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265화 (265/621)
  • 265화. 친절한 주군 (4)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다시 손을 내밀었다.

    “네, 맞습니다. 양념 통이라고 했습니다.”

    “이건 그냥 양념이 아닙니다. 알고 계십니까?”

    당기명이 진지한 표정으로 묻자, 한빈이 작게 웃으며 답했다.

    “잘 모르겠지만, 향긋한 냄새가 풍겨서 그러죠. 제가 보기에는 최고급 향료 같습니다.”

    “향료가 맞긴 맞지만, 이건 보통 향료가 아니라…….”

    당기명은 굳은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그가 어쩔 줄 모르는 이유는 간단했다.

    한빈의 부탁이 황당했던 것이다.

    사천당가 무사들이 쓰는 양념 통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바로 독분(毒粉)이 담겨 있었다.

    이 독분은 조금 특별한데, 사천당가에서는 보통 독을 열 단계로 나눈다. 그중 일 단계는 보통 사람이 먹어도 해가 없다고 전해진다.

    다만 일 단계 독분은 중독의 증상이 고열로 나타난다. 마치 고뿔에 든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독이 신체에 반응해서 생기는 현상이었다.

    이 단계는 열에 더해 복통을 유발한다.

    삼 단계부터는 독의 문외한이 복용할 시, 서서히 죽어 간다.

    그렇게 해서 열 단계까지 있는 이 독분은 한 가지 성분이 아니라 여러 가지 성분이 섞어서 만들어졌다.

    사천당가가 이 독분을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독에 면역된 신체를 만들려는 의도였다.

    당기명이 지금 들고 있는 독분에는 사 단계의 독분이 들어 있었다.

    웬만한 독으로는 중독되지 않는 단계에 이르렀기에 쓸 수 있는 독분이었다.

    무사 중에는 일 단계의 독분을 넣어 다니는 자도 있었고, 이 단계의 독분을 들고 다니는 자도 있었다.

    당독대만이 그들 중 유일하게 삼 단계의 독분을 넣고 다닌다.

    독이라는 게 어찌 해가 없겠느냐만은, 음식을 먹을 때마다 이런 식으로 소량으로 넣는다면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적응을 하게 마련이었다.

    이것은 어찌 보면 사천당가의 비법이지만, 다른 세가에서는 정보를 얻는다고 해도 따라 할 엄두를 못 내는 방법.

    물론 중요한 것은, 독의 성분을 어떻게 적절히 조합하느냐? 그 성분을 한 번에 얼마나 복용하느냐? 등이 진짜 비법이었다.

    또한 이 비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천독이나 청화가 겪었던 탈모 현상을 방지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것이 사천당가가 자랑하는 독에 대한 면역 수련법이었다.

    그런데 독에 면역이 없는 자가 독분을 음식에 뿌려 먹는다면?

    뒷일을 상상한 당기명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그것도 잠시 당기명은 자신이 들고 있는 독분과 한빈을 바라봤다.

    당황한 당기명의 모습에 한빈이 말했다.

    “그렇게 당황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

    “혹시 아까워서 그런 거라면 안 주셔도 되고요.”

    “미안하지만, 이건 우리 가문의 수련법이 녹아 있는 물건입니다. 말하자면 비급과도 같은 물건입니다.”

    “허, 죄송합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요.”

    “도움을 못 드려서 송구합니다, 팽 공자님.”

    당기명이 살짝 고개를 숙이자, 한빈이 손을 흔들었다.

    “괜찮습니다.”

    말을 마친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자리로 돌아갔다.

    당기명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휴.”

    그의 한숨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사실 독분을 내어 주어 한빈을 시험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행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빈이었다.

    한빈이 탈이 난다면?

    당기명은 어깨를 움츠렸다.

    그때 그의 당독대가 토끼구이를 든 채 다가왔다.

    “무슨 일입니까?”

    “팽 공자님이 독분을 달라더구나.”

    “네? 혹시 적이라도 나타났습니까?”

    “그게 아니라 아무래도 토끼구이에 뿌려 드시려는 것 같다. 이게 독분인지도 모르는 것 같더구나. 흠.”

    “아, 뿌려 드신다고요? 그러니까 여기에…….”

    당독대는 슬쩍 말끝을 흐리며 자신이 든 토끼구이를 바라봤다.

    그것도 잠시 당독대는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독분을 처음 맛봤던 때가 생각난 것이었다.

