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누구를 위한 덫인가? (1)
살막의 본거지에서 나온 한빈은 천천히 저잣거리로 향했다.
목표가 있는 권력자의 저택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그러자면 준비가 필요했다.
한빈이 처음에 간 곳은 도자기를 파는 집이었다.
한빈은 그곳에서 가장 비싼 도자기를 샀다.
동쪽의 대국에서 왔다는 청자였다.
구름과 학이 청자 속에 살아 숨 쉬듯 박혀 있는 명품이었다.
그 청자는 당문호가 준 두 개의 청자와 무늬와 크기가 똑같은 작품이었다.
한빈은 청자를 산 후 한숨을 내쉬었다.
“휴, 생각보다 비싸군.”
“그건 왜 사신 거예요?”
“에이, 설화야. 아직도 나를 몰라?”
“모르다니요?”
“세상에 공짜는 없잖아. 철전 다섯 닢.”
“싫어요.”
그들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다른 가게에 도착했다.
그들이 두 번째로 들른 곳은 비단을 파는 곳이었다.
당문호가 살막에 전한 청자를 비단 보자기에 쌌기에, 이곳에 온 것이었다.
셈을 치른 한빈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 이것도 만만치 않네.”
“아, 저 보자기면 당과가 몇 개야!”
설화도 혀를 찼다.
당문호가 준비한 것은 그만큼 비쌌다.
어떻게 보면 보자기와 청자만 해도 청자 안을 가득 채운 은자보다 더 가격이 나갈 수도 있었다.
황금색 비단 보자기 두 개와 청자 두 개를 구입한 한빈은 다시 발길을 옮겼다.
짐을 들쳐 멘 한빈은 어디론가 걸음을 옮겼다.
설화가 물었다.
“이번에는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만금 전장.”
말을 마친 한빈은 손가락으로 간판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만금 전장이라는 명칭이 선명하게 음각되어 있었다.
지역의 성마다 있는 만금 전장이지만, 칠음현의 특성상 이곳에도 들어서 있었다.
한빈은 그곳에서 금화를 찾았다.
제법 많은 금화였기에 설화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이렇게 많이 찾으셨어요?”
“놈을 잡으려면 덫이 필요한데, 그게 좀 비싸네.”
말을 마친 한빈은 새로 산 청자에 금화를 쏟아 넣었다.
팅. 팅. 팅.
청자와 금화가 묘한 소리를 만들어 내자 한빈은 진득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돈이 든 청자는 세 개가 되었다.
하나는 한빈이 들고 있고.
두 개는 설화가 들고 있었다.
모든 일은 마친 한빈과 설화는 이제 첫 번째 목표가 있는 저택으로 향해야 했다.
두 개의 짐을 들고 목적지로 향하던 설화가 한빈의 어깨를 톡톡 쳤다.
“왜 그러느냐? 설화야?”
“저도 그건 공짜로 알려 주세요.”
“공짜라니? 뭘 말하는지 모르겠다.”
“솜으로 귀를 막으면 음공을 차단할 수 있다는 거요.”
한빈은 웃음을 겨우 참았다.
계속 비밀이라고 하며 돈을 받으려 하니, 살막에서 일현에게 공짜라고 가르쳐 준 것에 대한 비밀을 자신에게도 똑같이 알려 달라는 것이었다.
설화의 의도는 간단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것을 빌미로 궁금한 것을 다 물어볼 심산이었던 것이다.
물론 한빈도 이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거짓말이지. 그걸 내가 왜 공짜로 가르쳐 줘. 다시 한번 말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어!”
“아.”
설화는 입을 딱 벌렸다.
한빈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앞서 나갔다.
물론 한빈의 말은 사실이었다.
솜으로 음공을 막을 수 있다면 강호의 수많은 고수가 그렇게 고민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한빈이 막은 것은 금상첨화의 효능을 머리로 보냈기 때문이었다.
미리 준비하고 있었기에 어떤 사술 혹은 음공으로 한빈을 옭아 놓으려 해도 실패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금상첨화라는 초식을 일현에게 솔직히 말해 줄 수도 없는 일.
미리 준비한 솜으로 간단하게 변명한 것이다.
“아마도 살막에서는 그것을 시험하기 위해 진을 빼고 있을 것이 분명하지.”
“설마 했는데, 공자님은…….”
“왜? 악당이라고?”
“아뇨, 천재세요.”
“고맙다, 설화야. 날 진심으로 알아주는 건 너밖에 없다.”
말을 마친 한빈은 조용히 앞서 나갔다.
앞서가는 한빈을 보는 설화는 눈을 끔뻑였다.
