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280화 (280/621)
  • 280. 누구를 위한 덫인가? (4)

    한빈이 손을 덥석 잡자 관리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저 갑자기 이게 무슨…….”

    “적어서 그렇습니까?”

    한빈이 진득한 웃음을 짓자, 관리는 멍하니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라…….”

    “그럼 넣어 두시지요.”

    한빈은 그제야 그를 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러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뒤에 있는 분들도 같이 가도 될까요?”

    한빈은 뒤를 힐끔 돌아봤다. 그곳에는 아까 입구에서 쫓겨난 가족들이 있었다.

    그들을 바라본 관리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허, 그럼 당연하지요.”

    관리의 말에 한빈의 뒤를 돌아보고 말했다.

    “같이 들어가시죠.”

    아까 관리에게 쫓겨났던 가족들은 혹시 몰라 조심스럽게 한빈의 뒤에서 지금의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이의 손을 잡은 남자가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대인.”

    “대인은 아니고 일개 의원일 뿐입니다.”

    말을 마친 한빈이 입구로 가자, 경비병 중 하나가 창을 옆에 세워 두고 튀어나왔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나으리.”

    “네, 그럼 수고해 주십시오.”

    한빈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한빈은 안내해 준 경비병에게 살짝 눈인사를 건넨 뒤 손짓했다.

    이제는 그만 가도 좋다는 표시였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나으리.”

    경비병은 꽁무니가 빠지게 돌아갔다.

    몇 걸음 걸어가자 설화가 한빈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저기 보세요.”

    설화가 가리킨 곳에는 입구를 통과한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들은 더위를 몰아내려는 듯 초대장을 부채 삼아 흔들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설화가 탄성을 흘렸다.

    “자리까지 나누어져 있었네.”

    다른 이들이 가지고 있는 초대장의 색이 달랐던 것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청색.

    한빈과 설화가 가지고 있는 것은 붉은색이었다.

    설화는 왜 그렇게 관리가 당황했는지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신분에 따라 자리의 위치도 달라졌다.

    한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여기까지는 한빈의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한빈은 눈매를 좁혔다.

    첫 번째 준비는 관리를 통해 안배해 놨고 이제부터는 차례차례 준비하면 끝이었다.

    한빈이 잠시 상념에 잠겨 있을 때, 청화가 공중에 달려 있는 연등을 가리켰다.

    “저런 등은 처음 봐요.”

    한빈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공중에는 작은 등이 수를 놓고 있었다.

    한빈은 청화가 놀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바로 등의 모양 때문일 것이다. 춘절의 연등회가 화려하다면 이곳 칠음현의 연등들은 소박했다.

    소박한 하나하나의 연등은 작은 점을 만들었다.

    작은 점들이 하나로 이어져 선을 만들어 놓는 것 같았다.

    화려함보다는 차분함에 중점을 뒀다고 할까?

    어라?

    가만히 보니 점들이 모여 하나의 글자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것은 복(福).

    옆을 힐끔 보니 그곳에는 다른 글자가 써 있다.

    희(喜).

    하나하나가 글자를 만들다니!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연등회 행사였다.

    역시 해동성국의 연등 제조 기술은 중원을 앞지르고 있었다.

    한빈도 이 순간만큼은 조용히 연등을 감상했다.

    뭐, 전생에도 관이 주최하는 행사에 갈 일이 없었으니 한빈도 이런 자리는 생소했다.

    잠시 상념을 잊은 채 연등을 바라보던 한빈은 눈빛이 달라졌다.

    이제부터는 일을 해야 할 때였다.

    분주히 주변을 둘러보던 한빈은 자리에 조용히 당기명이 있는 곳을 향했다.

    당기명은 당문호의 옆에 앉아 각지에서 온 의원들을 소개받고 있었다.

    과연 그들이 사천당가 가주가 앓고 있는 병의 이름이라도 알 수 있을까?

    아마 알 수 없을 것이다.

    사천당가 가주의 중독을 밝혀낼 사람이 있다면 천하제일이라 칭해도 될 터였다.

    당문호와 당기명은 청색 자리에 앉아 있다가 황색 자리에 앉아 황족과 황실 의원에게 인사하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그렇다면?

    당문호의 계획은 무엇일까?

    한빈은 일단 시선을 돌렸다.

    신경을 끊은 듯 다시 연등을 바라보는 한빈.

    하지만, 당문호와 주변의 기척을 살피는 것은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때 한빈의 곁에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힐끔 고개를 돌리니 악비광이 덩치에 걸맞지 않게 해맑게 웃고 있었다.

