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 영웅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법 (5)
한참 동안 현령을 바라보던 한빈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에 현령은 움찔하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한빈은 시선을 돌려 현비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 현비는 호위와 함께 다가왔다.
총명한 현비답게 한빈이 자신에게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안 것이다.
현비는 한빈에게 다가와 물었다.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는지요? 대협.”
“그렇소, 중요한 일이오. 이 문제는 현비 마마가 결정해야겠소이다.”
한빈의 말에 현비가 눈매를 좁혔다.
“무슨 일을 결정해야 하는지요?”
“밝힐 것이냐 덮을 것이냐를 말하는 것이요. 한 곳은 무림과 연관되었지만, 내가 말한 두 번째 집단은 나라와 관련이 있으니 말이오.”
“헉,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저자는 이 하찮은 연등 행사에서까지 뇌물을 받았소. 초대장 대신 뇌물을 받은 관계로 초대장에는 독극물의 흔적이 없었던 것이오.”
한빈의 말이 끝나자, 현비의 시선은 관리에게 고정되었다.
동시에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저 관리가 대협이 말한 두 번째 도둑이었군.”
“그런데 집단이라고 했잖아.”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그래도 역시 청운사신이야. 그 위명대로 대단해.”
그들의 목소리에 관리는 사색이 되어 자신의 두 손을 바라봤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청색 초대장을 지참한 사람들에게 돈을 받은 일은 있어도, 초대장을 확인하지 않고 뇌물만 받고 그냥 들여보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손에 독의 흔적이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어디에서 독이 묻은 것일까?
독살 사건이 왜 자신이 받은 뇌물까지 연결된다는 말인가?
관리는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때마침 왔던 현령 덕분에 받은 뇌물을 숨길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일단 이 위기를 벗어난다면 모아 둔 재물로 이 일을 무마시키면 되었다.
돈이 있고 권력이 있는 자에게 씌울 죄목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게다가 현령은 자신의 편이 아니던가?
주변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더욱 커지자 관리는 애써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한빈은 진득한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것은 한빈의 계획이었다.
한빈은 연등회에 오며 살생부를 마음속에 새기고 있었다.
물론 입구를 통제하던 관리는 가장 나중에 살생부에 올랐다.
관리가 가지고 있는 초대장에 독극물의 흔적이 나오지 않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초대장에 독극물을 묻히고 잠입하는 자객이 어디 있겠는가?
당문호가 그런 실수를 할 리 없었다.
뭐, 당문호를 돕는 세력이 그런 실수를 할 가능성은 더욱 없었다.
관리의 손에서 검출된 독극물의 흔적은 한빈이 묻혀 놓은 것이다.
사실 한빈이 관리에게 준 철전에도 독은 없었다.
한빈이 철전을 준 뒤 그의 손을 꽉 잡았을 때 묻혀 놓은 것이었다.
이 독이 해롭느냐 하면 해로운 독도 아니었다.
이 독이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있느냐 하면 그것도 불가능했다.
이 쓸모없는 독은 오직 관리를 몰아넣기 위한 매개체일 뿐이었다.
뭐, 관리가 눈에 띄지 않았다면 바로 현령부터 옭아 넣었겠지만, 뇌물을 밝히는 관리는 스스로 제 무덤을 판 격이었다.
잠시 상념에 빠져 있던 한빈은 주위를 둘러봤다.
주변의 의원들과 연등회에 참석한 인원들은 이래저래 할 말이 많은지 아직 소란스러웠다.
한빈은 바로 손뼉을 쳐서 그 소란을 잠재웠다.
짝.
그 소리는 가벼운 것 같으면서도 모두를 경직되게 만들었다.
아무런 기세도 실리지 않았지만, 앞서 보여 준 허장성세의 기세가 그들의 뇌리에 각인되었기 때문이었다.
소란이 잦아들자 한빈이 현비를 바라봤다.
현비가 말했다.
“밝혀 주십시오, 대협.”
“그럼 좋소. 지금부터 증거를 가져오겠소.”
한빈은 손을 높이 들어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 소리와 동시에, 연등회가 열리는 바깥쪽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거지들이 들이닥쳤다.
거지들은 상자 하나를 한빈의 앞에 두었다.
거지가 말했다.
“어떻게 할깝쇼?”
“열어라.”
“네, 알겠습니다. 대협.”
거지가 상자를 열자 그곳에는 철전과 은전이 가득 차 있었다.
뭐, 대부분이 철전이었지만, 상자에 돈이 들어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한빈이 거지에게 물었다.
“어디서 났느냐?”
