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 독사의 독니는 물린 뒤에야 알 수 있다 (5)
살막이라?
눈을 가늘게 뜨고 보니 당과의 꼬치의 위쪽에는 위치까지 적혀 있었다.
설화가 굳이 꼬치에 살막이라는 단어를 적어 놓은 이유는 간단했다.
은밀하게 접근해야 할지 아니면 대놓고 접근해야 할지에 대한 선택을 한빈에게 맡긴 것이었다.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당과를 쓱 빼먹은 뒤 꼬치를 들고 휘적휘적 다리를 지나왔다.
다리 끝에 선 한빈은 뭔가 잊었다는 듯 설화에게 은전을 던졌다.
툭!
설화가 뒤따라오다가 은전을 받고는 활짝 웃었다.
그것도 잠시 설화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 * *
한빈이 도착한 곳은 다리에서 십 리 정도 떨어진 도살장이었다.
돌담으로 쌓은 것이 아니라 대충 대나무로 울타리를 쳐 놓고 있었다.
전면에서 보이는 울타리는 이백 걸음 정도.
그리 작은 규모의 도살장은 아니었다.
도살장이라?
살막에 어울리는 위장 장소였다.
피 냄새가 나도 이상하지 않고 물건을 보관할 수 있는 창고를 크게 지어 놔도 이상하지 않다.
거기에 거리도 이상적이었다.
외곽에 있지만, 칠음현의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곳.
한빈은 미리 준비한 의복을 꺼내 갈아입었다.
상인 복장으로 갈아입은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짐을 어깨에 걸쳐 멨다.
터벅터벅.
한빈은 도살장으로 걸어갔다.
도살장 앞에는 제법 많은 사람으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앞에는 갓 도축한 고기들이 진열되어 있었으며 그것을 구매하기 위한 상인과 마을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아무래도 신선한 고기가 나오는 시간에 맞춰 온 것 같았다.
한빈은 그들의 거래를 팔짱을 끼고 바라봤다.
그들은 바쁘게 고개를 썰고 포장하고를 반복했다.
누가 봐도 보통 백정이고 장사꾼이었다.
한참을 지켜보던 한빈은 입꼬리를 올렸다.
“생각보다 왕거니를 건질 수도 있겠네.”
하지만, 한빈의 말을 들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차 두어 잔 마실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다.
방문자들이 사라지자 그들은 진열해 놨던 고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빈은 팔짱을 끼고 천천히 그들에게 걸어갔다.
하지만, 그들은 한빈을 바라보지 않았다.
정리하느라 여유가 없다는 듯, 한빈에는 눈길을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설화의 쪽지가 없었다면 한빈도 이곳이 평범한 도살장이라 생각했을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살기가 미세하게 흘러나오기는 해도 그것은 백정들이 가축을 잡고 나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 정도로 잘 갈무리된 이들이라면 둘 중 하나였다.
잘 훈련된 살수이거나, 진짜 일반인들이거나 말이다.
물론 후자일 경우는 없었다.
설화가 동종 업계의 사람을 몰라볼 리 없으니까.
그때 설화가 나타났다.
평소의 백색 옷이 아닌 비단옷을 입고 나타났다.
물론 한빈의 지시 때문이었다.
설화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아직도 안 들어가셨어요?”
“조용히 대화하고 싶어서 기다렸지.”
“왜 조용히 대화해요? 얘네들은 말로 해서 듣지 않아요.”
설화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살막과 흑천은 예전부터 앙숙지간이었다.
그런 이유로 설화는 살막에 대해서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원래 경쟁 관계라는 것이 그렇지 않은가?
살수의 세계도 최고만이 살아남는 곳이었다.
한빈은 사람 좋은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에이, 사람이 어떻게 주먹부터 써? 일단은 대화부터 해 봐야지.”
설화의 눈이 커졌다.
뭐, 사실관계를 따지자면 일단 주먹부터 쓰지는 않았다. 주먹이 아닌 검부터 들이밀었으니.
문제는 한빈이 마치 평화를 신봉하는 사람처럼 말한다는 것이었다.
설화는 황당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혹시 제가 적어 놓은 거 잘못 보신 거 아니에요? 저는 분명히…….”
설화는 말끝을 흐렸다.
살막이라는 단어는 이 근처에서 말하기에는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다.
그 모습에 한빈이 말했다.
“일단 대화부터 할 것이니, 절대 경거망동해서는 안 된다.”
“어쨌든 알았어요.”
“그래, 대신에 신호하면 실력을 발휘도 된다.”
