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 오호단문도의 비밀 (2)
한빈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아, 그거? 별거 없어. 어쨌든 그 친구들을 통제할 해약은 있어야 하잖아. 뭐, 상징적인 거지. 대충 아무거나 환약 모양으로 뭉쳐서 주라고 해 놨다.”
한빈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하지만, 그의 말에는 철저히 계산된 계략이 숨어 있었다.
청운사신이라는 이름으로 쓴 독이었다.
그가 보낸 서찰이 가짜라 생각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렇다고 직접 시험해 볼 수도 없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해약으로도 발작을 멈출 수 없다는 단서를 붙여 놓았으니까.
한빈의 웃음을 본 설화가 물었다.
“혹시 제게 썼던 것도…….”
설화가 말끝을 흐리며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뭐, 비슷하지.”
한빈이 사람 좋은 얼굴로 웃자, 설화가 울먹이며 소매를 잡았다.
“감사해요, 공자님.”
“이제 알았으니 언제든지 떠나려면 떠나도 된다.”
한빈이 활짝 웃었다.
이것은 진심이었다. 전생에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설화였다.
이제부터는 조금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구걸십팔보와 파혼검도 일정 수준에 이르렀으니 전생처럼 당하는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즉, 돌아가도 큰 탈은 없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설화의 표정은 묘하게 바뀌었다.
우는 것도 아니고 웃는 것도 아닌 표정으로 한빈을 쏘아봤다.
“제가 없으면 공자님은 누가 챙겨 줘요?”
“하하, 그런가……?”
한빈이 웃으며 수긍하자 설화가 말을 이었다.
“저, 안 떠나요.”
“계약 기간이 끝나도?”
“그건 몰라도. 일단 계약 기간까지 제집은 여기예요. 그러니 쫓아내지 말아요.”
설화가 조금 흥분한 듯 목소리를 높이자 한빈이 손을 저었다.
“허, 갑자기 왜 그래? 저기 당과 많이 사 놨으니 먹어.”
“네, 공자님.”
울먹이던 설화는 당과를 보자 표정을 바꿨다.
실로 놀라운 태세 전환이었다.
그때 뒤에서 청화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니.”
당과가 있는 쪽으로 가려던 설화가 고개를 돌렸다.
설화는 청화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로운 장신구들이 반짝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게 다 뭐야?”
“당 오라버니가 사 줬어요,”
청화는 뒤쪽을 가리켰다. 그곳에서는 당기명이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그때 청화가 설화에게 묵직한 보따리를 내밀었다.
“참, 이건 언니 거.”
“이게 뭐야? 청화야.”
“언니 거도 같이 사 주셨어요.”
“그럼 이게 네가 새로 산 장신구라고?”
“똑같은 걸로 샀어요, 헤헤.”
청화가 해맑게 웃자 설화는 건네받은 보따리를 슬쩍 열어 봤다.
위쪽에 보이는 장신구만 봐도 지금 청화가 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설화는 조용히 주변을 둘러봤다.
사람 좋은 얼굴로 웃고 있는 한빈.
친자매처럼 따르는 청화.
같이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청화와 자신을 챙겨 주는 당기명.
그리고 오랫동안 봐 왔던 서재오와 악비광까지.
모두가 오늘은 가족처럼 느껴졌다. 아니 느낌이 아니라 진짜 가족이 맞았다.
잠시 감상에 잠겼던 설화는 어딘가를 바라보는 한빈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공자님, 어디를 보고 계시는 거예요?”
“형님이 조금 걱정돼서.”
“혹시 팽혁빈 공자님 행렬에 문제라도 생길 것 같나요?”
“에이, 문제는 무슨 문제. 내가 길을 잘 닦아 놨으니 대우받으면서 올 텐데.”
“그럼 무슨 걱정이에요?”
“내가 준 오호단문도를 잘 해석하고 있을까 해서.”
“보면 바로 알지 않을까요?”
“내가 쉽게 풀어 놓긴 했는데……. 뭐, 알아서 잘 해석하겠지.”
한빈이 피식 웃자 설화도 마주 웃었다.
마주 웃던 설화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가만 보니 모두가 웃고 있었다.
언제 거대한 태풍이 지나갔냐는 듯 다시 선 풀잎처럼.
그들의 표정만 보면 오늘 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보였다.
* * *
영단산 아래에 도착한 팽혁빈 일행.
말이 하북팽가의 행렬이지, 그 면모만 보면 강북 무림의 대표적인 가문의 모임이라 해도 될 정도였다.
팽혁빈은 쓱 뒤를 돌아봤다.
건량과 무가지회에서 다른 세가 사람들에게 나눠 줄 선물을 실은 수레 위에는 황보만청과 악소천이 있었다.
탁.
