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화. 친절한 주군 (3)
광개는 그들이 들고 있는 새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두 마리는 하남분타로 바로 날아올 것이고, 이놈은 네가 영단산에서 날린 놈이야. 이놈의 용도는 네가 더 잘 알 테고.”
광개의 지시에 따라 장오가 비둘기를 마차 위 새장에다 옮기고 있을 때였다.
악비광이 고개를 갸웃했다.
“형님이 보냈다는 전서에는 대체 무슨 내용이 써 있었습니까?”
광개는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비둘기를 가지고 와서 영단산 밑에서 대기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건 왜 물으십니까?”
“허.”
“아, 궁금하게…….”
“우리 형님이 누군가한테 이상한 내용으로 전서구를 날렸다고 협박했거든요.”
“그게 팽 공자 특기지요.”
“그런데 전혀 다른 내용이 써 있었다는 게 황당해서 그럽니다. 목숨이 두 개도 아니고…….”
그때 뒤에서 한빈이 나타났다.
갑자기 얼굴을 들이밀자, 광개와 악비광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눈치만 봤다.
그때 한빈이 말을 이었다.
“무엇을 썼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상대가 어떻게 믿고 있냐가 중요한 것이지. 그리고 너희, 지금 내 욕한 거 맞지?”
그 말에 광개와 악비광은 입을 크게 벌렸다.
한참을 입을 다물지 못하던 광개가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고는 잽싸게 화제를 돌렸다.
“심 부대주는 어디 갔어? 심 부대주가 음식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하던데.”
“심 부대주는 밥값 하러 갔지.”
“밥값? 뭔 밥값?”
“그건 비밀이야.”
“아.”
광개는 할 수 없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화제를 돌려서 위기에서 벗어난 것만 해도 행운이라 생각했다.
* * *
같은 시각, 심미호는 금의위의 수장 강유찬을 따라 사천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은 본의 아니게 말을 타야 했다.
시간에 맞춰서 사천에서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적혈맹호대 중에는 말을 처음 타는 이들도 있었다.
딱가닥. 따다닥.
말발굽 소리에 맞춰서 그들의 엉덩이가 들썩인다.
적혈맹호대 중에 누군가가 외쳤다.
“심 부대주님, 조금 쉬었다 가자고 부탁 좀 해 주십시오!”
“어디가 불편한데?”
“엉덩이에 불이 날 것 같습니다.”
“그럼 엉덩이에 내공 깔아.”
“아, 부대주님, 엉덩이 밑으로 어떻게 내공을 깔 수 있습니까?”
“못 깔아?”
“…….”
“그럼 수련이 부족한 거야. 주군이 항상 말씀하셨지. 뭔가 부족한 게 느껴진다면 그건 수련이 부족한 거라고.”
“아무리 그래도…….”
“너희, 마빡에는 내공 끌어올리잖아.”
“네, 그건…….”
그는 말끝을 흐렸다. 심미호의 말이 전적으로 맞았기 때문이다.
머리를 무기로 쓴다는 철두공(鐵頭功)을 익힌 것은 아니었다. 그저 천수장에 들어와 처음 수련을 시작했을 때, 머리를 하도 박아 대서 저절로 머리를 보호하는 법을 알게 된 것이다.
그의 표정에 심미호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거봐. 하면 되잖아. 혹시 알아?”
“뭘요? 부대주님.”
“주군이 너희 엉덩이 쪽에도 진기를 돌릴 수 있도록 배려한 걸 수도 있잖아.”
“심 부대주님, 그건 좀…….”
“그럼 나 먼저 간다. 목적지가 코앞이니 힘내자고 다른 녀석들에게도 전해.”
“네, 알겠습니다.”
수하는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고삐를 잡았다.
심미호는 수하의 모습에 빙긋 웃었다.
그러고는 재빨리 속도를 높였다.
휘이잉.
심미호의 말이 투레질하며 앞으로 달려나가자, 모든 것을 보고 있던 강유찬이 혀를 찼다.
금의위도 전부 도망갈 정도로 무림세가에서 무사들을 굴리고 있다? 사실 이건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무림세가의 무사라고 해 봤자 그 끝은 정해져 있었다.
모시는 직계 공자가 가주에 올랐을 경우, 그중 한둘만이 각주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것이 끝이었다. 그런데 자신을 따라온 적혈맹호대를 보면 진심을 다하는 것 같았다.
문제는 그곳에서 생겼다.
그들이 진심을 다하자 강유찬이 데려온 금의위 무사 몇이 오기가 생겨서 더욱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덕분에 일정의 진행이 두 배는 더 빨라졌다.
이 말도 안 되는 속도는 금의위와 적혈맹호대의 경쟁 때문이었다.
이 경쟁이 언제까지 될지는 강유찬 자신도 몰랐다.
