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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283화 (283/621)

283. 영웅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법 (3)

그녀가 뒤로 한 발짝 물러서자 한빈이 장후를 바라봤다.

“여기가 누구 관할인가?”

“…….”

뜻을 모르는 장후가 고개를 갸웃하자, 한빈이 다시 물었다.

“이곳 칠음현을 돌보는 관리가 있을 터. 최종 판단은 내가 아닌 나라에서 임명한 현령이 해야 하는 게 맞지 않는가?”

“네, 그렇습니다. 대협.”

“지금 어디 있는가?”

“제가 모시고 오겠습니다.”

장후는 재빨리 어디론가 달려갔다. 그가 떠나자 당문호의 눈빛에 담긴 흥분이 더욱 짙어졌다.

그것을 확인한 한빈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강호에는 ‘아군과 적군은 이승을 떠날 때에야 안다.’라는 속담이 있다.

마지막까지 모르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 아니던가!

그때 현령이 자리로 왔다.

현령은 포권한 후, 자신이 자리에 오지 않은 이유를 설명했다.

그것은 현비의 지시였다.

자신이 해결할 테니 그냥 자리에 있으라는 현비의 지시에 따라 구경만 하고 있었다고 털어놨다.

책무를 다 하지 않는 관리라는 시선을 피하고 싶은 듯했다.

한빈은 현령에게 말했다.

“이 사건은 무림이 관계된 것 같지만, 최종 판단은 황제 폐하께서 임명한 현령의 몫이라고 생각하오. 동의하시오?”

한빈의 하대에도 현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령을 대하는 한빈의 태도는 마치 숨을 쉬듯 자연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수염까지 붙여 놓은 채 낡은 푸른 무복을 입은 한빈의 모습은 당장이라도 등선할 도인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한 가지 이유가 또 있었다.

바로 청운사신에 대한 세상의 시선이었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청운사신은 세상 사람들의 입에 그리 오르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적룡대협이라는 인물의 이야기가 세상에 퍼지자, 정의맹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들도 영웅을 만들어야 했다.

정체는 모르지만, 정파의 고수임이 분명한 청운사신이라는 좋은 패를 그냥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누구의 작품인가?

바로 정의맹 군사 중 하나인 모용후의 작품이었다.

덕분에 모용후는 지금 정의맹의 군사 중 이인자 자리까지 올랐다.

청운사신의 후인이 하북팽가의 막내 공자라는 이야기는 쏙 빼고 소문을 냈다.

특정 가문을 도와줄 만큼 정의맹의 인심은 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정의맹이 발 빠르게 움직인 덕분인지, 지금 강남 무림에는 청운사신의 위명이 널리 퍼진 상태였다.

소문이란 항상 과장되기 마련. 청운사신의 위세는 무림삼존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러한 일련의 이유로 한빈의 오만한 태도는 사람들의 눈에는 당연하게 보였다.

현령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동의합니다.”

“사건의 해결 과정을 보고 있다가 미흡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언제든 개입하셔도 좋네. 그리고 판단은 현령이 내리시게.”

“네. 그리하겠습니다, 대협.”

“그럼 지금부터 내가 현비 마마와 현령에게 받은 권한으로 사건을 해결하겠소. 내가 보기에 범인은 아직 이 안에 있소.”

한빈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변을 훑었다.

마치 잘 벼린 칼날처럼 한빈은 그 눈빛의 예기를 곳곳에 쏟아 냈다. 시선이 마주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표정만 본다면 모두가 범인이라고 생각할 듯싶었다.

뒤쪽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현비는 청운사신이라는 자의 행동에 탄복했다.

“청운사신은 듣던 대로 대쪽 같은 분이구나.”

“네, 역시 강호에 퍼진 위명 그대로입니다.”

“게다가 저 경지에 힘을 드러내지 않는 점도 놀랍구나. 외유내강이란 이런 것임을 보여 주는 인물이구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반대로 말씀하신 것 아닙니까?”

호위는 고개를 갸웃했다.

나타나면서부터 무위를 과시했는데 그것이 어떻게 외유내강이 된다는 말인가?

현비는 달빛에 어울릴 듯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네가 힘을 가지고 있다면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겠느냐?”

“그야…….”

“그는 상대를 억누를 힘이 있는데도 최종 판단은 모두 관리에게 맡겼다.”