“아, 뭔가 있으신 거죠? 그러고 보니 이렇게 오라고 하셔서 지필묵도 준비 안 했는데…….”
“지필묵이라면 여기 준비했다. 뭐 오늘은 필요 없을 것 같지만 말이야.”
한빈이 어깨에 멘 짐을 가리켰다.
한빈의 복장이 바뀐 것을 그제야 눈치챈 설화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런데 이렇게 차려입으시니 진짜 부잣집 자제분 같으시네요, 헤헤.”
한빈의 복장에 설화가 웃었다.
한빈은 어이없다는 듯 설화를 바라봤다.
“하북팽가면 부잣집 맞거든, 설화야.”
“아, 그러네요.”
설화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하늘을 바라봤다.
설화는 가끔 한빈이 하북팽가의 막내 공자라는 것을 잊을 때가 많았다.
그 대화를 끝으로 한빈은 조용히 도살장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들은 한빈을 힐끔 보더니 관심 없다는 듯, 하던 일을 마저 했다.
한빈은 울타리 사이의 입구로 들어갔다.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졌다.
묘하게 뒤틀린 기척이 여기저기서 느껴졌다.
여기서 돌아본다면 굳이 상인 복장으로 변장할 필요가 없었다.
일반 상인이 그들의 시선을 눈치챌 리 없을 테니까.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주변을 살폈다.
칼을 가는 백정도 있었고 묻은 피를 물로 청소하는 이도 있었다.
모두 자신의 일에 열중하고 있다.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도살장의 깊은 곳에서 칠현금 소리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띵, 띠디딩!
한빈이 도살장의 깊은 곳이 시선을 멈추자 누군가가 한빈의 곁으로 다가왔다.
한빈이 모른 척 주변을 둘러보며 칠현금 소리를 감상하는 척했다.
뒤쪽으로 다가온 사람이 헛기침으로 말문을 열었다.
“험. 보아하니 서생 같은데, 피 냄새 풍기는 도살장에 무슨 일이십니까?”
“아, 깜짝이야.”
한빈이 놀란 듯 뒤를 돌아봤다.
“놀란 건 저희입죠. 보통 사람이 예까지 들어오는 건 드문 일이라서요.”
사내가 한빈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한빈도 사내의 행색을 살폈다.
정돈되지 않은 긴 머리를 끝으로 질끈 동여매고 있었지만, 복장은 다른 이들보다 단정했다.
한빈은 그의 머리와 복장을 유심히 본 뒤 웃으며 답했다.
“도살장에 온 이유야 뭐 다른 게 있겠습니까? 좋은 고기를 찾기 위해서죠.”
“소문을 듣고 오셨군요?”
“네, 칠음현에서 가장 유명한 게 칠현금 소리이고 그다음이 고기라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남에서부터 여기까지 찾아왔습니다.”
“허허, 하남에서부터 왔다면…….”
사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한빈은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하남성에서부터 칠음현까지의 거리는 고기를 운반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웬만한 날씨에는 다 상해 버릴 테니 말이다.
한빈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고기를 육포로 가공해서 팔 예정입니다. 그러려면 고기의 질이 으뜸이어야지요. 여기서 못 찾는다면 호남까지 발걸음을 해야 합니다.”
“아, 그러셨군요.”
“아무래도 대량으로 거래를 하려다 보니 주인을 만나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왔습니다. 대충 달에 은자 백 냥 정도의 거래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진작 말씀하시지…….”
“도살장에 칠현금 소리가 나니 신기해서 지나가는 길에 들어와 봤습니다.”
“허, 그건 우리 도살장의 비법입죠.”
“비법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고기가 제일 맛있을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흠, 그건 아무래도 막 잡았을 때……. 신선한 고기 아닙니까?”
“그것도 맞긴 한데, 정답은 아닙죠. 백정들은 모두 하나같이 그 가축이 제일 행복할 때 잡아야 고기가 제일 맛있다고 합죠.”
“도살장에서 소가 행복할 수 있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하하, 원래 이건 저희만의 비법인데 특별히 보여 드리죠.”
“오호, 그렇게 해 주신다면야 믿고 거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쪽으로 오시죠. 그런데 저쪽은 이분이 가시기에는…….”
사내는 설화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가축을 잡는 장면을 보기에는 설화가 조금은 어려 보였기 때문인 듯. 한빈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이래 보여도 담력이 제법 큰 아이입니다.”
“저는 괜찮아요. 눈 가리고 있으면 돼요.”
