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독사의 독니는 물린 뒤에야 알 수 있다 (2)
한빈이 멈춘 곳은 다른 집과 비교하면 두 배는 넘는 담장이 쭉 늘어선 집이었다.
그 너머에서는 묘한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팅. 팅.
한빈은 재빨리 담장 위로 뛰어올랐다.
그때 담장 위에서 은빛 물체가 달빛에 반사되었다.
한빈은 재빨리 품속에서 은침을 꺼냈다.
‘백발백중.’
슉. 슉. 슉.
한빈이 던진 은침에 은빛 물체에 적중했다.
투두툭.
은빛 물체가 담장 아래로 떨어졌다.
한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담장 위에 철질려가 있다. 조금만 기다려라, 비광아.”
“알겠습니다.”
악비광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경계했다.
한빈은 담장 위에 철질려를 적당히 쓸어 냈다.
쓱.
그러고는 악비광에게 손짓했다.
악비광이 담장 위로 날아올라 한빈의 옆에 앉자, 한빈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쪽이다.”
“그럼 저곳으로 가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갈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소리를 들어 보니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 준비해라, 비광아.”
팅. 팅. 팅.
묘한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이제는 악비광도 들었는지, 등에 멘 단창 두 개를 한 손에 하나씩 들고 눈을 빛냈다.
한빈은 허리에서 좌혈랑검을 뽑았다.
의원 행세를 하고 있기에 단검만을 숨겨서 나온 것이다.
한빈은 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묻히냐 하는 점이 궁금했다.
한빈은 그 의문을 사람들이 나타난 후에야 풀 수 있었다.
팅. 팅.
검과 검이 달빛 아래 섬광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런데 소리가 이상한 것은 바로 한쪽 무리가 연검을 쓰고 있기 때문이었다.
얼핏 보니 연검을 쓰는 무리는 검은 복면을 하고 있었다.
한빈은 눈매를 좁혀 멀리 있는 그들을 관찰했다.
한빈은 섬광과 소리만으로도 그들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었다.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들의 검법은 어딘가 묘했다.
묘하다는 근거는 어느 파의 검법에도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가장 육합검이나 삼재검법 같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검술을 쓰고 있었다.
팅. 팅.
계속 소리가 울린다.
그 소리는 마치 악기 소리와도 같았다. 한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연검을 쓰는 이유를 알 것 같아서였다.
지금도 근처 어딘가에서는 칠현금과 비파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연검과 검이 부딪치자 온전하게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연검이란 것이 어떤 병기이던가?
얇고 부드러워 허리띠로 위장해서 가지고 다닐 수도 있는 검이었다.
부드러운 연검의 특성상 소리를 흘려 버리고 있는 것이었다.
다른 장소라면 아무리 연검이라도 소리를 숨기지 못했겠지만, 이곳 칠음현에서는 달랐다.
연검의 생각지도 못한 장점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쩌면 칠음현은 암살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일지도 몰랐다.
그 말은 이곳이 한빈에게는 앞마당과도 같다는 이야기.
몰래 서로의 목에 칼을 겨누는 놀이가 있다고 한다면, 한빈은 누구와의 대결에서도 살아남을 자신이 있었다.
또한 살아남을 자신이 있다는 것은 언젠가 상대의 목을 딸 수 있는 확률도 있다는 뜻이었다.
적이 누군지는 몰라도, 한빈은 깨달음을 얻었다.
물론 시간적인 제약이 없어야 했다.
한빈이 입꼬리를 올리고 있을 때, 결투를 벌이고 있는 자들의 외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한빈의 예상대로 그들 중에는 설화와 청화가 섞여 있었다.
물론 당기명과 당독대도 있었다.
거기에 더해 처음 보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복장을 보건대, 무인이 아닌 관리였다.
당기명과 관리가 왜 여기에?
한빈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그들을 지켜보고 있을 때, 악비광이 한 발 앞으로 움직였다.
다급한 상황을 본 악비광이 뛰어내리려 한 것이었다.
“갑시다, 형님.”
“잠깐.”
한빈이 악비광의 소매를 잡았다.
탁.
악비광이 황당하다는 듯 한빈을 바라봤다.
“왜 그러십니까?”
“구할 거면 정문으로 들어가야지. 그래야 누가 봐도 천하 십대세가처럼 보이지 않겠어?”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거기에 왜 강북 오대세가가 아니라 천하 십대세가입니까?”
“에이, 강남 땅에 왔으니 강북은 빼고 말해야지. 대신에 천하를 논하는 게 맞지 않겠어?”
말을 마친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다시 담장 밖으로 내려갔다.
탁.