심미호가 포기하지 않는 한, 강유찬도 수하에게 포기하라 권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물론 강유찬이 심미호나 적혈맹호대와 경쟁하고 싶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묘하게 투쟁심을 일으키는 것은 한빈이었다.
단시간에 이렇게 수하들의 의지를 최상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자신도 못 할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때 문득 심미호가 한 말을 떠올리고 슬쩍 운기를 해 봤다.
스르륵.
화산의 최고 심법 중 하나인 자화신공이 단전에서부터 불끈 솟구친다.
그는 강호 출신의 무관이기에 심미호가 말한 마빡에 기를 모은다는 게 가능한지 궁금했던 것이다.
강유찬은 그 진기를 슬쩍 이마로 흘려보냈다.
스스슥.
흘러가던 진기는 중간에 끊겼다.
뭐지?
솔직히 마빡에 내공을 모을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쉽다고 생각한 이 한 수가 묘하게 어려웠다.
심미호의 거짓말일까?
강유찬은 앞서가는 심미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것도 잠시 그는 뒤를 돌아 지나온 길 너머를 응시했다.
그곳은 한빈이 지나올 길이었다.
한빈은 정말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이번 부탁도 그렇고 말이다.
* * *
한빈 일행은 잠시 소란을 뒤로한 채 모두 그늘에서 식사 준비를 했다.
밥을 얻어먹고 가려던 광개는 한빈의 성화에 토끼구이를 만들어야 했다.
물론 옆에 있던 악비광도 따라가야 했다.
이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한빈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으니까.
사천당가의 무사들은 자신이 마련해 온 건량을 솥에 풀어 놓고 국을 만들기 시작했고, 소대섭은 남은 적혈맹호대 대원들과 밥을 지었다.
물론 직접 밥을 짓는 것은 원경과 새로 온 무리였고 소대섭은 이를 감독했다.
밥을 짓는 원경은 지금 미칠 지경이었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정도로 불안한데 이들은 편하게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문제는 원경의 촉이 여길 떠나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길의 끝에는 고수의 길이 기다리고 있다고 감이 말해 주고 있었다.
뭐, 일은 고되지 않았다.
천하의 사천당가 무사들이 국과 반찬을 마련하고 개방의 분타주가 토끼를 잡으러 다니는 상황인데, 수적도 되지 못한 원경이 그들과 똑같이 식사를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은 영광이었다.
그때 원경은 힐끔 한빈을 바라봤다.
뭐지?
원경은 눈매를 좁혔다.
다른 사람들은 다 일을 시켜 놓고 혼자서만 그들에 앉아 먼 산을 바라보고 있다니?
사천당가의 당기명은 그래도 팔짱을 끼고 관리 감독을 하고 있지 않은가?
왠지 수하들에게 관심이 없는 것 같아 좀 섭섭했다.
그때 소대섭이 원경의 어깨를 탁 쳤다.
“무엇을 그렇게 보고 있나?”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원경은 손을 휘휘 내젓자, 소대섭은 알았다는 듯 말했다.
“주군은 우리에게 관심이 없는 게 아니다.”
“아, 어떻게 제 마음을…….”
“나도 한때는 그랬으니까.”
“그럼 저희를 몰래 지켜보고 계신 거군요.”
“그건 아니란다. 아마 우리가 하는 일에는 신경을 끊고 계실 거다.”
“그럼 관심이 없으신 거잖아요?”
“주군이 왜 우리를 지켜보지 않는 줄 아나?”
“저는 모르겠습니다.”
“주군은 항상 이렇게 말씀하셨지. 과정은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결과만이 중요하다.”
“앗, 뭔가 불가나 도가의 문파에서 말하는 거랑은…….”
“그러니까. 밥이 맛있으면 장땡이요, 밥이 타면 너와 네 동료는 죽는다는 거지. 원경아, 밥 탄다.”
“헛!”
원경은 다급하게 밥이 익어 가는 가마솥을 바라봤다.
그때 광개와 악비광이 돌아왔다.
악비광은 피워 놓은 모닥불 주위로 번개 같은 속도로 나뭇가지를 꼽았다.
탁. 탁.
산동악가의 최고 비기인 악룡비참을 응용한 초식이었다.
안정적으로 나뭇가지가 박히자 옆에 있던 광개는 남은 나뭇가지로 손질된 토끼를 꿰기 시작했다.
파, 바, 팍!
눈 깜짝할 사이에 모두가 먹을 만큼의 토끼가 모닥불 위에서 소리를 내며 익어 가고 있었다.
지글지글.
광개는 익어 가는 토끼 고기 위에 양념을 살짝 뿌렸다.
비린내를 없애 주는 광개만의 비법이었다.