“대협의 말씀대로 입구를 지키다 보니, 관원들이 이 상자를 어디론가 옮기려 했습니다.”
“그럼 관원에게 빼앗은 것이냐?”
“네, 대협의 말씀대로 관원들을 안전하게 잠재우고 이곳으로 가져왔습니다.”
“수고했다.”
말을 마친 한빈은 현비를 바라봤다.
“그렇다는군요. 연등회에 입장료가 있었나요?”
“음.”
“그런데 문제는 지금부터요. 원래 물은 한 곳만 썩을 수는 없는 법이오.”
“대협, 쉽게 말씀해 주시지요.”
“그럼 직접 보여 드리겠소.”
말을 마친 한빈이 다시 손을 들었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튕겼다.
딱, 딱.
이번에는 두 번을 튕겼다.
동시에 뒤쪽에서 더 큰 소란이 들려왔다.
“저게 뭐야?”
“그러게?”
“연등회 때문에 들여오는 건가?”
“이 사달이 났는데 연등회 때문에 저 큰 불상을 가져온다고?”
그들의 말대로 지금 뒤쪽에서는 커다란 불상이 이동하고 있었다.
얼마나 큰지 그 불상을 철판에 놓고 그 철판 밑에는 장대를 수십 개를 대 놓았다.
그 장대를 든 거지들이 무려 스무 명.
커다란 불상이 살아 움직이듯 다가오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하지만, 그 불상을 보고 기겁한 사람도 있었다.
그자는 물론 현령이었다.
현령의 귓가에 한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아보겠는가?”
“그러니까, 저 불상은…….”
“내가 자네의 관청에 모셔 둔 불상을 가져온 것이지.”
“어찌 함부로 관청에 있는 물건을…….”
“자네가 협조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 그건 그렇지만, 왜 신성한 불상을 가져오셨습니까?”
“과연 자네 말대로 신성할까?”
“…….”
현령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 불상을 옮긴 사람 중 하나가 한빈에게 다가왔다.
“청운사신 대협, 이자의 말대로 신성한 불상이 맞는 것 같습니다.”
지금 말한 사람은 유일하게 거지가 아니었다.
그는 백색 무복을 입고 있었으며 그의 소매는 달빛에 살아 움직일 듯 매화가 꿈틀대고 있었다.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모두는 웅성대기 시작했다.
“화산파다.”
“그냥 화산파가 아니야. 저기 소매를 봐 봐. 매화가 꽉 차 있잖아.”
“허, 그럼 매화검수?”
“아니지, 그냥 매화검수가 아니라 화산파에서 공을 세운 매화검수임이 분명해.”
“청운사신이 화산파와도 연이 있었군.”
“정파의 영웅인데, 화산파와의 인연이 있는 게 이상한가?”
“그건 맞는 말일세.”
술렁임이 잦아들자 한빈이 말을 이었다.
“매화검협, 수고 많았네.”
“아닙니다.”
“그런데 저 불상이 신성하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제가 강호를 누비면서 봤지만, 이렇게 무거운 불상은 처음이라서 말입니다.”
“허허, 그럼 불상의 속이 꽉 찼다는 얘기인가?”
“그렇지요. 불심으로 가득 차서 그런지, 다른 불상들보다 몇 배는 무겁습니다.”
“그럼 내 친히 불심을 확인해 보겠네.”
말을 마친 한빈은 품 안에서 철전 하나를 꺼냈다.
그러고는 불상을 향해 쏘았다.
슝!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철전이 불상의 배 부근에 꽂혔다.
한빈이 노린 곳은 불상의 구조에 있어서 가장 약한 부분이었다.
거기에 더해 백발백중의 수법은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순간 묘한 소리가 났다.
쩌적!
동시에 불상이 허물어지며 안에 든 내용물이 튀어나왔다.
투두둑.
마치 무너진 댐을 타고 흘러내리는 강물처럼 온갖 재물들이 흘러나왔다.
그 모습에 한빈이 말했다.
“제가 밝힐 부분은 여기까지요. 나머지는 관에 맡기는 것이 맞겠지요.”
“허,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대협.”
현비가 허탈한 표정으로 현령을 바라봤다.
그 시선에 현령은 분한 건지 아니면 두려운 것인지 어깨를 가늘게 떨고 있었다.
현비는 현령이 두려워서 떠는 것이라 판단했다.
뇌물을 받는 것은 관리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일이었지만, 그것이 이렇게 만천하에 밝혀지면 무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물론 주변은 당연히 아수라장이 되었다.
불상 속에서 온갖 재물이 쏟아지자 그들의 뇌리에 더 강렬하게 박힌 것이다.