설화가 말을 덧붙이자 사내가 씩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터벅터벅.
사내는 백 걸음 이상을 가서 멈췄다.
그곳에는 소가 한 마리 묶여 있었다.
소가 묶인 곳의 이십 걸음 밖에는 면사포를 쓴 여인이 칠현금을 앞에 두고 있다.
아마도 도살장에 울리던 칠현금 소리는 저 여인으로부터 나온 것이 분명했다.
사내는 사람 좋은 얼굴로 한빈에게 손짓했다.
“이제부터 보여 드릴 테니 가까이 오십시오. 여기 자리에 앉아서 구경하셔도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한빈은 살짝 고개를 숙인 후 사내가 가리킨 의자에 앉았다.
한빈이 턱을 괴고 보고 있는데 갑자기 칠현금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백색 면사를 쓴 여인이 칠현금을 타기 시작한 것이다.
한빈은 소를 잡는 모습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눈을 감았다.
옆에서 그 모습을 힐끔 바라보던 설화는 고개를 갸웃했다.
상대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한빈이 이해가 안 되었던 것이다.
그때였다.
눈꺼풀이 갑자기 무거워졌다.
약에 취한 듯 스르륵 감기는 눈. 설화는 최대한 이를 악물었다.
잘못되었음을 직감한 것이다.
이런 느낌은 분명…….
띵. 띠, 딩.
설화는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다. 칠현금 소리가 계속 귓속에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순간 설화의 눈앞에 묘한 광경이 펼쳐졌다.
잔뜩 쌓여 있는 당과와 어린 시절 어렴풋이 떠오르는 어머니의 모습.
‘어서 이리 오렴.’
어머니의 환청까지 들려왔다.
기억에는 남아 있지 않은 모습이지만, 마치 살아 있는 듯 생생하게 눈앞에 떠오르고 있었다.
환상이라는 건 알지만, 꿈에서 깨고 싶지 않았다.
행복한 기억이 머릿속에 가득 차고, 잊고 싶은 기억은 봄날 눈처럼 녹아 없어졌다.
설화는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한빈과 설화를 바라보던 백정 모습의 사내가 칼을 들었다.
소가죽을 벗기는 데 쓰는 도축용 칼이었다.
사내는 환하게 웃었다.
자신이 제거하려는 상인과 여자아이가 앉은 자리는 보통 자리가 아니었다.
음공을 증폭시키는 진법이 설치되어 있는 자리였다.
화경의 고수라 할지라도 저 의자에 앉게 되면 칠현금이 내는 소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칠현금을 연주하는 이는 살막의 이인자로, 월영이라 불리는 인물이었다.
백정 모습을 한 이는 그의 오른팔인 일현.
일현은 입꼬리가 올라간 한빈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가 한빈에게 한 말은 사실이었다.
이곳에서는 소든 사람이든 웃으면서 죽을 수 있었다.
일현이 칼을 올려 조용히 원을 그렸다.
동시에 일현의 옆에 소리 없이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들은 일현과는 달리 흑의 복면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일현과 똑같은 칼을 들고 있었다.
흑의 복면을 쓴 사내들은 일현의 수하였다.
일현이 한빈에게 얼굴을 들이대며 말했다.
“좋은 꿈을 꾸면서 가는 것도 행운이지.”
“어르신은 이놈이 상인이 아니라는 것을 어찌 아셨습니까?”
일현의 수하가 물었다.
“상인의 봇짐이 저리 허술하지는 않지.”
“아, 그렇군요. 그렇다고 보자마자 가죽을 벗기는 것은…….”
“이 안으로 들어온 이상 짐승이든 사람이든 살아 나간 생명이 있더냐? 그리고 관부의 움직임이 수상하다. 아마도 저놈은 나라에서 보낸 자일수도 있다.”
“듣고 보니 어르신 말씀이 맞습니다.”
“나는 옆에 있던 아이의 가죽을 벗겨 낼 테니, 너희는 저 사내놈을 맡아라.”
“그래도 부막주님께는 여쭤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복면 사내의 말에 백정 모습의 사내가 정자 쪽을 바라봤다.
그곳에서는 칠현금 연주에 흠뻑 빠진 여인이 있었다.
백정 보습의 사내가 바라보자 연주를 하던 여인의 백색 면사가 위아래로 출렁였다.
그 모습에 백정 모습의 사내가 말했다.
“부막주님께서 허락하셨다.”
백정 모습의 사내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조심스럽게 설화의 정수리에 칼을 그으려 했다.
그때였다.
옆에서 내력이 담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거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