    기쁨은 혼자만 간직하고 싶기 마련이지만, 고통은 나누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었다.

    당독대는 재빨리 어디론가 달려가더니 양념 통을 가져왔다.

    양념 통 위에는 반(半)이라는 글자가 써 있었다.

    당독대는 양념 통을 보여 주며 말했다.

    “이거라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당기명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이것은 일 단계의 독분을 희석한 가루였다.

    일 단계보다 더 약한 독분을 만든 이유는 간단했다.

    독에 대해 선천적으로 약한 무인의 경우, 일 단계의 독분을 견디는 것도 버겁기 때문이다.

    이 반 단계의 독분은 약간의 어지러움만 나타난다.

    이거라면?

    고민도 잠시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안 된다. 팽 공자님이 탈이라도 나면 모든 게 허사다.”

    “흠,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

    “그러니까…….”

    당독대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계획을 밝혔다.

    그의 계획은 간단했다.

    한빈의 수하들에게만 시험해 보자는 것이었다.

    적혈맹호대라 불리는 세 명, 즉 소대섭과 장삼 그리고 조호였다.

    이렇게라도 해서 한빈의 수준을 간접적으로나마 시험해 보고 싶은 당독대였다.

    당독대는 한빈의 수준이 가늠되지 않았다.

    뭐, 정확히 말하면 수준이랄 것도 없었다. 당독대는 천수장주인 한빈에 대한 세간의 평을 믿지 않았다.

    모든 것은 사람들의 착각에서 벌어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한빈을 사천당가로 데려가는 것 자체가 쓸데없는 짓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그는 당기명에게 충언까지 몇 번 고한 적 있었다.

    하지만 그 충언은 단칼에 잘렸다.

    그 후에는 더는 당기명에게 조언하지 못했다.

    만약 한빈이 천하제일의 의술을 가지고 있다면 그 수하들도 반 단계 독 정도는 견딜 수 있을 것이다.

    천하제일의 의원이라면 약초와 독초를 직접 체험했을 것이다. 그것이 해독약을 만드는 지름길이니까.

    화타도 그랬고 백년 전 천하제일의라 불리는 만수신의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수많은 독초를 맛봤다고 한다.

    만약 한빈의 수하들이 반 단계 정도의 독분을 견딘다면 당독대도 한빈을 인정할 것이었다.

    당독대는 모이를 기다리는 제비처럼 당기명의 입술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그때 당기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뜻대로 해라.”

    당기명도 당독대와 사천당가 무사들이 한빈과 그 수하들에 대해 의심을 지우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정도는 짚고 넘어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당독대가 반색하며 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공자님.”

    “단, 팽 공자나 그의 시녀들에게 해가 가지 않도록 주의하도록.”

    당기명은 유난히 시녀라는 단어에 힘을 주었다.

    당독대가 고개를 갸웃했다.

    “뭐, 시녀들이야 튼튼한 것 같은데요.”

    “저길 봐라. 저 아이는 언제 쓰러질지 모를 위태로운 모습이질 않느냐?”

    당기명이 가리킨 것은 청화였다.

    청화를 바라보는 당기명의 눈은 예사롭지 않았다.

    그야말로 측은지심을 담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청화는 왠지 모르게 안타까웠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묘하게 어미를 잃은 산짐승을 보는 것만 같았다.

    당기명의 눈빛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당독대는 반 단계짜리 독분이 든 양념 통을 가지고 소대섭이 있는 자리로 향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소대섭의 옆에 앉았다.

    털썩.

    난데없는 기척에 소대섭이 힐끔 고개를 돌렸다.

    당독대를 확인한 소대섭은 눈을 크게 떴다.

    “수하들은 놔두고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소 대주님하고 한잔하고 싶어 왔습니다.”

    말을 마친 당독대는 술병과 술잔을 내려놨다.

    소대섭은 내려놓은 술잔을 자연스럽게 잡았다.

    졸졸졸.

    마치 계곡에서 물이 떨어지듯, 술이 시원하게 잔을 채웠다.

    둘은 기분 좋게 술잔을 들이켰다.

    “캬, 좋습니다.”

    소대섭이 기분 좋게 웃으며 토끼구이를 베어 물려 하자, 당독대가 양념 통을 꺼내며 말했다.

