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하북팽가의 숨겨진 힘 (3)
악소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하북팽가의 막내 공자네.”
그때 팽혁빈이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이 전서를 보낸 사람이 우리 한빈이라고요?”
“맞네. 여기 써 있지 않나? ‘팽한빈’이라고 말이네.”
악소천은 다시 전서의 한 곳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분명히 ‘하북팽가의 팽한빈’이라고 적혀 있었다.
팽혁빈은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물었다.
“악 공자 아니, 가주님의 아드님과 우리 한빈이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한빈이가 악 공자를 찾았다는 게 아닙니까?”
“외부에 밝히지는 않았지만, 처음에 집을 나갔을 때 하북팽가의 막내 공자를 만난다고 나간 것이었다네.”
“아, 그랬습니까?”
“뭐, 그때는 허락받고 갔지만 이렇게 가출할 줄은 몰랐네.”
“흠, 그러니까 우리 한빈이가 지금 악 공자를 데리고 있다는 겁니까?”
팽혁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어서였다.
악소천은 사람 좋은 얼굴로 전서에 적힌 내용을 가리켰다.
“여기 보게. 데리고 있다고도 적혀 있고 무가지회로 향하는 하북팽가의 행렬로 가라고 되어 있지 않나?”
악소천의 말대로, 전서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팽혁빈이 침음을 흘렸다.
“음.”
“중간에 보면 찾아 준 대가는 대공자 팽혁빈과 상의하라고 되어 있던데. 그게 자네 맞나?”
“네, 맞습니다.”
“그럼 나와 얘기 좀 나눠 보세.”
“그런데 수상하지 않습니까? 무슨 천리안도 아니고 악 공자를 찾은 것도 모자라, 우리가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알고 보낸다는 겁니까? 우리 한빈이가 좀 똑똑하기는 하지만, 천리안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천리안을 가지고 있는 거 같네만은, 아니던가?”
“그거 조금…….”
팽혁빈은 말끝을 흐렸다.
팽혁빈은 일단 다음 의문점을 말하기로 했다.
“중요한 점을 하나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건 글씨가 너무 작아서 한빈이의 서체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진위의 여부를 확실히 하고 싶다는 것인가?”
“네, 그렇습니다.”
“흠, 자네가 그리 말한다면…….”
악소천은 말끝을 흐렸다.
그때 옆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껄껄, 그건 내가 보장하지.”
고개를 돌려 보니 그곳에는 홍칠개가 웃고 있었다.
팽혁빈은 재빨리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어르신.”
“그 전서는 개방이 전달한 것이니 내가 모를 리 있나?”
“어르신, 그게 사실입니까?”
“그 전서는 개방의 산동 분타에서 보냈네. 그리고 악 가주, 자네가 어떻게 하북팽가의 행렬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러고 보니 중간중간에 하북팽가 행렬에 대한 소문을…….”
“그 정보가 어디서 나왔겠나?”
“헉, 그렇다면 어르신이 저를 여기로……. 그럼 어르신은 이 모든 일을 알고 계셨던 겁니까? 그럼 우리 비광이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겁니까?”
“흠, 그건 비밀이네.”
“비밀이라고 하셨습니까?”
“뭐, 내 제자가 이렇게 말하라고 하더군.”
순간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푸웁.”
“하하.”
“저도 모르게 흥분했군요. 뭔가 당한 것 같습니다.”
악소천도 어색하게 웃었다.
홍칠개는 모두가 웃자 흐뭇한 모습으로 말을 이었다.
“일단은 내 말에 따라 주게. 그렇다면 자네 아들을 찾는 데는 문제가 없을 거야.”
“네. 알겠습니다, 어르신.”
악소천이 깍듯이 고개를 숙이자, 홍칠개가 말을 이었다.
“이해해 주니 고맙네.”
“그런데 그 소문이 사실이었습니까?”
“무슨 소문 말인가?”
홍칠개가 고개를 갸웃하자, 악소천이 답했다.
“지금까지 말한 하북팽가의 막내 공자에 대한 소문 말입니다.”
“소문이라고?”
“하북팽가가 길러 낸 숨겨진 힘이라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홍칠개 어르신.”
“험.”
홍칠개는 답을 회피하려는 듯 헛기침하며 수염을 쓸어내렸다.
홍칠개가 보기에 한빈은 숨겨진 힘이라고 하기보다는 최고의 힘이라 불러야 했다.
하지만, 제자를 너무 추켜세우면 팔불출이 될 것 같아서 참았다.
그의 말에 팽대위가 끼어들었다.
“무슨 그런 헛소문이…….”
팽대위는 소문이 황당했다.
