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화. 독사의 독니는 물린 뒤에야 알 수 있다 (7)
픽.
음사 하나가 그녀의 어깨를 관통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자신이 쏘아 냈던 음공이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털썩.
그녀는 무릎을 꿇었다.
월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의 앞에는 이상한 사람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농락했던 상인은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붉은 무복을 펄럭이며 웃고 있는 사내가 있었다.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적룡…….”
하지만, 그녀는 말을 맺지 못했다.
힘을 다 소진한 채 의식을 잃었다.
한빈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다가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용안(龍眼)으로 구결을 확인합니다.]
[지급(池級) 구결 의(衣)를 획득하셨습니다]
[지급(地級) - 만(滿), 금(錦), 의(衣)]
서서히 초식이 완성되어 가려고 했다.
아직은 어떤 초식이 나올지 모르지만, 지급의 초식이라면 자신을 조금 더 강하게 만들어 줄 것이 분명했다.
그때 뒤쪽에서 엷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끄응.”
한빈은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설화가 땀을 송골송골 흘리고 있었다.
소매로 땀을 닦아 낸 설화는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아까는 대화로 푸신다면서요!”
“작전이 바뀌었다.”
한빈이 씩 웃자 설화가 말했다.
“대신 옷 사 주셔야 해요.”
“그래, 새 옷에 당과 예약!”
“알았어요. 저는 피곤해서 쉬고 있을게요.”
설화는 제자리에 털썩 앉아 살막의 고수들을 바라봤다.
설화와 눈이 마주친 일현은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혈과 마혈을 제압당했기 때문이다.
일현이 이렇게 된 것은 설화에게 제압당해서가 아니었다.
한빈이 그들을 가로지르면서 아혈과 마혈을 제압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 기세 좋게 설화가 치고 들어왔다.
하지만, 설화는 일현과 무리에게 아무런 해도 가하지 않았다.
도리어 음사의 파편이 그들을 덮쳤을 때, 설화가 막아 주었다.
일현은 설화의 무시무시한 한 수를 두 눈으로 봤다.
깨진 항아리가 파편이 되어 날아오듯 음사의 파편이 그들의 몸을 덮치려고 할 때, 설화는 단검 하나에 모든 진기를 불어 넣어 위험을 날려 버렸다.
그것은 파혼검의 구성에 해당하는 초식.
하지만, 일현이 설화의 초식을 알아볼 리 없었다.
그저 무시무시한 초식이라는 것 이외에는 알 도리가 없었다.
* * *
한바탕 폭풍우가 지나간 칠음현 살막 지부.
한빈은 정자에 앉아서 조용히 경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설화는 어디서 구했는지 당과 꼬치를 들고 있고 말이다.
그들의 앞에는 면사를 벗은 월영이 앉아 있었다.
일부러 벗으려 한 것은 아니고, 면사가 다 찢겨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 옆에는 일현이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 눈빛에는 호기심도 생기도 없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한빈이었다.
“왜 전 무림을 적으로 돌릴 의뢰를 받았나요?”
“…….”
월영은 눈을 크게 떴다.
이해를 못 하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일현에게 눈짓한다.
일현도 고개를 흔들며 모른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 모습을 본 한빈이 말을 이었다.
“제가 누군지 아십니까?”
“…….”
그녀는 입을 열지 않았다. 가슴 한편에 담아 둔 이름이 있기는 했지만, 황당해서 내뱉지는 못한 것이다.
한빈이 웃으며 말했다.
“저는 사파와도 정파와도 친구입니다.”
“그렇다면 대협의 정체는 진짜, 적룡대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월영이 다시 말끝을 흐리자 한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은 따로 있지만, 누군가는 그렇게 부르더군요.”
“헉, 진짜로 살아 계셨군요.”
말을 마친 월영이 한빈에게 달려들려 했다.
순간 설화가 당과를 꼬치째 들고 그녀를 막았다.
“진정하세요, 아주머니.”
“어, 그러니까…….”
월영도 그제야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자리에 앉아 심호흡했다.
하지만, 한빈을 바라보는 시선은 거두지 않았다.
한빈도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의 반응이 의외였기 때문이다.
사파와 관계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정파와의 인맥도 일부 드러내며 협박으로 살막의 협조를 얻어 내는 것이 한빈의 계획이었다.
