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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279화 (279/621)
  • 279화. 누구를 위한 덫인가? (3)

    한빈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다시 의원의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설화와 청화도 그에 맞춰 의녀의 복장을 했다.

    한빈은 약재상과 장신구를 파는 가게를 들러 필요한 물건을 샀다.

    설화는 전날과는 달리 한빈이 고르는 물건에 대해서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다.

    한빈의 모든 것을 배우겠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볼 뿐이었다.

    마치 서당에서 훈장을 바라보는 아이 같았다.

    모든 준비를 마친 그들은 연등회가 열리는 곳으로 향했다.

    연등회가 열리는 곳은 칠음현의 칠경 중 하나라는 칠음강이었다.

    물살이 셀 때면 칠현금 소리가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폭은 성인 걸음으로 백 보나 되어서 배도 띄울 수 있을 정도의 강이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한빈은 설화와 청화를 데리고 행사장 입구로 걸어갔다.

    한빈 일행이 행사가 열리는 칠현강의 입구에 도착하자 경비병이 매의 눈으로 바라봤다.

    경비병의 시선을 마주한 한빈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그에게 다가갔다.

    마치 어쩌라고 하며 외치는 것처럼 미소를 짓고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빈은 의원들이 들고 다니는 침통을 들고 있었고 설화와 청화는 각각 당과와 찹쌀떡을 오물거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의원이 의녀를 데리고 나온 것처럼 보였다.

    매의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누군가의 지시가 있었다는 것이다.

    한빈이 경비병의 앞에 서자 두 경비병이 창을 교차하며 막아섰다.

    “멈추시오!”

    목소리가 마치 적을 대하는 것처럼 날이 서 있었다.

    그 외침을 끝으로 경비병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한빈이 물었다.

    “초대장을 보여 드릴까요?”

    한빈이 손을 품속에 넣자 경비병은 턱짓으로 옆쪽을 가리켰다.

    그들은 마치 모든 권력을 손에 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초대장을 검사하는 관리가 앉아 있었다.

    관모를 보니 제법 품계가 높은 관리였다.

    그는 팔짱을 낀 채 한빈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아마 경비병들의 날 선 목소리는 저자 때문인 것 같았다.

    저 관리가 이곳의 책임자가 분명했다.

    마치 오늘 연등회 행사만큼은 자신이 권력을 쥐고 있다는 듯, 눈길도 주지 않는 그들의 행동. 한빈은 어이가 없었다.

    “험,”

    한빈이 기침했지만, 관리는 변함없이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옆에 그를 보던 설화는 콧김을 내뿜었다.

    표정만 보면 언제든 돌진할 준비가 된 들소 같았다.

    초대장을 검사하기 위해 자리에 앉아 있는 자가 저렇게 딴짓을 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설화가 화를 참고 있을 때, 한빈이 그 관리의 앞에 갔다.

    “초대장이라면 여기…….”

    관리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잠시 기다리게.”

    한빈의 복장을 보더니 바로 하대하는 관리.

    그 모습에도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다시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보면 모르겠나?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나? 서책을 읽고 있지 않은가?”

    “…….”

    한빈은 옆을 힐끔 바라봤다.

    옆쪽에 있는 설화는 얼굴이 벌게져 있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웃었다.

    대충 예상한 일이었다. 뇌물을 밝히는 현령과 동창의 지부를 봤을 때, 아랫물이 맑을 리는 만무했다.

    설화도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막상 이런 대우를 받자 화를 못 이기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설화도 많이 변한 것 같았다.

    살수일 때의 설화라면 이렇게 감정을 보일까?

    피식 웃은 한빈이 설화에게 눈짓했다.

    가만히 있으라는 신호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묵묵히 책장을 넘기던 관리가 서책을 덮었다.

    탁.

    한빈이 다시 품속에 손을 넣자 관리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허허, 성질이 왜 그렇게 급한가? 서책을 다 읽었으니 차 한 잔 마실 시간은 있어야 하지 않는가?”

    “아, 네 그러셔야죠.”

    “흠, 이해해 주니 고맙네, 다리 아플 텐데 저쪽 갈대밭에라도 가서 앉아 있든지.”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인.”

    한빈은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설화는 얼굴이 벌게지다 못해 폭발하듯 달아올랐다.

    품속에 손을 넣은 것으로 봐서 우혈랑검을 찾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한빈과 청화는 설화를 끌고 잠시 자리를 벗어났다.

    “진정해라, 설화야.”

    “저, 저놈이 공자님을 모욕하다니 참을 수 없어요. 오늘 밤에 저놈의 목을 따 올게요.”

