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275화 (275/621)

275화. 독사의 독니는 물린 뒤에야 알 수 있다 (6)

“대체! 어떻게?”

놀란 일현이 뒷걸음쳤다.

목소리의 근원지는 상인 복장을 한 한빈이었다.

몇 걸음 물러난 일현은 칼을 고쳐 잡고 한빈을 바라봤다.

일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한빈의 입꼬리는 난을 그려 놓은 것처럼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음공에서 벗어났다고 보기 힘든 표정이었다.

부막주 월영의 음공이 깨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힐끔 고개를 돌린 일현은 부막주 월영의 손을 바라봤다.

띵. 띠. 딩.

부막주 월영의 칠현금 소리는 아직 끊이지 않고 있었다. 부막주 월영이 저렇게 태연하게 연주하고 있다는 것은 상대가 칠현금의 올가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말이었다.

살막의 부막주 월영은 지금 한빈의 외침도, 수하들의 당황도 머릿속에 없었다.

무아지경 속에서 칠현금을 연주하고 싶었다.

그녀의 꿈은 살막의 수장이 아닌 평범한 예인(藝人)이었다.

그것을 박살 낸 것은 다름 아닌 무림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싸움 속에 예인이 말려든다면?

그때 월영은 부모를 잃었다.

울고 있던 그녀를 거둬 준 것이 바로 살막의 막주였다. 살막의 막주에게 거둬져 살수로 다시 태어난 그녀였지만, 검보다는 칠현금을 가까이했다.

지금처럼 무아지경에서 연주를 하고 있던 달밤이었다.

정체불명의 노파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날이 밝을 때까지 그 노파는 그녀의 연주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때, 노파는 눈을 감은 채 숨을 쉬지 않는 상태였다.

그녀의 앞에 악보 하나를 내려놓은 채 말이다.

숨도 쉬지 않는 노파를 본 그녀는 다급하게 환단을 가져왔지만, 노파는 사라진 후였다.

악보만 남겨 둔 채 말이다.

그 악보의 이름은 월인천음지공(月人天音之功).

그녀는 시간이 날 때마다 이 악보를 연주했다.

처음에는 그 악보가 무공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저 묵묵히 그 악보를 연주하다 보니 어느 날 음을 구체화하는 경지인 음사지경(音絲之境)에 오르게 된 것이었다.

그 후 그녀의 칠현금 연주에 목이 떨어져 나간 악인은 손이 몇 개라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녀가 받은 의뢰는 딱 두 종류였다.

사람의 목숨과 관계가 없거나 해치워야 할 사람이 악인인 경우였다.

뭐, 막주도 화경의 경지에 오른 월영을 말릴 수 없었다.

그런데 요즘 그녀에게는 칠현금 말고 또 다른 취미가 생겼다.

계기는 칠음현에서는 ‘적룡출세’라 불리는 서책이었다.

누가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야기꾼이라면 한 권씩 들고 다니는 책이었다.

강호에는 영웅이 없고 죽일 놈만 있었다고 생각했던 그녀였다.

하나 비록 이야기 속 주인공이지만, 그녀의 앞에 적룡대협이라는 영웅이 나타난 것이다.

책의 내용에 의하면 사파라는 증거도.

정파라는 증거도 없다.

자신의 조직도 아닌데 목숨을 걸고 마교의 고수를 향해 검을 날리는 기세는 잊을 수 없었다.

사실 그동안, 강호에 존재 가치가 있는 인물은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녀가 인정할 수 있는 인물이 나타난 것이다.

물론 그녀 역시 처음에는 이야기 속 인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들리는 목격자의 증언에, 그를 실제 인물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그녀는 인생의 목표를 바꿨다.

이야기책 한 권 때문에 인생의 목표가 달라진 것이다.

쓰레기들을 해치우는 살수에서, 약자를 구하는 영웅으로 말이다.

영웅이 되는 법은 간단했다.

먼저 문파를 밝히고.

다음으로는 적룡대협이라는 영웅을 배출해 낸 문파의 제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부막주 월영은 이야기 속에 나오는 초식을 다시 구성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취미 생활에 방해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계속 쏟아지는 의뢰였다.

그녀는 자신의 수하인 일현에게 의뢰를 받지 말라 했다.

의뢰를 받지 않아도 이곳 칠음현 지부는 정보의 요충지 역할로도 충분했다.

그런데 일현이 덜컥 의뢰를 받아 버린 것이다.

그것도 제일 증오하는 관리의 의뢰를 말이다.