“듣고 보니 말씀하신 대로 외유내강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럼 계속 그가 하는 일을 지켜보고 있거라.”

현비는 조용히 청운사신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주변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잠잠해지자 현령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대협이 말씀하신 대로 진행 과정이 불합리하든가, 아니면 제 힘이 필요할 때만 나서겠습니다.”

현령까지 물러나자 모두는 침만 꿀꺽 삼키며 사태를 주시했다.

모두의 시선은 청운사신으로 변장한 한빈에게 모인 상태.

한빈은 여유 있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일단 중단된 일부터 마저 하는 게 좋겠네.”

“중단된 일이라면…… 사천당가의 무고를 증명하는 일 말입니까? 대협.”

장후가 묻자 한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그럼 저기 있는 당 공자의 몸을 수색하겠습니다.”

“그게 먼저가 아니지.”

“그럼 그 옆에 있는 수하가 먼저입니까?”

“그게 아니라, 저 사람에 대한 수색부터 마치는 게 옳다고 생각하네.”

한빈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당문호가 있었다.

시선이 마주친 당문호는 황당하다는 듯 한빈을 바라봤다.

그도 그럴 것이, 당문호는 자진해서 상의까지 벗고 무고를 입증했다.

그런데 갑자기 당문호를 가리킨다니?

모두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장후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문호 대인은 제가 방금 조사를 마쳤습니다.”

“확실한가?”

“확실합니다.”

“자네의 목을 걸고 말할 수 있는가? 모든 곳을 빼먹지 않고 수색했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묘하게 같은 질문을 계속 반복하자 군중이 웅성거렸다.

장후는 겨우 입을 열었다.

“그건…….”

장후는 말끝을 흐리며 어리둥절한 눈으로 주변을 바라봤다.

모두는 웅성거리며 장후를 보고 있었다.

실로 묘한 상황이었다.

철저히 조사했지만, 막상 목을 걸라고 하니 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고개를 갸웃하며 장후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있었다.

장후가 당황하고 있을 때, 한빈이 말했다.

“자네가 조사하지 않은 곳이 하나 있네.”

“저는 모든 곳을…….”

장후는 말끝을 흐렸다. 한빈의 시선이 당문호의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빈의 시선이 멈춘 곳은 다름 아닌 당문호의 신발이었다.

당문호는 다른 관리처럼 발목까지 올라오는 가죽신을 신고 있었다.

그 말에 당문호는 황당하다는 듯 청운사신, 즉 한빈을 바라봤다.

사실 가장 걱정한 것은 청운사신이라는 작자가 힘으로 모든 상황을 엎지는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그런데 최종 판단을 현령에게 맡기겠다고 하니, 사실상 청운사신은 방해꾼이 아닌 자신의 조력자가 된 셈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을 다시 조사하라고 하니, 당문호는 청운사신의 행동이 우습게 여겨졌다.

당문호는 씩 웃으며 청운사신 한빈은 향해 걸어갔다.

“그럼 어디…….”

하지만, 당문호는 말을 맺지 못했다.

한 걸음 내딛는 도중, 오른쪽 신발에서 이질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순간 소름이 등골을 타고 머리끝까지 치달았다.

슬쩍 오른쪽 발을 돌려 보니 분명 작은 호리병이었다.

자신이 조력자를 통해 당기명에게 넣어 둔 호리병의 크기는 딱 엄지손가락만 했다.

그런데 지금 느껴지는 호리병의 크기가 그것과 똑같았다.

당문호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당문호는 재빨리 현령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쯤에서 나서 달라는 신호였다.

그의 신호를 받은 현령은 조용히 걸어왔다.

현령이 다가오자 한빈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오?”

“대협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 이렇게 왔습니다.”

“말해 보시오.”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일수록 그 처벌은 엄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흠, 그게 무슨 뜻이요?”

“더욱 철저히 밝혀 달라는 부탁을 하고 싶습니다. 관리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저기 있는 당문호의 죄가 있다면 샅샅이 밝혀 주시길 바라는 바입니다.”

“오호. 마치 저자가 죄를 지은 것처럼 말씀하시는군.”

“흠, 그건 아닙니다. 단지, 제가 오래전부터 아는 친구이기에 더욱더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 우정까지 깨면서 나라는 걱정하는 마음이라……. 어쨌든 그 마음 잘 받겠소.”