악비광은 황당하다는 듯 담장 위에 머물렀다.
하지만,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휘적휘적 정문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게 문을 열었다.
끼기긱.
담장도 높지만 이곳의 문도 다른 곳보다 두 배는 컸기에, 문이 열리면 내는 소음도 제법 컸다.
그 모습을 보던 악비광이 헛숨을 터뜨렸다.
“헉.”
악비광이 놀란 것은 소음 때문이 아니었다.
문이 미리 열려 있었다는 것이었다.
악비광은 재빨리 담장에서 내려와 한빈을 따라갔다.
정문으로 들어간 한빈은 문 옆에 세워 놓은 빗자루를 잡았다.
그러고는 유유히 입구부터 쓸기 시작했다.
쓰윽. 쓰윽.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빗자루질.
악비광이 물었다.
“형님, 뭐 하십니까?”
“보면 몰라? 청소하잖아.”
“이 상황에 청소를 하신다고요?”
“그럼 저거 다 밟고 지나갈래? 사천당가도 이게 무서워서 이리 못 오잖아. 그런데 저걸 밟겠다고? 저기 딱 봐도 독이 묻어 있는데도?”
한빈이 앞을 가리켰다.
악비광은 한빈이 가리키는 곳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아, 저게 대체…….”
악비광은 말끝을 흐렸다.
그곳에는 수천 개의 철질려가 바닥에 깔려 있었다.
무서운 것은 철질려들의 크기가 보통 철질려의 십 분의 일밖에 안 된다는 것이었다.
악비광은 담장 위에서 한빈이 은침으로 철질려를 쳐 내던 것이 기억났다.
‘어떻게 저렇게 작은 철질려를 명중시킬 수 있었지?’
그때 담장 위에서 아래로 뛰어내리려고 한 자신이 떠올랐다.
만약 뛰어내렸다면?
저 철질려에 당했을 것이었다.
거기에 더해 한빈이 말하는 것으로 보면, 철질려에 독이 묻어 있음이 분명했다.
등에 소름이 올라온 악비광은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떨었다.
악비광의 표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빈은 철질려들을 묵묵히 쓸어 냈다.
쓰윽.
철질려들이 한빈의 빗자루질에 쓸려 나갔다.
한빈이 뒤를 힐끔 보며 말했다.
“뭐 하니, 비광아?”
“형님이 철질려를 쓸어 내는 것을 기다리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놀고 있는 것 같잖아. 경계하는 척이라도 해.”
그 말에 깜짝 놀란 악비광이 두 개의 단창을 고쳐 잡았다.
단창을 잡고 주변을 경계하던 악비광이 물었다.
“형님, 문은 어떻게 소리도 없이 여신 겁니까?”
“무슨 소리야? 문은 원래 열려 있었는데.”
“그럼 왜 담장으로…….”
“처음부터 정문으로 뛰어 들어가는 바보가 어디 있어?”
“…….”
악비광은 말문이 막혔다.
정문이 열려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앞뒤 가리지 않고 뛰어들어 갔을 것이었다.
졸지에 바보가 되어 버린 악비광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그때 한빈이 말했다.
“입 벌리지 마! 독 들어갈 수도 있어.”
“헉, 독이요?”
“그래, 독. 지금 철질려를 멋으로 깔아 놨겠어? 그리고 철질려에 독을 묻힌 놈들이 독은 안 풀었겠어?”
“…….”
악비광은 답하지 않았다.
입을 손으로 막았기에 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에도 연검과 검이 부딪치는 가냘픈 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팅. 팅.
당기명 일행이 적과 분전하는 곳과의 거리는 점점 좁혀졌다.
한빈은 더욱더 빨리 빗자루질을 했다.
쓰윽.
연검과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빗자루질 소리가 마치 악단이 내는 음악처럼 어우러질 때쯤, 당기명 일행의 지척에 도착했다.
실제로 싸우고 있는 것은 당기명밖에 없었다.
당독대는 누군가를 보호하고 있었으며 설화는 청화를 보호하고 있었다.
적은 열 명 남짓.
한빈은 그제야 빗자루를 놓고 그들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악비광이 외쳤다.
“형님! 뭐 하십니까?”
“의원이 어떻게 싸워? 비광아, 어서 저들을 구하거라.”
악비광은 한빈을 바라봤다.
그러지 않아도 아까 한빈이 말했던 것이 있었다.
이곳에서부터는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아닌 의원으로 대하라는 것이었다.
악비광은 두 개의 단창을 휘두르며 당기명에게 다가갔다.
악비광의 단창은 마치 두 개의 붓처럼 밤하늘에 수묵화를 그렸다.
