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하북팽가의 숨겨진 힘 (2)
팽혁빈이 고개를 갸웃할 때, 팽대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황보 가주님.”
팽대위가 포권했다.
상대는 다름 아닌 황보세가의 가주 황보만청이었다.
황보만청도 포권하며 말을 이었다.
“자네가 여기 온 이유랑 같지. 무슨 이유가 있겠나?”
“무가지회에 직접 참석하시려고요?”
“중대한 사안인데 직접 가는 것이 맞지.”
“그래도 이렇게 때맞춰 오신 게 공교롭습니다.”
“우연히 마주친 게 아니라 내가 자넬 찾아온 거네. 무가지회보다 더 중대한 사안이 있다네.”
“저를 찾아왔다뇨?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일단 자리 좀 옮기세.”
황보만청이 구석의 빈자리를 가리켰다.
그곳은 점소이가 음식을 둔 쪽이었다.
그들이 구석 자리로 가자, 점소이가 팽혁빈을 바라봤다.
“제 말 맞죠?”
“우연이겠지.”
팽혁빈은 고개를 흔들었다.
황당해하는 팽혁빈은 신경 쓰지 않고 둘은 대화를 이어 나갔다.
팽대위가 물었다.
“중대안 사안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인륜지대사에 관한 이야기일세.”
황보만청이 상체를 기울이며 목소리를 낮추자 팽대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인륜지대사라면 혼인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게 무슨 중대한 사안입니까?”
“허허. 그건 자네가 잘 몰라서 하는 말이야. 누군지 알면 생각이 달라질 걸세.”
“흠, 대체 누구의 혼인입니까? 혹시 우리 가문의 대공자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팽대위가 팽혁빈 쪽을 보며 눈짓하자 황보만청을 고개를 저었다.
“대공자가 아니라 막내 공자를 이야기하는 걸세.”
“네? 한빈이요?”
“목소리가 크네.”
“아니, 한빈이라면 아직 혼인을 논하기에는 멀었고. 그 이야기라면 제 형님하고 직접…….”
“폐관에 들었다더군.”
“헉.”
“접객당주가 자네를 찾아서 상의하라고 해서 왔네.”
지붕 위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껄껄!
그 소리에 팽대위가 허리에 찬 검집을 움켜쥐었다.
잔뜩 긴장한 팽대위를 따라 팽혁빈을 비롯한 하북팽가 무사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드득.
의자 밀리는 소리와 함께 객잔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 모습에 황보만청이 피식 웃었다.
“자네 지금 장난하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 농담하실 때가 아닙니다.”
팽대위가 눈매를 좁혔다. 지붕 위에 있는 상대의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숨겼는데도 숨긴 것 같지 않은 묘한 기세.
황보만청이 칼을 빼어 들려는 팽대위의 오른손을 살짝 눌렀다.
“칼을 내려놓게.”
팽대위가 말했다.
“상대는 저보다 한참 윗줄이라고 확신합니다. 거기에 더해 몰래 엿듣고 웃는다는 것은 아군보다는 적에 가깝습니다.”
“흠, 듣고 보니 그렇군. 잠시만 기다리게.”
황보만청은 팽대위를 막았던 손을 떼고 천장을 바라봤다.
“무제자 어르신, 그만 나오시죠.”
그 말이 끝나자 풀잎 밟는 소리가 천장에서 울려 퍼졌다.
사사삭.
동시에 황보만청과 팽대위의 옆에 신형이 나타났다.
팽대위는 포권할 정신도 없었다.
사실 신형보다 드리운 그림자부터 먼저 확인했다.
상대가 무제자 홍칠개라는 것은 이제야 알아봤다.
홍칠개가 헛기침했다.
“험.”
수염을 쓸어내리는 홍칠개의 모습에, 그제야 팽대위가 포권했다.
“무제자 어르신을 뵙습니다.”
“자네가 팽대위군. 말은 많이 들었네.”
“말을 듣다니요?”
“내 제자에게서 말이네.”
“허, 진짜 한빈이 어르신의 제자입니까?”
“그놈이 얘기를 안 하던가?”