양념을 뿌리자 군침이 넘어갈 정도의 향기가 주변으로 풍겼다.
광개는 뿌듯한 표정으로 토끼구이를 바라봤다.
그때였다.
광개의 옆에 작은 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린 광개는 갑자기 나타난 하얀 형태에 깜짝 놀랐다.
“앗, 뭐야?”
“왜 그렇게 놀라세요? 거지 아저씨.”
“아, 설화구나. 내가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그렇게 기척 없이 나타나지 말아라. 그러다 큰일 난다고.”
“우리 공자님이 시녀는 원래 기척 없이 다니는 거라고 했어요.”
“허.”
광개는 어이가 없었다. 기척이 없는 것도 정도가 있지, 설화처럼 이렇게 다니면 천하 십대고수도 자다가 까무러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뭐라 할 수 없는 것이, 설화의 행동은 세가의 시녀가 대부분 지킨다는 예의가 아니던가.
자리에 있지만, 없는 듯 하라는 건 시녀가 지켜야 할 본분 중 하나였다.
광개는 설화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설화는 광개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모른 채, 목울대를 꿀렁이며 침을 삼키고 있었다.
광개는 고개를 갸웃했다.
침을 삼키는 설화의 모습에 뭔가 이상했던 것이다.
뭐, 자신의 요리를 보고 침을 삼키는 것은 당연했지만, 뭔가 그 모습이 낯설었다.
그런데 그게 무엇인지 광개는 찾을 수 없었다.
호기심이 머리 한쪽을 차지하니, 광개는 발을 구르며 그 원인을 찾으려 노력했다.
그때 청화도 소리 없이 나타났다.
묘하게 낯설다는 감정이 한층 더 깊어 갔다.
그때 누군가 광개의 옆구리를 찔렀다.
고개를 돌려 보니 악비광이다.
광개와 시선이 마주친 악비광은 열심히 손짓했다.
손짓을 보면 싸움을 묘사하는 것 같았다.
그러고는 손으로 뭔가를 감싸 쥐었다.
그것을 본 광개의 눈이 커졌다.
광개는 재빨리 설화에게 다가갔다.
“설화야.”
“네, 거지 아저씨.”
“아까 말이다. 청화하고 너하고 둘이서 죽어 가는 비둘기 때문에 우리 둘을 막아서지 않았느냐? 생명이 소중함이 어쩌고저쩌고하면서.”
“네, 그랬죠.”
그 말에 광개는 눈을 빛냈다.
반 시진 동안 설화에게 잔소리를 들었던 일이 떠오른 것이다.
이제는 복수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한낱 시녀에게 당하고 살 광개가 아니었다.
자신에게 복수의 기회를 준 악비광이 고마웠다.
주먹을 말아 쥔 광개는 자신 있게 물었다.
“그런데 토끼도 같은 생명이거늘, 너는 지금 침을 삼키고 있지 않느냐?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느냐?”
“그게 왜 이상해요?”
“허허, 같은 생명이 아니더냐?”
“거지 아저씨는 강호의 법도를 모르세요?”
“허허, 거기서 왜 강호의 법도가 나오느냐?”
“생각해 보세요. 생사결에서는 상대를 죽일 수 있지만, 비무에서는 안 그러잖아요.”
“그야 그렇지.”
“지금 토끼는 대결로 치면 생사결이에요. 저 토끼를 안 먹으면 제가 죽거든요. 그리고…….”
설화의 말에 광개는 입을 벌렸다.
그 논리에 한 치의 허점도 없었던 것이다.
광개는 자신도 모르게 한빈을 바라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에게 배운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때 설화가 목소리를 높였다.
“아저씨, 고기 타요.”
“아, 알려 줘서 고맙다.”
광개는 재빨리 토끼구이를 뒤집었다. 설화에게 당했는데도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그러고 보니…….
광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설화가 처음으로 거지라는 호칭을 뺐기 때문이다.
설화가 자신의 마음을 부침개 뒤집듯 뒤집었다는 것은 느끼지 못한 채 광개는 연신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모두가 모이자 제법 그럴듯한 자리가 만들어졌다.
다만 사천당가의 무사들은 한쪽에 모여 앉았다.
광개의 토끼구이를 들고 군침을 흘리는 것은 똑같지만, 그들은 묘한 행동을 했다.
품속에서 각자의 양념 통을 꺼내 든 것이다.
툭. 툭.
그들은 양념 가루를 토끼구이 위에 뿌렸다.
당기명도 당독대도 그 밑에 수하들도 똑같은 행동을 했다.
그때 당기명의 옆에 한빈이 나타났다.
“그 양념 통 좀 빌려주시겠습니까?”
“네? 지금 양념 통이라고 하셨습니까?”
당기명은 튀어나올 듯한 눈으로 한빈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