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하북팽가의 숨겨진 힘 (1)
팽혁빈이 이렇게 난감한 표정을 짓는 이유는 하나였다.
장하를 건널 배편이 끊겼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탈 작은 배는 남아돌았지만, 수레를 실을 수 있는 큰 배는 일주일 뒤에야 들어온다고 한다.
“흠, 어쩐다. 일주일이라…….”
그는 팔짱을 끼고 강 너머를 바라봤다.
하지만, 뾰족한 수는 없었다.
여기서 배를 만들어 갈 수도 없고 떠난 배를 돌아오게 만들 능력도 없었다.
팽혁빈은 자신이 왔던 길을 바라봤다.
나루터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의 거리는 한나절.
대부분 가까운 마을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이곳 나루터에 들른다.
마을로 돌아가기가 여의치 않은 사람은 할 수 없이 이곳의 객잔을 이용한다.
이곳 상인들은 그 사람들의 마음을 이용한다.
할 수 없이 하루 이틀 정도 묶고 가는 객잔은 조금 비싸고 불결해도 그냥 사용한다.
팽혁빈이 마을로 돌아가야 하나, 이곳의 객잔 중 한 곳을 이용해야 하나를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그의 곁을 어슬렁거리며 슬슬 감시하는 듯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팽혁빈은 주변을 맴도는 그가 어지간히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잡아서 왜 자신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냐고 따질 수도 없는 것이, 상대는 무공을 모르는 일반 백성이었다.
그때였다.
어슬렁거리던 자가 팽혁빈의 곁으로 점점 다가왔다.
그러지 않아도 신경이 곤두서 있던 팽혁빈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자는 복장이 정갈했으며 머리에 띠를 질끈 묶은 것으로 보아, 어딘가의 점소이가 분명했다.
팽혁빈의 그제야 안심했다.
상대는 호객을 위해 접근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팽혁빈은 점소이를 무시하고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때 점소이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팽혁빈이 말했다.
“나는 마을로 돌아갔다 올 것이니 괜한 헛수고하지 말게.”
“나으리, 왜 먼 길을 가십니까? 그냥 제가 준비한 처소에 묶고 가시죠.”
“됐다고 해도 그러는군. 우릴 강호 초출로 보고 바가지를 씌우려는 것이면 일찌감치 포기하게.”
“아닙니다, 하북팽가의 대공자님 아니십니까?”
“허, 자네가 그걸 어떻게 아는가?”
“저기 깃발이 있지 않습니까?”
점소이는 손가락으로 뒤쪽을 가리켰다. 그곳에서는 하북팽가의 깃발이 마차에 꽂혀 있었다.
팽혁빈은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잠시, 팽혁빈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그는 의심 가득한 눈으로 점소이를 바라봤다.
“하북팽가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겠지. 하지만, 내가 하북팽가의 대공자라는 것은 어떻게 알았을까? 자네의 정체가 뭔가?”
“…….”
“혹시 하오문에서 왔는가?”
“…….”
점소이가 말없이 뒤로 물러났다.
질문에 답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팽혁빈의 눈빛이 너무 무서워서였다.
팽혁빈이 한 발 다가서며 다시 물었다.
“그도 아니면 사파에서 우리를 감시하라 보냈던가?”
팽혁빈이 마지막 질문을 던졌을 때, 점소이는 나루터의 끝까지 몰린 상태였다.
다급한 점소이가 소리를 질렀다.
“잠시만요, 나으리! 진정하시고요. 하북팽가에서 온 분들은 왜 다들 이렇게 성미가 급하십니까?”
“흠.”
팽혁빈은 그제야 주변을 둘러봤다.
나루터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팽혁빈이 진정하자 점소이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게 아니라, 저분들이 여기 책임자가 있으니 직접 물어보라 해서 온 것입니다요.”
점소이는 힐끔 돌아보더니 하북팽가에서 온 일행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그곳에서는 팽혁빈의 수하 중 몇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팽혁빈은 쓴웃음을 지었다.
오해를 해도 단단히 한 것이었다.