“얘기는 들었지만, 반만 믿었습니다.”
“어허, 조카에게 관심이 없군. 그 누구더라, 정화라는 이름을 가진 아낙네도 분명히 들었을 텐데. 전하지 않았나?”
“죄송하지만, 그분은 가문에서 나가고 없습니다.”
“뭐, 자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던가? 죗값을 치른 것이지.”
“그런데 무슨 일로 저희 대화를 몰래 엿들으셨습니까?”
팽대위는 하북팽가의 집법당주답게 집요했다.
학문은 부족해도 따질 것은 따져야 하는 유학자들과 성격이 비슷했다.
홍칠개는 잠시 황보만청을 노려봤다.
황보만청은 살짝 움찔하며 시선을 돌린다.
팽대위는 그런 둘의 모습에 의아했다.
홍칠개는 따지고 든 팽대위 자신을 노려봐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왜 황보만청을 책망하는 눈빛으로 바라본다는 말인가?
팽대위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 홍칠개가 말을 이었다.
“내 제자의 혼사를 논하는데, 왜 나를 빼놓고 이야기하지? 안 그런가?”
“그, 그렇긴 그렇습니다.”
팽대위가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묘한 기 싸움에 휘말린 느낌이 들었다.
그때 황보만청이 손을 내저었다.
“제가 알기로는 어르신의 사부 직책은 임시로 알고 있습니다만.”
“허허, 임시라도 지금은 단 하나뿐인 사부일세. 그리고 한빈의 아비가 폐관에 들어갔으면 결정권은 나에게 있는 것일세, 험.”
홍칠개가 수염을 쓸어내렸다.
둘은 잠시 서로를 노려봤다.
중간에 있는 팽대위는 둘의 눈싸움을 중간에서 고스란히 받아 내야 했다.
그들의 대화를 보고 있던 점소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보셨죠. 제가 말씀드린 대로죠? 무림세가에 거지까지, 딱이지 않습니까? 지난번하고 똑같습니다요.”
점소이는 기분이 좋은지 어깨를 활짝 폈다.
사실 지난번에 거지는 없었다.
하지만, 그 악비광과 그 일행들이 거지보다 더 거지꼴로 왔기에 점소이는 편하게 거지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었다.
“허, 이거 참.”
팽혁빈이 기가 찬 듯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것도 잠시 눈매를 좁히며 점소이를 바라봤다.
점소이가 보통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착각이었다.
눈빛을 받은 점소이는 뒷걸음쳤다.
“눈빛이 무섭습니다, 나으리.”
“아, 미안하네.”
“네, 그럼 저는 가서 일 보겠습니다요.”
점소이는 다급히 몸을 돌렸다.
그때 구석 자리에서 팽대위가 외쳤다.
“여기도 술 좀 내오게!”
점소이는 씩 웃었다.
객잔의 매상이 늘어나니 입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북팽가 일행이 머물면서 생기는 매상 중 일정 부분을 특별 수당으로 주겠다는 루주의 약속이 있었다.
찹쌀떡과 당과 그리고 명주 등 돈을 아끼지 않고 접대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빨리 내오겠습니다. 최고급으로 대령하겠습니다.”
점소이는 어느 때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주방으로 향했다.
* * *
그날 점심.
하북팽가의 행렬에 홍칠개와 황보세가 일행이 합류했다.
나루터에 선 팽대위는 힐끔 황보만청을 바라봤다.
궁금하지만, 못 물어보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황보만청의 등에 있는 거대한 검이었다.
뭐, 도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검집의 형태로 보건대 검이 분명했다.
황보세가에서 저런 거대한 검을 쓴다고?
팽대위는 이제껏 저런 형태의 검을 들어 본 적 없었다.
팽대위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황보만청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궁금한가?”
“하하, 눈치채셨습니까?”
“이 검은 구면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아이일세.”
“구면검이라…… 처음 들어 보는군요.”
“나도 최근에야 알게 된 검이지.”
“검집에 몸을 숨겼는데도 예기가 느껴지는 것이, 보검 같습니다.”