    “잠시만 기다리시죠. 이건 당가의 비법이 녹아 있는 향신료입니다. 이걸 뿌려 드시면 더욱 맛날 겁니다.”

    “오호,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소대섭은 아무렇지 않게 토끼구에 건네받은 양념을 뿌렸다.

    툭. 툭.

    기분 좋게 양념을 뿌린 소대섭은 한 입 베어 물더니 탄성을 터뜨렸다.

    “와! 말씀하신 대로 맛이 한층 더 살아납니다.”

    “하하, 그렇지요. 다른 분께도…….”

    당독대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소대섭은 장삼과 조호를 불렀다.

    “너희도 이걸 뿌려 봐라.”

    “네, 감사해요.”

    “고맙습니다, 대주.”

    장삼과 조호도 기분 좋게 뿌렸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바람처럼 조호의 손에서 양념 통을 낚아챘다.

    “너희들만 좋은 걸 먹으면 어떡해?”

    그 목소리에 모두가 뒤쪽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한빈이 웃으며 서 있었다.

    그 모습에 조호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죄송해요, 주군. 좋은 게 있으면 항상 주군께 바치려고 했는데, 소대섭 대주가 주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조호는 소대섭에게 공을 넘겼다.

    소대섭은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이건 당독대 대주가 제게 준 겁니다.”

    소대섭이 당독대를 가리키자 한빈이 피식 웃었다.

    “아까 당 공자는 안 주려고 하더니. 당독대 무사는 호위대를 이끌고 있는 만큼 아량이 넓군. 이건 잘 쓰겠네.”

    한빈은 양념 통을 흔들었다.

    그 모습에 놀란 당독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팽 공자님, 그건…….”

    그는 말을 맺지 못했다.

    한빈은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러고는 여기저기를 누비며 반 단계짜리 독분을 사람들에게 나눠 주기 시작했다.

    처음에 나눠 준 것은 원경과 그 일행이었다.

    그러더니 악비광에게도 나눠 줬다.

    반 단계짜리 독분 양념을 뿌린 고기를 베어 문 사람들은 연신 환호성을 토해 냈다.

    “정말 맛있는데!”

    “와, 이런 향신료가 있었어?”

    “이런 좋은 걸 두고 사천당가 무사들은 자기들끼리만 꿀꺽하려 한 거야?”

    “에이, 가문의 비기가 담긴 양념이라잖아.”

    “허, 혹시 집안에 황실의 숙수라도 모셔다 둔 거야?”

    그때 광개가 한빈에게 다급하게 다가왔다.

    “나도 좀 맛볼 수 있겠나? 친구.”

    “너는 또 왜?”

    “흠, 왠지 자존심이 상해서…….”

    광개는 한빈이 든 양념 통을 바라봤다.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토끼구이 하나만은 중원 최고라 자부하는 광개였다.

    그런데 그 자존심에 실금이 간 것.

    그도 그럴 것이 이 독분에 섞인 향신료는 독향을 없애기 위해 엄청난 정성이 들어가 있었다.

    금가루를 뿌려 놨다고 해도 거짓말은 아니었다.

    한빈은 광개가 들고 있는 고기에도 양념을 듬뿍 뿌려 줬다.

    툭. 툭.

    광개에게 양념을 털어 낸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라? 다 떨어졌네. 나도 못 뿌렸는데…….”

    “미안하네, 친구.”

    광개는 자신의 토끼구이를 빼앗기기 싫은지 재빨리 한빈에게 떨어졌다.

    당독대는 갑작스러운 이 상황에 석상이 되어 버렸다.

    한빈의 수하만 시험하려 했는데 악비광과 광개에게까지 독분을 다 털어 버린 것이다.

    그때 한빈이 당독대의 앞에 나타나 빈 통을 건넸다.

    “양념 잘 썼습니다.”

    “아, 네.”

    당독대는 황당했지만, 할 수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당기명의 말대로 한빈과 시녀에게는 반 단계짜리 독분을 쓰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비난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반 단계짜리 독분이지만, 이후 미칠 파장은 상상도 되지 않았다.

    당독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동료가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그때였다.

    고개 숙인 당독대의 앞에 싸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놀란 당독대는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앗, 공자님.”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제가 말릴 틈도 없이…….”

    당독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당기명이 검지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게 아니라, 저건 뭐냐는 말이야.”

    “그게 무슨 말씀인지…….”

    당독대는 당기명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봤다.

    한빈이 양념 통을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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