    얼굴이 벌게진 설화는 목을 따겠다는 소리를 당과를 사 오겠다는 것처럼 편하게 내뱉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피식 웃었다.

    설화는 날이 선 목소리로 말했다.

    “공자님, 저걸 그냥 놔두면 안 돼요. 태어나서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지만, 오늘처럼 피가 솟구치는 것은 처음이에요.”

    “저도 그래요.”

    청화도 맞장구쳤다.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멀리 떨어진 관리를 바라봤다.

    그사이, 연등회에 참석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 입구를 계속 통과했다.

    그것을 본 설화가 검지로 관리를 가리켰다.

    “저, 저것 보세요. 공자님. 저놈이 뒷돈을 받고 있네요.”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뭐 어때?”

    “우리가 당했잖아요, 공자님.”

    “그럼 죽일까?”

    “당연히 죽여야죠.”

    “우리 설화가 아무래도 당과를 덜 먹은 것 같구나. 일단 이거 먹고 마음을 가라앉히자.”

    한빈은 짐 속에서 미리 사 놓은 당과를 꺼냈다.

    “자, 여기.”

    당과를 건네자 설화가 눈을 빛내며 못 이기는 척 손을 내밀었다.

    “저는요?”

    청화도 눈을 반짝이며 한빈에게 공손히 두 손을 내밀었다.

    한빈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짐 속에서 청화의 간식을 꺼냈다.

    한빈은 간식을 건네며 물었다.

    “너도 저자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저는 저 정도로 목숨을 잃는 것은 좀…….”

    청화가 말끝을 흐리자 한빈이 말했다.

    “그럼 너희 둘의 승부로 저자의 운명을 결정하는 게 좋겠다.”

    진득한 미소를 번쩍이는 한빈의 모습에, 당과를 먹던 설화는 살짝 뒤로 물러났다.

    살기는 아니었지만, 가끔 느끼는 끈끈함은 거미가 먹이를 잡기 위해 거미줄을 치는 느낌이었다.

    사실 설화가 이런 느낌을 갖는 것은 한빈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었다.

    한빈은 품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철전.

    한빈은 철전을 하늘 높이 날렸다.

    그냥 날린 것이 아니라 내공을 실어서 던졌는지 위로 솟구친 철전은 맹렬하게 회전했다.

    윙.

    마치 파리가 날갯짓하는 듯한 진동음을 내던 철전이 아래로 떨어지자 한빈이 재빨리 낚아챘다.

    그러고는 왼쪽 손등 위에 탁 올려놓고는 물었다.

    “설화부터 말해 봐라.”

    “뭘 말해요? 공자님.”

    “앞면인지, 뒷면인지?”

    “아……. 저는 그럼 뒷면이요.”

    “그럼 청화는 뒷면이겠구나.”

    “에, 저는 왜 기회도 없어요?”

    “너도 웬만큼 강호를 알 테니 하는 말이지만, 원래 강호는 짬밥 순이란다. 청화야.”

    “아.”

    청화가 입을 벌릴 때 한빈이 손등에 있는 철전을 보여 줬다.

    그곳에는 문양 대신 숫자 일(一)이 쓰여 있었다.

    한빈이 말했다.

    “뒷면이구나. 청화의 승리다.”

    “아, 공자님, 숫자가 앞면 아니에요?”

    설화가 고개를 갸웃하자 한빈은 진득한 웃음을 지었다.

    동전의 앞면이 숫자냐 문양이냐 하는 점은 오래전부터 강호에서 회자되던 논란이었다.

    이 논란을 잠식시킨 것은 몇 년 후 무당파에서 이루어질, 천하논검 때 있을 태극검선의 해석이었다.

    한빈은 그의 이야기를 미리 설화에게 전해 줄 터였다. 씩 웃은 한빈이 말했다.

    “숫자가 쓰여 있는 곳이 뒷면이다.”

    “그건 왜 그렇죠?”

    “설화야, 잘 생각해 봐라. 너 같으면 숫자를 새길 때 말이다. 얼굴에 새기겠느냐? 아니면 뒤통수에 새기겠느냐?”

    “동전하고 사람하고 어떻게 똑같아요?”

    “모든 사물에는 특유의 기운이 있는 법이다. 그 기운은 인간의 생명과 그리 다르지 않은 법이다.”

    “…….”

    설화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빈의 논리에는 허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말을 마친 한빈은 슬쩍 고개를 돌려 서쪽을 바라봤다.

    그것은 무당파가 있는 곳이었다.

    한빈의 말에 설화는 답하지 못했다.

    문양은 동전에 있어서 얼굴이 분명했다.