    “저만 빼고 왜 먼저 가셨습니까?”

    “바쁜 거 같길래 먼저 왔지. 그런데 대체 이 초대장은 어디서 얻은 건데 경비병들이 저렇게 쩔쩔매는 거지?”

    한빈이 모른 척 물었다.

    황실에서 발행한 초대장이라는 것을 알긴 해도, 어디서 구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은 알지 못했다.

    악비광은 어깨에 힘을 팍 넣고 입을 열었다.

    “저희 가문이 황실에 끈이 좀 있습니다.”

    “황실에 끈이 있다고?”

    한빈이 눈매를 좁히자 악비광이 가슴을 탁탁 치며 말을 이었다.

    “저희 가문이 좀 그렇지 않습니까?”

    “대체 누구길래 그래?”

    “그건 비밀…….”

    악비광이 복수하듯 한빈이 평소 내뱉던 말을 뱉으려 하자 한빈이 주먹을 쥐었다.

    뚝. 뚝.

    손가락 관절이 내는 소리에 악비광은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

    “비밀이 어디 있습니까? 형님께는 더욱 그렇죠. 맞지, 설화야?”

    실로 놀라운 태세 전환이었다.

    “그건 그렇죠.”

    옆에서 듣고 있던 설화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빈은 아무 표정 없이 웃고만 있었다.

    악비광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황실에 척이 있습니다.”

    “오호.”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됐어, 거기까지. 그건 악가의 비밀 비슷한 거잖아. 거기까지는 알 필요가 없지.”

    “역시 형님은 시원하시네요.”

    악비광은 한시름 덜었다는 듯 웃었다.

    “무릇 사내란 맺고 끊는 게 정확해야 하는 법이지…….”

    한빈은 말끝을 흐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악비광의 친척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전생의 기억에서 끄집어 낸 정보였다.

    뭐, 황실에서도 참석하는 연등회라 했으니 이 우연이 이상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초대장의 색도, 좌석도 확실히 구분되었다.

    황실이나 고관대작이 초청한 사람은 붉은색이고 다른 이가 초대한 사람은 청색이었다.

    가장 상석은 여기서 조금 떨어져 있는 황금색 의자였다.

    황금색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초대장 없이 들어온 이들이었을 것이다.

    황족이나 왕족들에게는 초대장이라는 것이 필요 없었을 테니까.

    중간이 파란색 초대장을 받은 사람.

    그리고 이곳이 붉은색 초대장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때 한빈이 눈매를 좁혔다.

    당문호가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표정으로 주위를 살폈다.

    당문호는 좌석을 점검하는 듯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한빈은 당문호가 돌아다니는 경로를 머릿속에 새겨 놓았다.

    옆에 있던 설화도 한빈을 따라 두리번거린다.

    둘이 동시에 두리번거리자 그 모습이 마치 도토리를 찾는 다람쥐 같았다.

    처음에는 한빈을 따라 시선을 돌린 것인데 지금은 뭔가를 찾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찾고 있는 것이 뭔지를 모르는 설화였다. 눈에 걸리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가 딱 와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모습에 한빈이 설화에게 물었다.

    “왜 그러고 있어?”

    “뭔가 낯선 것 같은데 그게 뭔지가 감이 안 잡혀서요.”

    “무림인이 별로 없잖아.”

    “무림인이라고요?”

    설화는 매의 눈으로 주변을 바라봤다.

    묘하게 무복을 입은 이가 별로 없었다. 이런 행사라 해도 무림인이면 무복을 입고 나오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정말 무복을 입은 자라고는 사천당가에서 온 당기명과 당독대 그리고 악비광이 전부였다.

    설화가 고개를 갸웃하자 한빈이 말을 이었다.

    “우연일까?”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세상에는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는 법이지.”

    “우연이 아니면 필연이라는 얘기예요?”

    “필연보다는 누군가의 의도라고 봐야지.”

    “의도라면…….”

    “그걸 지켜보려고 우리가 여기에 온 거잖아. 오늘은 옛 성현 중 노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게 좋을 것 같다.”

    “…….”

    설화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한빈의 말뜻을 이해한 것이다. 오늘만은 살수의 눈을 버리고 옛 성현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봐야 할 것 같았다.

    옆에 있는 악비광이 그들의 대화에 고개를 갸웃할 때, 한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악비광이 물었다.

    “어디 가십니까?”

    “뭘 떨어뜨리고 온 것 같아서.”

    “도와드릴까요? 형님.”

    “도와준다는데 마다하는 건 강호의 도리가 아니지.”

    씩 웃은 한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뒤를 악비광이 급하게 따르고 말이다.