살막을 죽일 수는 있어도 협조를 얻어 내는 방법은 이 길이 유일하다고 결론을 내렸었고.
그런데 얻어맞고도 이렇게 호의적이라니?
한빈이 고개를 갸웃하자, 월영이 말을 이었다.
“뵙고 싶었습니다. 저도 대협처럼 되는 게 꿈이에요.”
“흠.”
한빈은 자신도 모르게 헛기침했다.
옆에 있던 일현이라는 자는 넋이 나간 듯 입을 벌리고 있었다.
“제가 대협의 신분을 미리 알았다면 맨발로 마중 나갔을 겁니다.”
“제가 말했으면 믿었겠습니까?”
“…….”
“제 초식을 보고 확신하셨겠죠?”
“그, 그건 맞아요.”
“제가 누구든 확인 과정은 필요했겠죠? 살막은 그리 만만한 조직은 아니니까요.”
“죄, 죄송합니다.”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다 털어놓으시죠. 그 후 제가 부탁 하나를 드리겠습니다.”
“그럼 염치 불구하고…….”
말끝을 흐린 월영은 일현에게 뭔가를 속삭였다.
화들짝 놀란 일현은 재빨리 어디론가 달려갔다.
일현이 내온 것은 보따리였다.
그것을 본 설화가 나지막이 말했다.
“어? 저거 내 역할인데 설마…….”
설화는 입을 크게 벌렸다.
설마 했는데 그곳에서 나온 것은 먹과 붓이었다.
이게 무슨 일인지 황당해진 설화는 한빈을 바라봤다.
“어떻게 된 거예요?”
“두고 보는 게 좋겠구나. 설화야.”
둘이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 월영이 탁자 위에 서책 하나를 올려놨다.
그러고는 먹물에 붓을 담그더니 한빈에게 건넸다.
서책에는 붉은 글씨로 ‘적룡출세’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한빈은 이 상황이 낯설었다.
설화에게 붓을 받아 본 적은 있어도 타인에게 이렇게 붓은 건네받은 적은 없었다.
붓을 받은 한빈이 고개를 갸웃하자 월영이 말을 이었다.
“서책에 서명 하나만 부탁드릴게요, 대협.”
“…….”
“이 책을 대대로 간직할 것이며 저는 살막의 반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월영이 다소곳이 포권하자 옆에서 지켜보던 일현이 헛숨을 토했다.
“헉, 부막주님!”
어찌나 놀랐는데 피를 토해도 이상하지 않을 표정으로 이마를 만졌다.
그들의 난데없는 행동에 한빈은 피식 웃으며 서책에 서명했다.
사-삭.
서명을 한 한빈이 말을 이었다.
“살막의 반은 필요 없고, 부탁 하나면 됩니다.”
“네?”
“다시 말하지만, 부탁 하나면 됩니다.”
“역시 저희 살막 같은 살수 조직은 눈에도 차지 않으시겠죠?”
“반은 필요 없고, 부막주님이 앞으로 도와주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니까……. 저를 살막보다 더 높이 평가한다는 말씀이시죠?”
“…….”
한빈은 조용히 먼 산을 바라봤다.
과연 이 여인의 머릿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한빈은 재빨리 화제를 돌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당문호에게 의뢰를 받으셨죠?”
“네, 맞아요. 의뢰는 두 가지였어요. 첫 번째는 당기명이라는 사천당문의 직계를 위협하는 척해 달라는 것과 다른 한 가지는 칠음현에 있는 두 권력자에게 청탁을 해 달라는 것이에요. 첫 번째는 끝났고 두 번째는 오늘 그 두 권력자를 방문하기로 했어요.”
운만 뗐는데도 월영은 뒷이야기까지 모두 털어놓았다.
그녀의 설명에 한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문호가 판 함정은 생각보다 치밀했다.
강호가 아닌 관부를 적으로 만들려는 속셈인 것 같았다.
구체적인 계획은 몰라도 살막에 청부한 내용을 아는 한 방비를 할 수 있었다.
설명을 다 듣고 난 한빈이 말했다.
“살막에 의뢰한 일 말입니다.”
“네, 말씀하시지요.”
“제가 하겠습니다. 가능하겠습니까?”
“물론이지요. 당문호의 목을 따라고 하시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제게 상세하게 의뢰만 설명해 주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월영은 자세히 설명했다.