황보세가의 가주 황보만청이 바둑판 위에 흰 돌을 올려놓자, 산동악가의 가주 악소천의 눈썹이 꿈틀댔다.
그것도 잠시, 악소천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한 수만 물러 주시게.”
“언제는 바둑이 신선놀음이라면서? 수를 물리는 신선이 어디 있는가?”
그때였다.
옆쪽에서 바둑을 구경하던 홍칠개가 끼어들었다.
“수를 안 물리고 살아날 가능성이 있는데, 이거 내 제자보다 안목이 못하군. 에휴…….”
“무제자 어르신, 여기서 대마를 어떻게 살립니까?”
“그러니 자네가 하수라는 거지.”
“아니, 어르신이 둬 보십시오. 여기서 어떻게 대마를 살립니까?”
악소천은 억울한 표정으로 홍칠개를 바라봤다.
“아니, 이게 왜 안 돼? 그러니까…….”
홍칠개는 침을 튀기며 훈수를 두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황보만청이 엷게 웃으며 검지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 수는 통하지 않습니다, 어르신. 제가 봤을 때는 바둑 실력은 악가가 더 나은 것 같습니다만.”
“허허, 내 말이 그 말이네. 역시 바둑 하면 황보세가야!”
악소천이 황보만청 쪽으로 붙자 홍칠개의 이마에 주름 세 개가 잡혔다.
악소천의 편을 들다가 졸지에 배신을 당한 것이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홍칠개가 어딘가에 시선을 멈췄다.
그곳에는 한빈으로 변복한 이무명이 있었다.
한빈으로 변복은 했지만, 이미 이곳에 모인 이들은 다 아는 상태.
홍칠개는 꾸벅꾸벅 졸고 있는 이무명의 옆구리를 찔렀다.
“무명아, 네가 설명해 보아라. 내 말이 틀렸는지.”
“앗, 어르신. 제가 졸고 있어서…….”
“그래, 그러니까…….”
홍칠개가 설명하자 황보만청이 손을 내저으며 막았다.
“그건 여기에 흰 돌이 없을 때고요. 지금은 불가능 한 수입니다. 한 수가 아니라 적어도 스무 수는 물러야지 가능한 수입니다. ……안 그런가, 이 호위?”
모두가 이무명을 바라봤다.
이무명은 늙은이들의 등쌀에 요즘 미칠 지경이었다.
고수들 사이에 끼어 가다 보니 편하긴 하지만, 가끔 자신들의 다툼에 이무명을 끼워 넣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땐 누구의 편도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최근에야 깨달았다.
괜히 누구 하나의 편을 들었다가는 반대쪽 고수에게 몇 날 며칠을 시달려야 한다.
이무명이 최대한 졸린 눈으로 말했다.
“제가 아직 잠이 덜 깨서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모르겠습니다. 어르신들, 죄송합니다.”
앉은 채로 포권한 이무명은 게걸음 걷듯 옆으로 구석으로 피신했다.
이무명은 구석으로 가서 노고수들의 다툼을 지켜볼 참이었다.
싸움에 끼어들지 않는다면 이것처럼 재미있는 세상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무명이 눈을 가늘게 뜨고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수레가 돌부리에 걸렸는지 흔들거렸다.
덜컹.
순간, 바둑판 위에서 흐트러지려는 바둑돌.
황보만청이 바둑판을 잡은 채 내공을 불어 넣었다.
순간 흔들리던 바둑돌이 자석처럼 바둑판에 착 달라붙었다.
그때였다.
자석처럼 착 달라붙었던 바둑돌이 바둑판에서 떨어지려는 듯 마구 흔들렸다.
바둑판을 잡고 있던 황보만청이 한숨을 내쉬었다.
“무제자 어르신, 대국을 힘으로 해결하려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바둑판 밑에 손 대신 거 다 보입니다.”
“허, 내가 언제 손을 댔다고…….”
“지금도 진기를 불어 넣고 계시지 않습니까?”
“허허, 나는 그런 적이 없대도.”
말을 마친 홍칠개는 눈썹이 꿈틀했다.
누가 봐도 힘을 쓰고 있는 모습이었다.
마주 보고 있던 황보만청의 눈썹도 꿈틀했다.
바둑 대결에서 내공 대결로 양상이 바뀐 것이다.
황보만청은 이를 꽉 깨물며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르신, 그만하시지요.”
“내가 무슨…….”
홍칠개도 눈썹을 꿈틀댔다.
그 모습을 보던 이무명은 턱을 괴고 대결에 몰두했다.
이렇게 싸우는 모습이 몇 번째인지 몰랐다.
자꾸 보다 보니 뭔가 보일 것도 같았다.