최근에 본 한빈의 실력이면 숨겨진 힘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소문이 날 정도의 힘은 아니었다.
거기에 더해, 한빈은 애초에 힘을 숨긴 적이 없었다.
팽대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팽혁빈도 고개를 흔들었다.
“숨겨진 힘이라……. 제게는 그저 착한 아우입니다. 다만, 항상 걱정입니다.”
“걱정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악소천이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팽혁빈이 말을 이었다.
“밖에서 뭘 하고 돌아다니는지를 통 알 수 없어서 말입니다. 제 마음이 악 가주님의 마음과 똑같습니다.”
“아, 그것도 그렇겠군.”
악소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가장 큰 걱정은 아들이 어디 있는지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팽혁빈의 마음과 똑같았다.
그때 황보만청도 끼어들었다.
“암, 그건 그렇지. 나도 그 녀석을 찾아왔지만, 잠깐 마주친 후 코빼기도 안 내밀더라고. 고얀 놈.”
황보만청은 조금 과장스러운 표정까지 지어 보였다.
경쟁자를 줄여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한빈이 빛이 나면 날수록, 그에게 눈독을 들이는 사람이 많아질 것이다.
그들의 말에 악소천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는 그냥 해 본 말인데, 황보 가주님의 표정을 보니 소문이 사실인 듯싶습니다. 하하.”
“악 가주는 생긴 것보다 날카롭군. 역시 강북 오대세가의 가주다워.”
황보만청이 농담처럼 받아 대화를 마무리하려고 할 때, 대화를 듣고 있던 팽대위가 끼어들었다.
“하하. 사실이든 아니든 뭐, 그게 중요합니까? 악 가주님은 악 공자를 찾고 저희도 우리 막내를 찾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그놈들이 그동안 얼마나 자랐을지 궁금합니다.”
“하북팽가의 막내 공자도 안 본 지 그리 오래되었는가?”
“아닙니다. 한 달도 안 됐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자랐는지 궁금하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한창 자랄 나이인지, 요즘 들어서 하루가 다르게 몰라보겠더라고요.”
팽대위가 씩 미소를 지었다. 팽대위는 진심이었다.
볼 때마다 성장하는 한빈이 신기했다.
마치 갓 태어난 어린아이를 보는 느낌이었다.
팽대위의 표정을 본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자네 표정을 보니 꼭 하북팽가의 막내 공자가 갓 태어난 아이라도 되는 것 같군. 나도 얼른 보고 싶네, 하하.”
악소천도 따라 웃었다.
이곳에 오는 동안 웃을 일이 없었는데, 배에 오르고 나서 두 번이나 웃은 그였다.
상대에게 맞춰 주기 위한 웃음이 아니라, 진심으로 웃을 수 있어 기뻤다.
한참을 웃던 악소천은 뭔가 생각난 듯 품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전서에 쓰여 있는 대로 보답할 물건을 찾는 느낌이었다.
그때 팽혁빈이 손을 내저었다.
“상의하라고 되어 있지 구체적으로 적힌 내용은 없었으니 나중에 얘기하시죠. 일단 이 전서의 내용이 사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팽혁빈은 정중히 포권했다.
팽혁빈은 지금 한빈이 보내온 전서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이것은 악소천에게 보낸 전서이면서 동시에 팽혁빈에게 보낸 전서였다.
속뜻은 몰라도 팽혁빈에게 이 상황을 잘 이용하라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팽혁빈은 전서를 다시 한번 바라봤다.
산동악가의 악비광을 데리고 있다니!
악비광은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다.
가주인 악소천도 포기한 산동제일의 골칫덩이인데, 한빈이 잘 묶어 둘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거기에 더해 막내 한빈은 대체 무엇을 하고 다닌다는 말인가?
사천당가와 같이 떠났다더니 이번에는 악비광을 데리고 있다니?
팽혁빈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다.
그는 점소이가 말한 거지가 악비광이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물론 사천당가와 악비광 그리고 한빈이 모두 같이 모여 있다는 것도 상상하지 못했다.
뭐, 나머지 사람들도 의문을 품기에는 마찬가지였다. 가장 애가 닳는 사람은 역시 악소천이었다.
악소천은 아들은 그냥 풀어놓고 길렀다.
그가 아들에게 가르쳐 준 것이라면 강호에서 살아남는 법뿐이었다.
그 방법 중 하나가 미친놈과는 절대 적이 되지 말고 친구가 되란 것이었다.
얼마 전 절호곡의 늑대 토벌이 끝난 후, 악비광은 악소천에게 달려와 흥분한 표정으로 보고를 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절호곡의 늑대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악비광은 진짜 미친 작자를 봤다며 흥분했었다.