아마도 내일 아침 정도면 몇십 배로 부풀려져 세상에 퍼질 것이 자명한 일이었다.
그때였다.
현령이 악을 쓰며 외쳤다.
“나만 뇌물을 받았더냐? 나만 죄를 저질렀더냐? 자객을 밝히는 일이 끝나지도 않았거늘, 왜 나를 핍박하는 것이냐! 누가 너를 보내 나를 해하려 시켰느냐? 누구냐?”
현령은 한빈을 향해 걸어왔다.
허장성세의 기세에 눌렸지만, 다 죽게 생겼는데 악에 받쳐 달려드는 건 당연한 일.
한빈은 무표정하게 말했다.
“누가 보낸 것인지는 하늘에 물어보아라!”
“하늘이 어디 있느냐? 돈 있는 자가 하늘이지!”
말을 마친 현령은 옆을 힐끔 보다가 병사가 든 칼을 낚아챘다.
그러고는 재빨리 한빈을 향해 달려들었다.
스릉!
파바팍.
모두가 현령을 향해 달려왔다.
하지만, 현령의 속도는 제법 빨랐다.
한빈은 그 모습에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러고는 품에서 다시 철전 하나를 꺼내 현령을 향해 날렸다.
획!
조용히 날아간 철전은 현령이 달려오던 속도와 맞물리자 제법 강하게 그의 몸에 박혔다.
푹!
동시에 현령이 바닥을 굴렀다.
데구르르.
몇 번을 구르던 현령이 대자로 뻗었다.
장내는 더욱 술렁였다.
한빈은 술렁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조용히 현령을 바라봤다.
현령은 한빈의 살생부에 언제 올랐을까?
뭐,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기 때문에 죽는 것은 아니었다. 당문호와 관계가 있다는 그 자체로 살생부에 오른 것이다.
당문호와 이간질을 시킨 후 현령까지 제거해야 후환이 없어진다.
모든 일을 처리한 이후 당문호와 다시 작당하는 일도 없어야 하고, 적에게 포섭당해 한빈 일행을 공격하는 일도 없어야 했다.
혹시라도 조정에 있을 적이 자중지란을 일으키는 씨앗이 되어야 했다.
아마도 그들은 서로를 의심할 것이다.
거기에 더해 뇌물을 전달하러 갔을 때 현령에게 나던 기분 나쁜 기감은 한빈의 마음속에 있는 살생부에 굵은 글씨를 남기기에 충분했다.
한빈은 주변을 바라봤다.
관리가 아닌 일반 백성들도 몇몇 보이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웃음을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즉, 죽어 마땅한 자라는 증거였다.
모두가 웅성거리고 있을 때 한빈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럼 이제부터는 제가 말한 첫 번째 집단을 밝힐까 하오. 저는 벌써 범인을 알아냈소이다.”
“그게 정말입니까? 첫 번째라면 무림과 관을 적으로 만들려는…….”
현비는 말을 맺지 못했다.
어디선가 소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잡아라!”
“모두 포위하라!”
“빨리 지원을…….”
그 외침들은 중독된 여인을 보호하고 있던 곳에서 나온 것이었다.
당황한 현비가 물었다.
“혹시, 증인을 없애기 위해 온 것입니까?”
“그런 건 아닐 것이오.”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손을 저었다.
현비를 호위하고 있는 두 명의 호위는 칼을 빼 들고 주변을 경계했다.
그때 병사 하나가 다급히 장후에게 뛰어왔다.
“큰일 났습니다.”
“보고하라.”
“증인이 도망쳤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그, 그게 증인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포위를 뚫고 도망쳤습니다.”
“정확히 보고하라. 증인을 해하기 위해 적이 온 것이 아니라 증인이 도망쳤다는 이야기냐?”
“네, 맞습니다. 정신을 차린 증인이 병사들을 제압하고는 사라졌습니다.”
“흠.”
장후는 난감한 표정으로 청운사신, 즉 한빈을 바라봤다.
시선을 마주한 한빈은 진득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모습에 현비가 끼어들었다.
“대협, 혹시 짐작 가는 거라도 있으신지요?”
“사실 중독된 여인이 범인 중 하나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사실 오늘 일은 미리 알고 있었소.”
“대, 대체 그게…….”
“말하자면 조금 길지만, 천천히 말씀드리겠소. 여기 있는 당문호가 얼마 전 저를 찾아왔소. 그러니까…….”
한빈은 입에 물레방아를 달아 놓은 듯 일정한 어조와 일정한 속도로 빠르게 말을 이었다.
물론 진실에 거짓이 섞인 내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