“농담도 잘하는군. 이 구면검의 특징은 예기를 꽁꽁 숨겨 놓는 데 있다네. 아홉 개의 얼굴 중 마지막 얼굴에만 예기를 품고 있다지. 아마도…….”
“왜 말씀을 멈추십니까?”
“내가 아는 건 여기까지이네.”
“그런데 이건 황보세가의 가보 같은데, 왜 저한테 이렇게 자세히 알려 주십니까?”
“자네가 물어봤잖나? 사돈이 될 사람인데 당연히 가르쳐 줘야지.”
그때였다.
홍칠개가 미간을 좁히며 끼어들었다.
“은근슬쩍 묻어가려고 하지 말게, 황보 가주.”
“아, 제가 뭘 어쨌다고 그러십니까?”
“아무렇지 않게 사돈이라고 못 박으려고 하지 않았나?”
“허. 제가 언제…….”
“언제긴, 지금이지. 우리 제자는 아직 코를 꿰면 안 되네. 아직 무림을 위해서 할 일이 태산인데 어딜 자꾸 들이대.”
“허허.”
황보만청은 하늘을 보며 웃었다.
사실 황보만청에게 이리 대할 수 있는 사람은 무림에 몇 안 되었다. 홍칠개가 그중 하나였다.
뭐, 천적이지만 피할 수도 없는 것이 한빈의 임시 사부라는 점이다.
황보만청은 다시 팽대위를 바라봤다.
“참, 자네가 술 담그는 재주가 있다던데?”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내 막냇동생이 자네가 담근 백아주에 푹 빠졌다네. 언제 한번 황보세가에 놀러 와 실컷 술판을 벌이지 않겠나?”
“동생분이 호탕하신가 봅니다.”
“뭐, 좀 호탕하지. 하하.”
황보만청이 씩 웃자 팽대위도 마주 웃었다.
“하하, 좋습니다. 무가지회가 끝나면 한번 찾아뵙도록 하죠.”
“그래, 기대하겠네.”
황보만청의 입꼬리가 한 단계 더 올라갔다.
그가 말한 호탕한 동생이란 과연 누구일까?
물론 그의 막내 여동생인 황보서현이었다.
아직도 시집을 안 가고 있기에, 한빈을 얻지 못하면 차선책으로 팽대위와 막내인 황보서현을 맺어 주려 하고 있는 것이다.
팽대위는 하북팽가의 집법당주고, 황보서현은 황보세가의 집법당주라는 공통점도 있었다.
거기에 더해 한빈이 백아주를 만든 사람을 소개해 주겠다고 황보서현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게 팽대위라는 것은 황보만청은 알고 있었다.
꿩을 못 잡으면 닭이라도!
그것이 황보만청의 작전이었다.
그때였다.
저 멀리서 대형 상선이 강물을 가르고 나루터러 오고 있다.
뱃전에서 누군가가 외친다.
“모두 물러나시오! 물러나시오!”
나루터에서 배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뒤로 물러났다.
커다란 배가 나루터에 쿵 소리를 내며 접선하자, 바로 발판이 내려왔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두가 배에 오르자 뱃사람들은 내린 발판을 막 접었다.
그러고는 장대를 이용해 나루터에서 배를 밀어 냈다.
조금씩 배가 밀리자 이제는 돛을 활짝 펼쳤다.
배가 나루터에서 열 걸음 정도 멀어졌을 때였다.
한 무리의 무사가 쏜살처럼 달려왔다.
그러고는 손에 든 장대를 써서 강가에 박고는 그 힘을 이용해 배로 날아왔다.
쾅. 쾅!
뱃전에 올라선 무사들은 지친 기색으로 모두 자리에 털썩 쓰러졌다.
아마도 탈진한 듯 보였다.
하지만, 우두머리로 보이는 무사는 당당하게 서 있었다.
그는 관우처럼 긴 수염을 흩날리며 아무렇지 않게 뱃사공을 바라봤다.
무복의 색도 불분명했다. 먼지를 얼마나 뒤집어썼는지 황토색으로 보였으니.
아마도 급하게 이곳으로 온 것이 분명했다.