부모님이 죽었을 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관아는 원수보다도 미웠다.

그녀의 짜증이 한계치까지 쌓인 순간, 관리가 시답지 않은 의뢰를 다시 들고 온 것이었다.

그가 가고 나더니 이제는 재수 없는 장사치까지 약속도 없이 찾아왔다.

그런데 그 장사치의 신분이 수상하다는 보고를 받자 그녀의 이성이 끊긴 것이다.

팅. 팅.

그녀의 손이 더욱 빨라졌다.

그녀의 소리는 누군가에게는 독이지만, 일현에게는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주는 보약이었다.

부막주 월영의 칠현금에는 두 가지의 비기가 숨어 있었다.

하나는 지금처럼 상대의 상단전을 공격해서 섭혼술에 가까운 올가미를 씌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음공을 검기로 유형화하여 상대를 공격하는 것이다.

검객으로 치면 검기상인의 경지를 이루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화경에 막 발을 들여놓은 부막주 월영의 음공을 깬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목소리는 과연 무엇일까?

일현은 조심스럽게 잠꼬대라고 결론을 내렸다.

음공에 정신을 잠식당하고도 잠꼬대를 하는 이를 가끔 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일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 착각했군.”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원래 계획대로 간다. 나는 저 어린아이를……. 너희는 저 상인 놈의 가죽을 벗긴다.”

일현이 막 설화에게 한 발 내디뎠을 때였다.

번쩍.

정신을 잃었던 한빈이 눈을 떴다.

자리에서 일어난 한빈은 사람 좋은 얼굴로 몸을 풀었다.

뚝. 뚝.

손가락 마디에서 소리를 낸 한빈은 일현을 바라봤다.

“거기서 뭐 해?”

“대, 대체 어떻게 깨어난 것이냐?”

“그건 영업 비밀이고. 그나저나 너희는 왜 소를 안 잡고 여기서 얼쩡거리는 거지?”

말을 마친 한빈은 설화의 상태를 살폈다.

표정을 보니 설화는 아직 꿈속에서 헤매는 듯 보였다.

그때 일현이 외쳤다.

“허, 참 불쌍한 놈이로고! 그냥 잠들어 있었다면 살가죽이 벗겨지는 고통을 없었을 것을……. 참 안타깝도다!”

“…….”

한빈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못 들었다는 듯, 설화의 정수리에 손을 올려놓고 기운을 불어 넣었다.

그때 일현이 점점 다가왔다.

터벅터벅.

하지만, 한빈은 설화에게 올려놨던 손을 떼지 않았다.

칠현금을 연주하던 부막주 월영마저도 한빈이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연주를 멈추고 칠현금을 어깨에 걸쳐 메고는 천천히 걸어왔다.

일현은 부막주 월영이 올 때까지 기다리며 한빈을 탐색했다.

이제 막 합공이 시작되려는 찰나.

한빈이 외쳤다.

“부막주 양반은 나랑 얘기 좀 하고 나머지는 이 아이와 이야기하도록!”

말을 마친 한빈은 재빨리 품에서 단검을 빼 들었다.

한빈이 앞으로 치고 나가자 뒤에서 정신을 차린 설화가 눈매를 좁히며 숨겨 놓은 우혈랑검을 꺼냈다.

그때였다.

한빈이 외쳤다.

“이놈!”

짧은 외침이었지만, 살막의 무사들이 움찔했다.

간단한 외침이 아니었다.

용린검법의 초식 중 허장성세의 효용이 담긴 사자후였다.

살막의 살수들을 가로지르는 한빈의 손이 표홀히 움직였다.

쉭쉭!

그들을 지나친 한빈이 백색 면사로 얼굴을 가린 부막주의 앞에 섰다.

“부막주 월영, 맞지?”

“…….”

월영은 허장성세의 위엄에 잠시 당황했지만,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바로 정신을 차렸다.

다만, 잠시 위축되었을 때 공격 대신 대화를 택한 한빈이 이상할 뿐이었다.

한빈은 그녀의 표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두 가지 선택권이 있다. 한 대 맞고 고개를 숙이든지, 아니면 죽도록 맞고 고개를 숙이든지.”

“호호, 나를 웃게 만든 놈은 요즘 들어 네가 처음이다. 막주님도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거늘…….”

그때였다.

한빈이 단검으로 그녀의 어깨를 그었다.

정확히는 그녀의 어깨에 걸친 칠현금의 줄을 베려는 것이었다.

월영은 재빨리 칠현금을 뒤집었다.

깡!