표정을 수습한 팽혁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린 됐네. 그러니 헛수고 말게.”
“그게 아니라 벌써 선금을 받았습니다.”
“…….”
팽혁빈은 말없이 점소이를 바라봤다.
점소이는 잽싸게 설명을 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
그의 설명에 팽혁빈의 눈이 커졌다. 선금을 낸 이는 다름 아닌 자신의 동생 한빈이었던 것이다.
자신에게 일을 다 몰아 준 뒤 쥐도 새도 모르게 튄 한빈을 조금은 원망하고 있던 팽혁빈이었다.
그런데 한빈이 선금을 냈다니?
팽혁빈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점소이의 설명을 다 듣고 난 팽혁빈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팽혁빈이 두리번거리자 점소이가 말했다.
“왜 그러십니까? 나으리.”
“근처에 동생이 있는 게 아닌가 해서 그런다네.”
“에이, 막내 공자님은 벌써 장하를 건넌 지 한참 됐습니다. 사천당가의 무사님들과 같이 가셨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천당가와 같이 떠났다고?”
“앗, 죄송합니다. 이건 말하지 말라고 한 건데…….”
점소이는 잽싸게 한쪽 손으로는 자신의 입을 막고 남은 한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 모습에 팽혁빈이 눈매를 좁혔다.
지금 사천당가의 행렬에 대해 떠도는 소문은 팽혁빈도 알고 있었다.
바로 천하제일의 명의를 데리고 사천당가로 돌아가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천하제일 명의라?
그것이 과연 누굴까?
한빈은 왜 그 행렬에 합류한 것일까?
사천당가가 데려간 의원이 한빈이라면?
팽혁빈은 요즘 들어 한빈의 달라진 점을 떠올려 봤다.
팽혁빈이 보기에 동생은 지략과 무공에는 후한 점수를 줄 수 있었지만, 의술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사실 지략과 무공에도 의문이 많았다.
한빈과 떨어져 지낸 것이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뭐, 몇 년이란 시간이 길다면 길 수 있지만, 그런 상승 무공을 익히기에는 불가능한 시간이었다.
거기에 지략까지?
팽혁빈은 이 모든 것을 한빈이 지금껏 숨기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술은 다르다.
의술은 혼자 배울 수 있는 분야가 아니기 때문이다.
책을 보고 상상만으로 침을 놓을 수도 없는 일이고, 책을 보고 의술을 펼친다고 해도 체질마다 적용 방법이 달라서 사람을 상대하지 않고는 실력을 늘릴 수도 없는 분야가 바로 의술이었다.
그런데 왜 사천당가와 함께 있을까?
팽혁빈의 머릿속에는 의문이 한겨울의 폭설처럼 쌓이기 시작했다.
한빈만 생각하면 지금처럼 세상이 도는 것처럼 어지러워졌다.
그때 다급한 점소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일단 저희 다루부터 들르시지요.”
“흠, 그러지.”
팽혁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점소이는 고개를 살짝 숙인 뒤 안내를 시작했다.
물론 그 점소이는 한빈을 접대했던 점소이였다.
사실 점소이는 팽혁빈이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한빈과 그 일행도 만만치는 않았다.
뭐, 한빈이 까칠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설화와 청화에게 들들 볶였으니까.
하지만, 한빈이 떠나면서 던져 준 수고비에 그 당시의 피로는 눈 녹늣 사라졌다.
불편하면서도 고마운 존재가 바로 한빈이었다.
그런데 그 형이라는 사람이 온 것이었다.
그가 올 것이라는 것은 다루의 루주로부터 이미 들은 뒤였다.
루주는 한빈과 마찬가지로 팽혁빈 역시 귀빈으로 모시라고 했다.
한빈이 선불을 주고 갔다는 것도 루주가 당부했던 말이었다.
* * *
잠시 후.
다루에 들어선 팽혁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 본 점소이도 이상했지만, 나머지 사람도 자신에게 너무 공손했기 때문이다.