몰골이 말이 아닌 무사를 본 뱃사공은 적잖게 당황했다.
주변에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 몰라 쉬지 않고 두리번거렸다.
그때 우두머리 무사가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동시에 뱃사공은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언제든 도망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순간 우두머리 무사는 뱃사공에게 뭔가를 던졌다.
휙!
뱃사공은 피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이 전낭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반사적으로 전낭을 받은 뱃사공이 끈을 풀어 안을 확인했다.
“헉, 이렇게나 많이…….”
“지각한 벌이니 넣어 두게.”
무인은 사람 좋은 얼굴로 손짓했다.
갑자기 긴장의 끈이 풀리자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가 들렸다.
“휴.”
“아, 별일 아니었네.”
“강호의 고수 같은데 마음씨가 좋군.”
“그러게 말이야.”
모두의 웅성거림 속에 뱃사공은 전낭을 품속에 넣고 재빨리 뱃전으로 향했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꽂힌 것을 안 우두머리 무사는 포권한 자세로 쓱 주변을 훑었다.
“여러분께 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저는 산동에서 온 악 모라 합니다. 강을 건너는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우두머리 무사는 다시 한번 정중히 포권했다.
그 모습을 보던 황보만청이 고개를 갸웃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혹시…….”
“아, 자네는?”
“역시 맞군, 악소천.”
“그래, 황보만청. 오랜만이군.”
“그런데 이 꼴이 대체 뭔가?”
“큰아들놈 때문에 이렇게 급히 출발했다네.”
“허허, 그게 무슨 말인가?”
“큰 놈이 가출을 했는데, 누가 잡았다고 해서 생각보다 일찍 출발하는 걸세. 그런데 늦은 것 같군.”
“그게 무슨 말인가?”
“하북팽가의 행렬에 합류하면 그쪽으로 보내겠다고 전서구를 보냈다네. 그런데 하북팽가에 들렀더니 한참 전에 출발했다고 하지 않나? 일단 경공으로라도 따라잡으려고 이 배에 올랐다네.”
“그럼 하북에서부터 뛰어온 것인가?”
“그렇다네.”
악소천의 말에 황보만청은 힐끔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서는 팽대위와 팽혁빈이 넋이 나간 듯 대화를 듣고 있었다.
황보만청은 그 둘이 왜 그렇게 황당한 표정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황보만청이 지금 마주하고 있는 자는 악소천.
산동악가의 가주였다.
그런 자가 무복이 황토색이 될 때까지 달려왔다라?
거기에 호위무사들은 아예 녹초가 되어 쓰러져 있다.
아무래도 몇 날 며칠을 쉬지 않고 달려온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의 말 중 이상한 것이 있었다.
하북팽가의 행렬에 합류하기 위해서 왔다는 것이었다.
집 나간 아들과 하북팽가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황보만청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
“하북팽가라면 나와 같이 있네.”
“그, 그게 무슨 말인가?”
“나랑 같이 왔다고 했잖나.”
“어디 계신가?”
“이리 오게.”
황보만청은 재빨리 산동악가의 가주 악소천을 이끌었다.
악소천은 그제야 팽대위와 팽혁빈과 마주할 수 있었다.
팽대위가 포권했다.
“악가의 가주님을 뵙습니다.”
“오호, 자네가 그 유명한 하북팽가의 집법당주군.”
“유명하다니, 당치도 않습니다.”
“하북 최고의 싸움꾼이라는 소문이 산동까지 자자하네.”
“허, 어찌 그런 소문이…….”
“농담이니 신경 쓰지 말게.”
“그건 그렇고, 아까 대화를 들어 보니 전서구가 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같이 길을 가려면 보여 주는 게 맞겠지.”
말을 마친 악소천은 몸을 뒤졌다.
그러고는 통을 하나 꺼냈다.
그것은 새끼손가락만 한 전서 통이었다.
악소천은 아무렇지도 않게 전서를 꺼내 펼쳤다.
작지만 정갈한 글씨체가 드러났다.
그 글씨 중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작성자의 이름이었다.
팽대위는 자신도 모르게 그 이름을 읽었다.
“하북의 팽한빈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