노고수들이 내공을 쓰는 방법은 놀라웠다. 처음에는 그들의 내공 운용 방법이 보이지 않았지만, 옆에서 지켜보다 보니 감이 잡힐 것 같았다.
황보만청이 쓰고 있는 것은 바둑판 위에 기막을 쳐서 바둑알을 가둬 두는 수법이었다.
홍칠개가 이 승부에서 이기려면 그 기막을 뚫어야 했다.
하지만, 바둑판 기막은 황보만청이 선점했다.
기막을 아예 없애려고 한다면야 수월하겠지만, 지금 홍칠개는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바둑알을 바꾸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위쪽에서 손을 쓸 수도 없는 일.
이무명은 이번 대결의 결말을 대충 알고 있었다.
그때였다.
수레 위에서 굉음이 울렸다.
팡!
폭발음이 울리고 사방으로 바둑판의 조각과 바둑알이 흩날렸다.
파팍!
흩어지는 바둑알을 누군가가 허공에서 낚아챘다.
획.
그러고는 바닥에 바둑알을 올려놓았다.
탁.
“아, 또 바둑판 하나를 날려 먹었습니다.”
악소천이 황보만청과 홍칠개를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이무명이었다.
“이 호위, 시간 날 때 바둑판 하나만 더 깎아 주게.”
“네. 알겠습니다, 어르신.”
이무명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요즘 이무명의 일과였다.
그때 앞에서 팽혁빈이 외쳤다.
“이제 소란을 일으키지 마십시오! 앞쪽은 요즘 들어 가장 활발하다는 사파의 영역입니다!”
“에이, 조금 논 것 가지고…….”
홍칠개가 서운하다는 듯 입맛을 다시자, 이번에는 조용히 있던 팽대위가 나섰다.
“그건 우리 혁빈이 말이 맞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난리를 치셨으면 말도 놀라지 않네요.”
팽대위가 농담하듯 수레를 끄는 말을 가리켰다.
그의 뼈 섞인 농담에 노고수들은 즉시 침묵했다.
팽대위의 농담에 수레 위에서 놀던 노고수들은 잠잠해졌다.
갑자기 조용해지자, 팽혁빈은 눈매를 좁히며 영단산 정상을 바라봤다.
팽대위에 노고수들까지 함께하니 별일은 없겠지만, 사파의 성지로 통하는 영단산 정상을 지나가려니 왠지 기분이 꺼림칙했다.
지금 무가지회가 열리는 이유가 무엇이던가?
바로 사파의 부흥에 맞대응하기 위함이었다.
그 부흥의 중심이 되는 곳이 영단산 정상이었으니,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검은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팽혁빈은 대충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에 악취가 풍겨 왔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개방의 고수로, 홍칠개를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예상과는 달리 악취는 점점 팽혁빈 쪽을 다가왔다.
드디어 상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사-삭.
모습을 드러낸 자가 팽혁빈을 향해 포권했다.
“잘 지내셨습니까? 팽 공자님.”
“아, 광개 소협 아니십니까?”
팽혁빈이 반색하며 마주 포권했다.
상대는 몇 번 본 적이 있는 광개였다.
개방의 하남분타주 정도면 대협의 칭호를 붙여도 되었다.
하지만, 이곳은 노고수가 득실대는 곳.
대협이라는 칭호보다 소협이라는 칭호가 서로에게 더 편했다.
팽혁빈이 보기에 광개는 홍칠개의 직속 수하나 마찬가지였다.
직속 상관이 바로 옆에 있는데 대협이라는 호칭을 쓸 수는 없는 일이다.
팽혁빈은 뒤쪽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무제자 어르신은 뒤쪽 수레 위에 있습니다, 광개 소협.”
“어르신을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말을 마친 광개는 주변의 눈치를 봤다.
은밀한 목소리에 팽혁빈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깔았다.
“혹시, 비밀을 지켜야 하는 대화입니까?”
“뭐, 그건 아니지만 사 공자가 은밀히 전하라고 해서 그럽니다.”
“은밀히라니요? 혹시 안 좋은 소식입니까?”
“그건 아니고 사 공자가 오호단문도를 복원했다고 합니다.”
“오호단문도를 복원하다니요?”
“이게 비급이라면서 전해 주라 하더군요.”
광개는 품속에서 서찰을 꺼냈다.
서찰의 봉투에 적힌 이름을 본 팽혁빈이 말했다.
“한빈이 보낸 게 확실하군요.”
말을 마친 팽혁빈은 서찰을 열어 보았다.
“…….”
팽혁빈은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봉투에 들어 있는 서찰의 양은 꽤 많았다.
무려 열 장이나 되는 방대한 양이었지만, 문제가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서찰에 쓰여 있는 내용이 대부분 지워진 것처럼 글자가 몇 개 남지 않았다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