사실 천재라고 한 것은 농담이었다.
대신 설화는 가끔 한빈이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모든 면모를 다 봤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새로운 모습이 나올 때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지금처럼.
설화의 눈에는 한빈은 가면 갈수록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한참을 가던 설화는 자신이 들고 있는 청자를 바라봤다.
두 개의 청자 안에 든 것은 은화였다.
한빈이 들고 있는 청자에는 금화가 들어 있고 말이다.
설화는 왜 한빈이 금화를 들고 있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계획을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 한빈은 분명히 철전 다섯 닢을 달라고 할 것이다.
철전 다섯 닢이면 당과가 다섯 개였다.
설화는 그 아까운 걸 포기하면서까지 계획을 알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쩝.”
설화는 입맛을 다셨다.
오늘따라 단 게 당기는 것이, 꽤 힘들었던 것 같았다.
뒤쪽에서 입맛 다시는 소리를 들은 한빈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한빈이 조용히 목소리로 말했다.
“원래 무인은 배가 고파야 하는 법이다, 설화야. 모든 절실함은 배고픔에서 나오는 법이니까.”
“아, 공자님!”
설화가 투정 부리듯 한빈을 불렀다.
그렇게 그들은 관도를 걸었다.
터덜터덜 걸어가던 한빈이 멈춘 곳은 멀리 칠음현의 관청이 보이는 곳이었다.
한빈은 힐끔 뒤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저곳에서는 아마 말도 하지 말고 따라와.”
“네, 알았어요.”
설화가 고개를 숙이자 한빈은 칠음현 관청의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 * *
보통 일개 현령에게는 결정권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칠음현의 현령은 조금 달랐다.
그것은 칠음현에서 걷히는 세금과 많은 유동 인구 때문이었다.
즉, 돈이 힘이고 권력이 되어 버린 것이다.
거기에 뒤로 들어오는 뇌물은 덤이었다.
관리에게 만약에 변두리 성주와 칠음현의 현령 중 선택권을 준다면, 백이면 구십구는 칠음현의 현령을 택할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머지 하나는?
돈이 필요 없는 자일 것이다.
그만큼 칠음현의 현령에게는 들어오는 돈이 많았다.
문 앞에서 정문의 경비가 한빈에게 묻는다.
“어떻게 오셨수?”
떨떠름한 경비의 말에 한빈은 정중한 목소리로 답했다.
“현령 나으리를 뵙고 싶어 왔습니다.”
“약속은 하셨수?”
경비는 턱짓하며 한빈과 설화를 위아래로 살폈다.
한빈이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약속은 천일 전에 했습니다.”
한빈의 말에 경비병이 서책 하나를 꺼냈다.
매의 눈으로 서책을 확인한 경비병이 물었다.
“천일 전이라면 매화꽃이 필 때였겠군요.”
갑자기 목소리가 정중해졌다.
“매화꽃이 아니라 복숭아꽃이 필 때였습니다.”
“흠, 약속이 확인됐습니다. 들어가시죠.”
경비의 목소리가 확연히 달라졌다.
한빈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이제 불청객에서 뇌물을 바칠 고객이 된 것이었다.
거기에 더해 그들의 치밀함에 기가 찼다.
뇌물을 주는데도 이렇게 줄을 서야 한다는 게 황당했다.
거기에 암어까지 주고받아야 한다라?
썩을 대로 썩은 관리의 표본이었다.
암어를 주고받는 이유는 간단했다.
중앙에서 감사의 목적으로 파견하는 관리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한빈이 아무 표정 없이 기다리자, 경비병이 문을 열었다.
한빈은 앞에서 안내하는 경비를 따라 조용히 걸어갔다.
경비가 멈춘 것은 관청의 구석에 있는 별채였다.
한빈은 별채에 들어서며 눈을 크게 떴다.
평범한 별채가 아니었다.
곳곳에는 불상이 세워져 있었으며 경건한 분위기마저 돌고 있었다.
조금 더 가다 보니 그저 분위기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환하게 불을 밝힌 전각 안에는 사람 크기의 네 배는 되어 보이는 불상이 놓여 있었다.
관청 안에 조그마한 절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한빈은 씩 웃었다.
이곳의 현령이 누군지는 몰라도 잔머리가 잘 도는 사람임이 분명했다.
저건 뇌물을 시주로 받겠다는 의미였다.
불당의 앞에 선 경비는 한빈을 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가시지요. 나오실 때는 혼자 오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불당에 시주를 전하고 나면 저희가 알아서 나가겠습니다.”
“네, 그럼 시주 잘하시고 나오십시오.”