전달한 물건은 이미 맡아 놓은 상태. 그리고 두 명의 권력자에 대한 신상 명세와 그들의 집에 들어갈 수 있는 암어까지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다 듣고 난 한빈이 말했다.
“진짜 무서운 독사는 독니를 보이지 않는 법이지요. 그러니 의뢰를 받을 때 조심하십시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살막이 독사라는…….”
“당문호가 독사라는 말이었습니다. 만약에 이 의뢰를 성공하셨다면 저와 적이 되었을 테고 그 이야기는 사파 전체와 적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거기에 사천당가를 포함한 정파와도 적이 되겠지요. 당문호의 의뢰는 돈이 아니라 독을 비용으로 지불한 것이지요.”
“후, 그럴 수도…….”
월영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빈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생각한 것이다.
한빈은 물건까지 건네받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월영이 한빈은 조심스럽게 불렀다.
“대협,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네, 물어보시지요.”
“마지막 초식은 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제가 쏘아 낸 음사를 엉키게 만들어 폭사시킨 그 초식 말입니다.”
“궁금하십니까?”
“네, 궁금합니다.”
“공짜로는 안 되고 다음 부탁 하나는 맡겨 두는 것으로 갈음하지요. 괜찮겠습니까?”
“네, 좋아요.”
“표면이 매끈한 은구슬은 음사를 반사할 수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저 아래에 보시면 은구슬이 떨어져 있을 겁니다. 그게 세 번째 부탁에 대한 비용입니다. 이러면 세 번째 부탁까지 맡겨 놓은 게 되겠군요.”
한빈의 말은 사실이었다.
한빈이 마지막에 던진 암기는 은구슬이었다.
월영이 쏘아 내던 음사를 파훼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음사는 검기보다는 약하기에 은처럼 매끈하고 단단한 물질에는 반사되는 특성이 있었다.
즉, 동그란 은구슬에 닿는다면 무작위로 굴절이 되어 통제가 안 된다는 것이다.
한빈은 이것을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전생에 월영이 마교의 검객과 싸우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마교의 검객과 싸우다 음공이 파훼당하자 그녀는 치명상을 입게 된다.
한빈은 그녀가 있다는 것을 도살장 앞에서 거래하는 모습을 보고 알았다.
그들이 고개를 싸는 종이에는 묘한 암어들이 적혀 있었다.
그 암어를 보호하기 위해 기름종이에 고기를 싸고 그 위에 한지를 다시 씌우기까지 했으나, 한빈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살막에서 정보를 담당하는 것은 월영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한빈이었다.
당연히 이곳을 총괄하는 담당이 그녀였다고 예상하고 온 것이다.
한빈이 천천히 자리를 떠나는데 이번에는 일현이 따라왔다.
마치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쫓아오는 일현의 모습에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따라오시는 거죠?”
“저도 궁금한 게 있어서 말입니다, 대협.”
일현이 머리가 땅에 닿도록 포권했다.
“그게 뭐죠?”
“그게 말입니다. 저는 돈도 없고 배경도 없고…….”
일현은 신세 한탄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한빈은 그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한빈이 원하는 대가를 줄 능력이 없다는 것을 미리 밝히기 위해서였다.
슬쩍 해를 바라본 한빈이 답했다.
“시간 없으니 그냥 말씀하시지요. 답해 드릴 수 있는 거면 대가 없이 답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협. 제가 물어볼 것은 간단합니다. 처음에 의자에 앉으셨을 때 말입니다. 거기에는 강력한 진법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협께서는 어떻게 음공의 통제에서 벗어나셨습니까?.”
그의 표정을 심각했지만, 한빈은 빙긋 웃었다.
그가 물어보는 의도는 간단했다.
모시는 상관의 비기가 파훼된 것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어서였다.
한빈은 한참을 말없이 일현을 바라봤다.
그러더니 대견하다는 표정을 하며 귀에서 뭔가를 빼냈다.
양쪽 귀에서 빼낸 것은 솜으로 된 귀마개였다.
한빈은 그것을 일현에게 전했다.
“뭐, 이치는 간단하니 연구해 보시죠.”
“아.”
일현은 입을 떡 벌리며 한빈을 바라봤다.
그는 한빈이 생각보다 더 위대한 영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