팽혁빈이 아는 한, 이곳 장하 나루터에서는 볼 수 없는 행동이었다.
곧 차가 나오자, 팽혁빈은 다시 놀라야 했다.
요즘 구하기 힘들다는 북방의 화봉차가 나왔기 때문이다.
대체 얼마를 선금으로 줬기에?
팽혁빈의 머릿속에는 의문 하나가 쌓였다.
더욱 이해가 안 되는 건 자신의 수하들에게까지 화봉차를 돌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앞에 앉은 팽대위는 아무 의심 없이 차를 들이켜고 있다.
“좋구나, 좋아.”
“숙부님, 이렇게 비싼 차를 내온다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옛말에 공짜라면 구정물도 마신다는 말도 있지 않느냐? 호의는 의심하지 말자꾸나.”
“숙부님,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하시면서 왜 이건 의심하지 않습니까?”
“한빈이가 준비했다고 하지 않았느냐?”
“우리가 여기로 올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너 같으면 이 길을 놔두고 다른 길로 가겠느냐?”
“흠.”
“뭐, 그놈이 조금 별난 구석이 있긴 하지. 나도 그놈의 깊이를 모를 때가 있으니 그러려니 하자꾸나.”
“네, 알겠습니다.”
팽혁빈이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점소이가 조심스럽게 접시를 들고 왔다.
그는 접시를 여기저기에 두기 시작했다.
탁. 탁.
이어 팽혁빈의 탁자에 가장 큰 접시를 올려놨다.
탁.
접시를 본 팽혁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접시에는 당과와 찹쌀떡이 한가득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점소이는 팽혁빈의 표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활짝 웃었다.
“맛있게 드십시오. 근처에 맛있다고 소문난 가게에서 당과와 찹쌀떡은 싹 쓸어 왔습니다요.”
“허, 대체 이건…….”
“제 성의이니, 부담 갖지 말고 드십시오.”
바닥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인 점소이는 재빨리 자리로 돌아갔다.
팽혁빈과 팽대위는 탁자 위에 산더미처럼 놓인 당과와 찹쌀떡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한참을 보던 팽혁빈은 할 수 없다는 듯 당과를 집어 들었다.
점소이의 성의를 계속 무시하기도 뭐했던 것이다.
그때 주방 쪽에서 그들을 바라보던 점소이가 옆에 있는 동료에게 말했다.
“거봐요, 드시잖아요. 미리 준비하길 잘했죠?”
“그건 그렇군.”
물론 이것은 점소이의 오해였다.
과거, 설화와 청화가 점소이를 닦달하는 바람에 귀에 못이 박힌 것이었다.
그 당시에 한빈이나 다른 이들이 할 수 없이 하나 먹었던 것을 보고, 하북팽가 사람들이 모두 당과와 찹쌀떡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심각한 오류를 범했던 것이다.
* * *
이틀 뒤 사천당가의 행렬.
한빈이 지나갈 때면 사천당가의 무사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한빈이 삼 단계 독분을 먹고 쓰러졌던 사천당가의 무사를 구했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장주님.”
“식사는 하셨습니까? 장주님.”
“기침하셨습니까? 장주님.”
그들은 공자가 아닌 장주로 한빈을 부르고 있었다.
당기명과 당독대만이 이전에 불렀던 호칭을 사용하고 있었다.
하북팽가의 막내 공자라는 신분은 그들에게는 상관없었다.
천수장주이자 천하제일 의원인 한빈만이 그들의 시야에 있었다.
뭐 한빈도 그들에게 뭐라 하지는 않았다.
잘해 준다는데, 마다할 한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앞서가던 사천당가의 당기명이 외쳤다.
“모두 멈춰라! 이곳에서 쉰다.”
행렬이 멈추자 한빈이 마차에서 내렸다.
마차에서 내린 한빈은 설화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마차의 지붕을 보며 말했다.
“설화야, 비둘기 좀.”
“네, 공자님.”
설화는 부드럽게 지붕 위로 올라 새장 하나를 가져왔다.