“감사합니다, 대협. 저는 다시 조용히 지켜보고 있겠습니다.”

현령은 조용히 고개를 숙인 뒤 물러났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당문호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혔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천당가를 몰아넣는 것도, 자신이 사천당가를 접수하는 것도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현령의 도움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그가 지금 배신을 한 것이다.

뇌물이 부족했을까?

아니면 전에 그에게 잘못한 것이라도 있는 것일까?

당문호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새파랗게 질린 당문호의 모습에 모두 고개를 갸웃했다.

주변에 있던 의원 중 하나가 말했다.

“당문호 어르신이 왜 저러시는 거지?”

“그러게 말이야.”

“땀까지 흘리시잖아.”

“혹시…….”

“에이, 혹시라니? 자네는 당문호 어르신을 의심하는 건가?”

“그게 아니라 표정이 이상해서 그러지.”

의원들의 웅성거림에 비례해서, 당문호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이제는 아예 사색이 된 것처럼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때 한빈이 그에게 번개처럼 달려가 부축했다.

부축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혈을 짚은 것이었다.

털썩.

당문호는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난데없는 상황에 주변은 다시 아수라장이 되었다.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당문호를 앉힌 다음 가부좌를 틀게 했다.

그러고는 백회혈에 손을 올려놨다.

그 모습에 모두는 입을 벌려다.

누가 봐도 응급 상황에서 조치를 취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 장면을 바라보던 의원들은 웅성거리다가 입을 다물었다.

내기로 진기도인을 하는 할 때는 정숙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물론 당문호만은 미칠 지경이었다.

그는 한빈이 속삭인 한마디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가만히 있지 않으면 죽는다는 딱 한마디였다.

그래 놓고 점혈을 하더니 백회혈에 손을 올려놨다.

남들이 보기에는 응급 조치를 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제는 당문호를 중독시키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이 처음에 깔아 놨던 석사독으로 말이다.

이마에 버드나무의 잎사귀를 갖다 대는 수법이었는데, 묘하게도 그 버드나무 잎사귀는 자신이 청색 좌석에 깔아 놨던 것이었다.

당문호의 의문은 딱 한 가지였다.

힘으로 해결하면 될 일을 왜 저런 연극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당문호가 난감해하고 있을 때, 한빈이 그의 백회혈에서 손을 뗐다.

그러고는 조용히 심호흡한 뒤 사람들을 둘러봤다.

눈이 마주친 의원들은 침을 삼키며 한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침묵을 깬 것은 역시 한빈이었다.

“위험한 고비는 넘겼네.”

“어떻게 된 일입니까?”

“당문호도 중독되었다네.”

“헉.”

“내가 보기에는 사천당가가 그들의 목표일 수도 있다네. 그리고 지금 중요한 것은 사천당가의 무고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범인을 밝히는 것이라 보네.”

“네, 그건 맞는 말씀이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일단 증인을 보호하는 것이 먼저일 것 같네.”

말을 마친 한빈은 재빨리 중독된 여자의 맥을 잡았다.

그 모습에 의원들이 다시 웅성대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청운사신이 무공뿐 아니라 의술까지 겸비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완맥을 잡은 시간은 고작해야 숨 몇 번 쉴 시간.

한빈은 품속에서 환약 몇 개를 꺼냈다.

그러고는 중독된 여인의 입 속으로 환약을 넣었다.

묘하게 의녀의 입술이 본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한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일어났다.

“이제 급한 고비는 넘긴 것 같소.”

말을 마친 한빈은 멀리 떨어진 현비를 바라봤다.

시선을 받은 현비가 조용히 물었다.

“제가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요?”

“현비 마마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소이다.”

“말씀하시지요.”

“중독된 증인을 부탁하겠소. 호위 중 한 명을 이쪽으로 보내 주시오.”

“네, 그러지요.”

현비는 자신의 오른쪽에 있는 호위에게 눈짓했다.

지시를 받은 호위는 재빨리 한빈에게 다가왔다.

“대협, 말씀하시오.”

“다름이 아니라 이 여인을 부탁하오. 그리고…….”

한빈은 마지막 말은 목소리를 줄여 호위만 들을 수 있도록 속삭였다.

순간 호위의 눈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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