한빈의 단검과 닿은 칠현금이 굉음을 냈다.

한빈은 눈매를 좁혔다.

지금 부딪친 느낌으로 짐작하건대, 칠현금의 뒤판은 현철로 되어 있었다.

월영은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말도 안 되는 속도로 뒤로 물러나며, 월영은 칠현금을 튕겼다.

딩!

그 소리에 한빈은 재빨리 오른쪽으로 반걸음 몸을 틀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한빈이 다가오면 더욱 빠른 속도로 물러나며 음공을 쏘아 냈다.

딩! 딩!

검을 휘두르는 것과 칠현금의 줄을 튕기는 것.

둘 중 어떤 동작이 빠를까?

물론 칠현금의 줄을 튕기는 것이었다.

월영은 지금 속도에서 한빈을 압도하려 한 것이다.

사실 지금 음공은 한빈에게는 상극의 무공이었다.

쾌검을 위주로 하는 한빈에게, 그보다 더 빠른 연주로 쏘아 내는 음공은 파훼하기 힘들었다.

그녀가 쏘아 내는 음공은 마치 칠현금과 연결된 듯, 푸른 줄이 되어 나아갔다.

그것은 음이 실의 형상이 된 음사(音絲)의 형태였다.

하지만, 한빈의 입가에는 묘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딩! 딩!

월영이 줄을 튕기는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한빈이 피할 곳조차 없이 빼곡히 음사를 쏘아 내었다.

그녀가 만든 음사는 마치 거미줄처럼 여기저기로 엉켜 있었다.

그때였다.

빠른 속도로 음사를 피해 나가던 한빈이 갑자기 자리에 멈췄다.

그러고는 천천히 월영의 곁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월영이 눈매를 좁혔다.

자신이 펼치는 칠현금 연주에 이렇게 대응하는 자는 없었다.

칠현금에서 쏘아 내는 음사를 검으로 쳐 낸다고?

그것도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앞에 있는 상인 복장의 사내는 점점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팅. 팅.

월영은 조금 더 속도를 높였다.

자신의 음사가 사내의 외투를 찢고 있었다.

비단옷 사이로 핏물이 비친다.

그런데도 사내는 계속 다가오고 있다.

‘이런 무식한!’

월영은 속으로 탄성을 토하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저런 기세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대결 중이라 기억을 떠올릴 틈이 없었다.

점점 거리가 좁혀지자,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자신이 쏘아 내는 음사의 기운이 다시 되돌아왔던 것.

이화접목?

이것은 있을 수 없었다.

병장기를 맞대고 싸울 경우 다른 이의 힘을 이용해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이것은 무형지기를 쏘아 내는 음공이었다.

월인천음지공의 음공을 돌려보내는 수법이라?

월영은 한빈의 수법이 자승자박의 초식이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그것은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는 초식이니까.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일어나자 월영은 더욱 이를 악물었다.

음사를 쏟아 내는 속도를 더욱 높인 것이다.

그때, 갑자기 상대의 단검이 간격 안으로 파고 들어왔다.

획.

뭐지?

의문도 잠시, 계속 들어오는 단검의 예기.

그런데 그 단검이 그녀의 옆구리를 썰고 지나갔다.

월영의 완벽한 방어를 뚫은 것이다.

그녀는 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그냥 깨문 것이 아니라 자신의 피를 매개로 속도를 높이기 위함이었다.

그녀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자 한빈은 눈을 크게 떴다.

그녀에게서 다름 아닌 진청색 점이 보였기 때문이다.

한빈의 표정에 월영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한빈이 당황했다고 착각한 것이었다.

그때 한빈이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흩뿌렸다.

단순히 뿌린 것이 아니라 ‘백발백중’의 초식을 담아 쏘아 냈다.

쫘악!

순간 월영은 모든 진기를 다 모아 한빈을 향해 쏟아 냈다.

날아오는 암기를 부수는 동시에, 한빈마저 잘게 다지려는 듯 음흉한 기세로 날아왔다.

찡! 찡!

천잠사로 만든 칠현금의 줄이 끊어질 듯한 소리를 내며 쏟아졌다. 그러나 그 음사의 세례에도 한빈은 웃었다.

미소를 머금은 한빈은 팔짱을 끼고 상대를 바라봤다.

순간 한빈을 향해 모든 진기를 쏟아 음사를 쏘아 내던 월영은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거미줄처럼 쏘아 낸 음사가 헝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팅. 팅. 팅.

음사가 굴절되며 얼기설기 엉키더니 급기야는 자신을 향해 날아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