설화의 경공술에 옆에서 지켜보던 사천당가의 무사들이 혀를 내두른다.
“와, 저게 귀신이야? 사람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하지만, 당기명이 놀란 것은 한빈과 설화의 소통이었다.
어떤 비둘기라 말하지 않았는데도 설화는 기가 막히게 알아들었으니.
뭐, 손가락 한 번 튕기는 걸로 모든 지시가 가능한 것은 말도 안 되고 말이다.
옆에서 지켜보던 당기명이 입을 벌리고 있을 때, 설화는 아무렇지 않게 한빈에게 새장을 가져갔다.
설화가 가져온 새장에는 며칠 전 적이 전서를 날리는 데 사용했던 비둘기가 있었다.
한빈은 비둘기의 다리에 전서 통을 묶었다.
그러고는 바로 날려 버렸다.
순간 당기명이 다급하게 달려왔다.
“팽 공자님.”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대체 왜 그 비둘기를 날리신겁니까?”
“적은 비둘기가 안 오면 더욱 경계할 겁니다.”
“전서에는 다음 단계를 준비하란 명령이 있지 않았습니까?”
“비둘기가 저거 하나뿐일까요?”
“그렇지만…….”
“제가 전서에 양념 좀 쳐 놨습니다.”
“예? 대체 전서에 무슨 술수를 쓰신 겁니까?”
“그건……. 비밀입니다.”
한빈은 씩 웃으며 창공을 나는 비둘기를 바라봤다.
당시 죽어 가는 비둘기를 살려 놨으니, 이제 놈이 은혜를 갚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 * *
일주일 뒤 장하 나루터의 다루 옆 객잔.
팽혁빈 일행은 전에 한빈이 묵었던 객잔에서 며칠을 보냈다.
오늘은 기다리던 배가 들어오는 날이었다.
그들은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일 층으로 내려와 있었다.
팽혁빈이 미간을 좁히며 팽대위를 바라봤다.
“숙부님.”
“왜 그러느냐?”
“숙부님은 괜찮으십니까? 전 입에서 단내가 가시지를 않습니다.”
“허허. 네 말대로 나도 단내를 없애기 위해 아침에 운기조식부터 했지. 일주일이나 당과와 찹쌀떡에 시달렸더니 나도 정신이 없구나.”
“그럼 제가 기분 상하지 않게 말해야겠습니다. 오늘 만이라도 참아 달라고 말입니다.”
그때였다.
객잔의 일꾼들이 식사를 내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빈 탁자에도 음식을 놓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팽혁빈이 점소이를 불렀다.
“내 물어볼 것이 있네.”
“왜 그러십니까?”
“혹시 더 올 손님이라도 있나?”
“아, 저 탁자에 음식 말씀하시는 거라면, 미리 준비해 놓는 겁니다. 전에도 갑자기 들이닥쳐서 얼마나 고생했던지…….”
점소이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뒷머리를 긁적이며 문밖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팽혁빈이 물었다.
“누가 오는지 말해 줄 수 있겠나?”
“전에 막내 공자님도 객잔을 떠나는 날 아침에 손님을 몰고 오시더라고요. 무림세가분들하고 개방분들까지……. 제 생각에는 분명히 오실 겁니다.”
“허허, 나는 그럴 일이 없네. 잘못하면 저 음식만 다 다 버리게 될 것이야. 자네처럼 생각하는 건 누구나 범하기 쉬운 오류일세. 그러고 보니 당과와 찹쌀떡도 그래서 내왔던 거였군.”
팽혁빈이 점소이를 보며 고개를 흔들 때였다.
객잔의 문이 열렸다.
덜컹.
문이 열리고 객잔 안으로 등에 거대한 검을 메고 있는 무인이 천천히 걸어왔다.
팽혁빈은 살짝 긴장한 채 슬쩍 자신의 칼집을 끌어당겼다.
그때였다.
그 무인이 호탕하게 웃으며 팽혁빈 쪽을 바라봤다.
“하하, 다들 여기 있었군. 팽대위 자네! 오랜만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