    그리고 숫자를 얼굴에 새긴다라?

    그게 사람이라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그때 한빈이 말했다.

    “저 관리는 운이 좋구나. 반만 죽게 생겼으니…….”

    “지금 반쯤 죽여 놓으시려고요?”

    “저놈을 주사위로 만들어야지.”

    “주사위라니요?”

    “도박에서 승부를 내자면 주사위가 있는 게 당연한 법. 저놈은 오늘 판의 주사위가 될 거니, 이제 미워하는 마음은 버려도 좋다.”

    “헤헤, 정말이죠?”

    설화는 약속이라도 받아 내려는 듯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하지만, 한빈은 새끼손가락을 걸어 주지는 않았다.

    누군가 한빈의 쪽으로 걸어왔기 때문이다.

    “엄마, 다른 사람은 들어가는데, 왜 우리 보고는 기다리래요?”

    “다 들어가고 나중에 들여보내 주려는 것 같으니 여기서 좀 쉬자.”

    가만 보니 그들은 연등회를 구경 온 가족이었다

    평범해 보이는 가족이었지만, 그들이 쫓겨난 이유는 불 보듯 훤했다.

    그들이 가까이 오자 한빈은 옷을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에게 다가간 한빈은 아이의 부모로 보이는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같이 들어가시죠.”

    “아, 저희는 늦게 들어가도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작게 속삭이려 하자, 한빈이 말을 끊었다.

    “기다리시려면 기다려도 좋지만, 지금 들어가고 싶다면 나를 따르시지요.”

    “네?”

    그가 고개를 갸웃하자 한빈은 더는 권하지 않고 휘적휘적 관리를 향해 걸어갔다.

    관리 앞에 간 한빈은 다시 물었다.

    “이제 보여 드려도…….”

    “허허, 성질이 왜 그렇게 급한가? 내 차를 마저 마시고 나서 부를 테니 편하게 저쪽에 앉아 있으라니까.”

    “아, 죄송합니다. 대인.”

    한빈은 조용히 포권하고 돌아섰다.

    그때 한빈의 품속에 있던 초대장이 떨어졌다.

    펄렁.

    나비처럼 펄럭이던 초대장이 관리의 앞으로 떨어졌다.

    물론 한빈의 백발백중의 수법이 작용한 것이었다.

    관리는 못마땅한 듯 초대장을 집어 들었다.

    초대장을 집어 들고 한빈을 부르려던 관리의 얼굴빛이 바뀌었다.

    “이, 이건…….”

    관리가 말을 맺지 못할 때 한빈이 앞에 나타났다.

    “왜 그러십니까, 대인?”

    “이건 황실에서 발급한 초대장이 아닙니까? 대체 누구시길래…….”

    “그냥 떠돌이 의원일 뿐입니다. 개의치 마시죠.”

    “죄, 죄송합니다. 진작 보여 주셨으면 제가 나으리를 모셨을 텐데……. 몰라뵈어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관리의 입술을 타들어 갔다.

    한빈이 보여 준 초대장의 색은 붉은색.

    아래에 찍혀 있는 인장마저도 황실의 것이 분명했다.

    의원들이 발급받은 초대장은 대부분 청색이었다.

    그런데 붉은색이라니?

    황실과 끈이 있는 의원이거나 아니면 왕족의 전속 의원이라는 이야기였다.

    관리가 방심한 것은 사실이었다.

    붉은색 초대장을 내밀 만한 의원은 모두 왕족들과 함께 들어갔을 테니 말이다.

    거기에 한빈의 복장은 이미 들어간 의원들과는 달랐다.

    동네 의원 같은 분위기를 풍겼기에, 한빈이 황실과 연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관리의 멍한 표정에 한빈은 손을 내저었다.

    “허허, 갑자기 그렇게 나오시니 제가 더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한빈의 너스레에 옆에 있던 설화는 겨우 웃음을 참았다.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를 설화도 알고 있었다.

    설화도 사실 기가 찰 따름이었다.

    보여 줄 기회도 주지 않아 놓고 진작에 보여 주질 그랬냐고 하는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한빈은 편안히 대화를 이어 갔다.

    “그럼 들어가 봐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당연히 들어가셔도 되죠.”

    “아까 보니 입장료를 내야 하는 것 같던데…….”

    한빈이 입구 쪽을 가리키며 말하자 관리는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입장료가 웬 말입니까?”

    “그래도 서운하니…….”

    말끝을 흐린 한빈은 관리의 손에 철전을 쥐여 주었다.

    “아닙니다, 됐습니다. 나으리.”

    다시 돌려주려는 관리의 손을 한빈은 꼭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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