경비는 한빈을 향해 포권했다.
처음과는 다른 정중한 태도였다.
역시 고객을 대하는 예우가 남달랐다.
한빈은 황금빛 보자기를 들고 조용히 불당으로 들어갔다.
한빈은 불당으로 가서 조용히 아무 말 없이 황금색 보자기를 내려놨다.
그리고 밀랍으로 봉인된 서찰 하나를 내려놨다.
누군가가 힐끔 보자기와 서찰을 바라봤다.
관복은 입지 않았지만, 얼마나 뻣뻣한지 수염까지 흐느적거리지 않고 각이 잡혀 있었다.
한빈은 직감적으로 그가 현령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빈이 그에게 전할 말은 없었다.
한빈은 불상에 절을 한 후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뒤에서 현령이 나지막이 말했다.
“당 대인에게 잘 받았다고 전해 주게.”
한빈이 뒤돌아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네, 전하겠습니다.”
한빈은 불당을 빠져나갔다.
한빈이 불당을 빠져나오자 설화가 물었다.
“일은 다 끝나신 거예요?”
“아니, 아직은 끝나지 않았어.”
“네, 안 끝나다니요? 지금 전해 드렸잖아요.”
“잠시만.”
말을 멈춘 한빈은 손가락으로 숫자를 헤아렸다.
그러고는 씩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설화야, 이리 줘 봐.”
“이거요?”
설화는 은화로 가득 찬 청자가 담긴 보따리를 건넸다.
보따리를 받은 한빈은 재빨리 다시 불당 안으로 들어갔다.
휙.
바람처럼 불당 안으로 뛰어 들어간 한빈은 조용히 다시 나왔다.
다시 설화 앞에서 한빈이 말했다.
“이제 끝났다, 가자.”
한빈은 오른손을 들어 관아의 입구를 가리켰다. 한빈의 나머지 손에는 청자를 싼 보자기가 있었다.
하나를 들고 들어갔다가, 하나를 다시 들고 나왔다.
설화는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꾹 참기로 했다.
철전 다섯 닢이 아까웠기 때문이다.
“네, 공자님.”
설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자리를 떠났다.
한 열 걸음 정도 갔을 때였다.
뒤쪽에서 그릇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와장창!
그 소리에 설화가 뒤를 돌아보자 한빈이 말했다.
“뒤돌아보지 말고 빨리 가자.”
“대체 저건 무슨 일이에요?”
“뭐긴 뭐야, 청자 깨지는 소리지. 아, 저 청자 비싼 건데……. 역시 돈 많은 현령이라 달라.”
“돈 많은 건 알겠는데 왜 비싼 청자를 깨요?”
설화가 고개를 갸웃하자 한빈이 검지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건 비밀이야. 나중에 이야기해 줄게.”
그때였다.
불당 쪽에서 고함이 울려 퍼졌다.
“네 이놈!”
그 목소리에 한빈의 입꼬리는 더욱 빨리 올라갔다.
그 미소에 설화는 철전 다섯 닢을 주고서라도 물어보기로 했다.
“저 철전 다섯 닢 드릴 테니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말씀해 주세요.”
“음, 큰 결심을 했구나.”
“뜸 들이지 말고 말해 주세요.”
“내가 처음에 가지고 간 청자에는 금화가 담겨 있었지?”
“네,”
설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현령은 내가 나가자마자 항아리의 내용물을 확인했을 거야.”
여기까지는 설화도 이해했다. 하지만, 현령의 분노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다.
설화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요?”
“거기에는 당연히 금화가 들어 있었겠지.”
“네.”
“나는 다시 들어가서 이렇게 말했다.”
“뭐라고 하셨는데요?”
“항아리가 바뀌었다고 했지.”
“헉.”
설화가 헛숨을 들이켰다.
뭔가 위험한 장면들이 머릿속에 그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한빈은 설화의 표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설명을 이었다.
“뇌물을 받을 만한 인물은 딱 둘. 아마 현령은 금화가 들어간 항아리는 다른 이에게 간다고 생각하겠지.”
“그래도 어쨌든 받은 거잖아요.”
“아마 처지를 바꿔서 생각해 보면 쉬울 거야. 누군가가 흑천과 살막에 동시에 같은 의뢰를 했어.”
“그렇다 치고요.”
“그런데 흑천에는 황금 열 냥을 대금으로 줬다고 가정해 보자.”
“흑천에서는 왕거니를 물었다고 좋아하겠죠.”
“그런데 살막에 의뢰한 내용을 알아보니 같은 의뢰인데 황금 백 냥을 준거지. 흑천의 주인은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할 것 같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