자신의 창에 어깨가 뚫렸는데 관통된 채 그대로 밀고 들어와 자신을 공격했다며 흥분했다.
세상에 그렇게 싸움에 미친 자는 처음 봤다는 것이 그 골자였다.
물론 그게 지금 하북팽가의 비밀 병기라고 암암리에 소문이 퍼진 막내 공자였다.
악비광은 그 후 막내 공자를 본다며 허락을 받고 나가서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리 풀어놓고 키운다지만, 이건 좀 정도에서 벗어난 일이었다.
악소천은 악비광의 일탈을 가출로 규정하고 여기저기 도움을 받아 추적 중이었다.
여차하면 무가지회에도 불참하려 했다.
악소천은 조용히 사천 쪽을 바라봤다.
사천으로 가는 길에 아들, 악비광이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 * *
같은 시각, 악비광은 마차의 창밖으로 얼굴을 내민 한빈에게 달려가다 고개를 갸웃하고 멈췄다.
그 모습에 한빈이 물었다.
“비광아, 왜 그래? 눈에 벌레라도 들어간…….”
“그게 아니라 이상하게 오한이 느껴져서요. 아무래도 전에 그 독분이 해독이 덜 된 것 같은데…….”
악비광은 말끝을 흐리며 뒤를 힐끔 돌아봤다.
그곳에서는 사천당가의 당기명이 다급하게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야 일주일 전 독분 사건의 전말이 밝혀졌다.
그런데 묘하게 사천당가의 실수로 결론이 났다.
그것도 당기명과 당독대가 인정하여 나온 결론이었다.
소대섭과 조호 그리고 장삼에게 독분을 시험한 것은 사천당가의 당독대가 맞지만, 그의 품속에 있던 삼 단계짜리 독분을 홈친 것은 한빈이었다.
물론 한빈이 바닥에 떨어진 것을 주웠다고 하는 바람에, 독분 사건의 모든 원인은 사천당가의 차지가 되었다.
사천당가 하급 무사 중 하나가 삼 단계 독분의 잔여물을 먹고 헐떡거리던 것을 한빈이 구해 준 후로, 한빈이 거짓을 말할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린 결론이었다.
당기명과 그 수하들은 한빈을 사천당가의 희망이요, 등불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와는 반대로 사천당가를 바라보는 나머지 이들의 눈빛은 그리 곱지 않았다.
역시 사천당가라는 입장이었다.
사천당가는 자신의 힘을 자랑할 때면 죽지 않을 정도의 독을 쓰곤 했다.
이번에도 갑자기 합류한 산동악가와 개방에 대한 견제를 하기 위해 독분을 풀어놨다는 것이 악비광의 생각이었다.
물론 이것은 악비광의 착각.
악비광의 눈빛을 본 한빈이 말했다.
“비광아, 눈빛 살벌하다.”
“아, 형님 정말 억울합니다. 며칠 동안 머리가 빙빙 도는데,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그게 수련이야. 또한 인생이기도 하고.”
“저는 이런 수련은 싫습니다. 그리고 사천당가에서 저와 광개에게 고의로 독을 풀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고의는 아니지. 그때 양념 통 빼앗아 간 게 누구야?”
“흠.”
악비광이 헛기침으로 답을 대신하자, 한빈은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광개잖아. 그 덕분에 장오하고 현개가 제일 피를 많이 봤고.”
한빈이 가리킨 곳은 며칠 전 오호단문도를 가지고 떠난 광개 일행이 사라진 곳이었다.
뭐, 한빈이 한 말은 사실이었다.
원경의 무리보다 장오와 현개라는 아이가 가장 약했기에 피해도 그만큼 컸다.
뭐, 원경의 무리도 강호의 쓴맛을 톡톡히 봤고 말이다.
한빈은 힐끔 원경을 바라봤다.
이번 일로 인해 원경은 촉을 세우고 다닐 것이다.
위험을 감지하는 녀석의 능력이 조금 더 커졌을 것이 분명했다.
한빈과 눈이 마주친 원경이 다급하게 걸어왔다.
“주군, 잠시만요.”
“왜 그래? 표정이 다 죽어 간다. 혹시 독분이 아직도 해독되지 않은 거야?”
“몸은 괜찮아졌습니다. 독분 이야기가 아니고 따로 말씀드릴 것이 있어서요.”
“그래? 말해 봐.”
“어느 쪽으로 가시려고 합니까?”
“큰길을 따라서 가기로 한 걸 너도 들었잖아.”
“아무래도 감이 안 좋아서요. 느낌이 싸한 게, 누가 등을 송곳으로 찌르는 느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