다만 먹이 아닌 핏물이 밤하늘을 수놓았다.
푹.
촤악.
찌르고 베는 것이 마치 검객 같았다.
전세는 이내 역전되었다.
복면을 쓴 괴한들이 점점 밀리기 시작했다.
한빈은 빗자루를 든 채 조용히 그들을 바라봤다.
수상쩍은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그들은 철질려에 독을 묻혔다.
칠음현에서 독을 쓰지 않는 것은 무림과 나라의 공통 관례였다.
만약 이곳에서 독을 쓴다면?
삼대를 멸할 정도의 형벌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독을 썼다.
독을 쓴 것을 보면 상대를 죽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연검을 보면 죽이겠다기보다는 한 곳으로 모으는 느낌이다.
순간 전생의 기억이 떠오른 한빈이 외쳤다.
“모두 밖으로 피하라!”
하지만 한빈의 외침을 듣지 못했다.
그들에게 달려간 악비광마저 정신없이 단창을 휘두르고 있었다.
자신은 싸우는 자들을 볼 수 있는데 그들은 자신을 알아채지 못한다라?
이것은 한 가지 경우밖에 없었다.
한빈은 눈매를 좁히며 주변을 바라봤다.
철질려가 뿌려진 것이 묘한 문양을 그리고 있었다.
한빈은 다시 빗자루질을 하기 시작했다.
쓰윽.
주변을 돌아보던 한빈은 재빨리 용린검법의 초식을 떠올렸다.
‘구걸십팔보.’
‘전광석화.’
사사-삭.
쓱쓱.
한빈은 재빨리 철질려로 만든 진법을 파훼하기 시작했다.
사사-삭.
한빈의 빗자루질이 얼마나 빠른지 빗자루에서는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급기야 빗자루에 불이 붙었다.
한빈은 활활 타는 빗자루는 자신과 그들의 중간에 던졌다.
그곳이 바로 생문(生門)이었다.
그리고 지금 던진 빗자루는 그들을 지켜 줄 횃불 역할을 할 것이었다.
활활 타오르는 빗자루를 향해 한빈이 외쳤다.
“어서 다들 불빛을 보고 나오십시오!”
* * *
불빛을 가장 먼저 본 것은 악비광이었다.
악비광은 그들을 구하기 위해 뛰어든 후, 황당한 일을 겪었다.
주위의 풍경이 달라진 것이었다.
분명 정체 모를 집 안으로 한빈과 함께 들어왔다.
하지만 당기명을 구하기 위해 뛰어들어 창을 몇 번 휘두르다 보니, 주변의 풍경이 변해 있었다.
집안의 앞마당이 아닌 평원에서 자신이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악비광은 까무러칠 정도로 놀랐다.
하지만, 악비광은 산동악가의 대공자였다.
어릴 적부터 진법에 대해서는 뼛속 깊이 교육을 받은 악비광이기에, 대략적인 상황은 알 수 있었다.
팅. 팅.
창으로 적의 연검을 쳐 내며 힐끔 다른 이들을 바라봤다.
당기명도 적잖게 당황한 것 같았다.
오히려 설화가 여유를 드러냈다.
하지만, 누구도 진법의 파훼법을 찾아내지 못한 것이 확실했다.
복면을 쓴 자들이 원하는 것은 분명 자신과 당기명 그리고 나머지 일행이 사로(死路)로 발을 내딛는 것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불빛이 나타난 것이었다.
악비광이 재빨리 외쳤다.
“저곳으로 모두 대피……!”
악비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일행은 재빨리 불빛을 향해 달려갔다.
타다닥 타다닥.
그들은 다급하게 불빛을 향해 뛰어들었다.
불빛을 넘어간 악비광은 눈을 크게 떴다.
풍경이 다시 돌아왔기 때문이다.
즉, 진법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악비광은 재빨리 한빈에게 달려갔다.
나머지 일행도 한빈을 향해 달려갔다.
한빈의 앞에서 악비광이 말했다.
“진법이…….”
“시간 없다! 빨리 여기를 뜬다!”
한빈이 다급하게 외치자 악비광이 눈을 크게 떴다.
한빈이 이렇게 급하게 행동한 적이 있던가?
악비광이 대문 쪽으로 뛰며 외쳤다.
“비상사태입니다! 다들 여기를 빠져나갑시다!”
이렇게 외친 악비광은 주위를 둘러봤다.
자신이 구할 사람이 있나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변은 휑했다.
다들 이곳을 빠져나가고 자신만 남은 것이었다.
“이런 제길!”
혼잣말을 외친 악비광이 대문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타닥.
그때 한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있는 힘껏 뛰어라, 비광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