아군이라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아무리 적이라도 이런 좋은 술을 대접하는데 어찌 계속 적으로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대체 누구입니까?”
“자네 뒤에 있으니 직접 물어보게.”
“제 뒤에 누가 있다고…….”
고개를 돌리던 팽혁빈은 그대로 굳었다.
눈앞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나이가 들어 보이는 노파가 서 있었다.
지팡이를 짚고 있긴 했는데 그건 장신구 같은 분위기였다. 게다가 허리를 꼿꼿이 편 것을 보면 무림인이 확실했다.
그런데 경지를 추측할 수 없다라?
거기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코앞에 왔다는 것은?
추측을 이어 가던 팽혁빈이 재빨리 포권했다.
“후배, 선배님께 인사드립니다.”
“예까지 잘 왔네. 영단산이 영기가 가득하다지만, 그만큼 험하기도 하지. 고생했어.”
“네?”
“숙소는 정했는가?”
“숙소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에이, 숙소는 정하고 와야지. 아무리 날씨가 좋아도 산속에서 노숙하면 입 돌아간다네. 그러니 내가 자네 일행을 책임지겠네.”
“저, 대체 뉘신지?”
“자네 가문과 각별한 사이가 될 사람이지.”
노파의 말에 옆에 있던 홍칠개가 끼어들었다.
“아니 이 할망구가 무슨 각별한 사이라고 거짓말을 씨불여. 술은 잘 얻어먹었지만, 그런 거짓말을 하면 안 되지.”
“호호, 그건 두고 봐야지.”
둘은 허물없는 친구처럼 농담을 주고받으며 설전을 이어 나갔다.
팽혁빈은 힐끔 고개를 돌려 황보만청과 악소천을 바라봤다.
둘은 노파의 정체를 알고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하지만, 둘도 고개를 갸웃한 채 조용히 노파와 홍칠개의 대화를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때 팽혁빈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저 죄송하지만, 여기서 빨리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왜? 어디에 새색시라도 숨겨 놨나?”
“헉, 그게 아니라. 여기 전투가 벌어진 흔적이 있어서…….”
“아, 저 자국?”
“혹시 아십니까?”
“내가 그놈이랑 잠깐 논 거야.”
“그놈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리고 저건 시체에 눌린 자국이 아닙니까?”
“시체는 무슨 시체, 저기서 한숨 푹 자고 갔구먼.”
노파는 씩 웃었다.
노파의 정체는 독고련이었다.
사도련주의 누이이자, 강북 제일의 대장장이인 정철민의 처이기도 했으며, 정소연의 할머니였다.
물론 이 자리에 나온 것은 순전히 정소연 때문이었다.
뭐, 독고련의 입장에서는 사실만을 말한 것이었다.
한빈을 시험하기 위해 산에 있는 도토리를 모두 썼었다.
그 위에서 사천당가 무사들이 누워 있는 바람에 도토리가 저렇게 박혀 있던 것이지만, 그들 중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험을 위해 사파의 고수 중 일부를 투입했지만, 그 결전도 목숨을 건 싸움이 아니라 비무에 가까웠다.
한빈에 대한 시험은 성공적.
손녀사위로 봤을 때 무위 하나만큼은 빠지지 않았다.
손녀사위가 될지도 모르니, 독고련은 한빈의 형인 팽혁빈과 숙부인 팽대위에 대해 철저히 예우를 갖추기로 결심한 상태였다.
하지만, 정체를 모르는 팽혁빈은 답답할 뿐이었다.
독고련이 말하는 것 중 이해가 가는 것은 한 가지도 없었다.
* * *
그들은 독고련에 이끌려 영단산 정상에 올랐다.
모두가 고개를 갸웃하는 상황이지만, 홍칠개의 오랜 친구 같았기에 팽혁빈과 나머지 사람들은 군말 없이 따랐다.
하지만, 독고련을 따라가던 팽혁빈 일행은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눈앞에 사파의 본거지인 무학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적룡무관(赤龍武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