    한참을 따라가던 악비광은 고개를 갸웃했다.

    한빈이 좁쌀 한 움큼을 잡았기 때문이다.

    이곳 연등회가 열리는 행사에는 여기저기 좁쌀을 넣어 둔 그릇이 있었다.

    여름을 앞둔 이 시기에, 좁쌀을 던져 악귀를 몰아내는 것은 호남과 하남의 공통적인 풍속이었다.

    보통 행사가 다 끝나고 던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좁쌀을 미리 준비하는 한빈이 이상했던 것이다.

    거기에 한빈은 청색 자리가 있는 곳을 누비며 허공을 쓸어내리는 듯한 묘한 동작을 하고 있었다.

    남들이 보면 그냥 웃어넘길 일이지만, 한빈을 잘 안다고 자부하는 악비광이 볼 때에는 이상한 일이었다.

    물론 한빈의 동작에는 의미가 있었다.

    한빈은 지금 당문호가 놓은 덫을 제거하고 있었다.

    당문호가 눈에 보이지 않는 암기를 몇몇 자리에 비치해 놓았던 것이다.

    의도는 뻔했다. 그의 목표는 당기명이 아닌 당가 전체임이 분명했다.

    만약 여기서 독살 사건이 일어난다면?

    의심받을 만한 사람의 일 순위에는 당연히 당기명이 있을 것이었다.

    황족이 참석한 행사에서 당기명이 범인으로 확정된다면?

    사천당가의 가주가 문제가 아니라 사천당가 전체가 몰락의 길을 걸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당문호에게 어떤 이득이 있을까?

    한빈은 이것이 의문이었다.

    * * *

    멀리서 고관대작들과 대화를 나누던 당문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지난번에 당기명의 곁에 있던 의원이 얼핏 보였기 때문이다.

    묘하게 거슬리는 작자였다.

    무공은 없는 것 같은데 의원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특별한 재주도 없어 보였다.

    그런데 조카인 당기명은 그를 떠받드는 듯 보였다.

    대체 얼마나 고명한 의술을 지녔기에?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의술을 지녔다고 한들 오늘의 횡액은 피해 갈 수 없을 것이었다.

    오늘 당문호가 준비한 덫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용케 몇 가지 덫을 피한다 해도 그의 덫은 천라지망처럼 촘촘하게 깔려 있었다.

    당문호는 문득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머리는 비상했지만, 선천적으로 타고난 단전의 크기 때문에 사천당가의 무공을 익히지 못한 비운의 천재.

    그것이 당문호를 따라다니던 꼬리표였다.

    당문호는 사천당가의 무공을 포기하고 과거 시험에 매진했었다.

    그로부터 얼마 안 지나서 향시, 회시, 진시를 모두 장원으로 급제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를 삼원이라 부르는데, 사천에서는 백 년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기쁨도 잠시, 북경으로 진출한 당문호는 또 한 번의 설움을 맛봐야 했다.

    그에게 사천당가라는 배경은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된 것이다.

    자신보다 낮은 등급으로 과거에 통과했던 이들도 당문호를 치고 올라갔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돈 혹은 배경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사천당가를 몇 번씩 찾아가곤 했다.

    하지만 당문호가 장원을 했다고 여기저기 자랑하고 다닐 때와는 달리, 사천당가의 가주는 태도를 바꾸었다.

    사천당가에서 당문호를 실질적으로 지원하면 관과 무림이 별개라는 강호의 법칙이 깨진다는 것이었다.

    북경에서 철저히 깨지고 내려올 때 손을 내민 것은 이름 모를 유생이었다.

    이름 모를 유생은 단시간에 삼원에 오른 당문호를 존경한다며 접근해 왔고 그에게 말도 안 되는 지원을 약속했다.

    집안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지만, 의심할 수 없었던 것은 그의 지식이었다.

    유학에 대한 그의 지식은 당문호를 뛰어넘고 있었으니, 의심하려야 의심할 수가 없었다.

    그와 동행을 한 지 한 달째, 그 유생은 제안을 해 왔다.

    차라리 사천당가를 손에 넣으라는 충고였다.

    당문호는 먼저 자신이 사천당가에 서운한 점을 유생에게 말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유생은 진귀한 영약과 함께 막대한 자금은 내놓았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손에 넣을 수 있는지까지 설명해 주었다.

    당문호는 그 유생이 자신을 위해 나타난 제갈공명의 현신이라고 생각했다.

    이제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롭게 돌아갔다.

    오늘 그는 사천당가를 손에 넣을, 마지막 덫을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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