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친절한 주군 (1)
한빈이 별일 아니라는 듯 답했다.
“아, 이거? 오호단문도.”
“헉, 그게 무슨 오호단문도예요?”
설화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한빈이 종이 위에 써 내려간 내용을 다시 확인했다.
종이 위에는 끊어진 듯한 문장 몇 개뿐이었다.
그 문장만으로는 말이 되지 않는 그런 형태의 글이 종이 곳곳에 적혀 있었다.
설화가 황당하다는 듯 내용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이게 오호단문도라고 해도 어떻게 알아봐요?”
이 말은 사실이었다.
마음 내키는 대로 백지 중간중간에 글자를 써넣은 것이 어떻게 가문의 비급이 될 수 있는가?
마치 글을 처음 배운 아이가 장난을 친 것 같았다.
설화의 표정에 한빈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필요한 사람은 알아먹겠지.”
“그러면 그렇다 치고, 한 가지 더 궁금한 게 있어요.”
“그게 뭔데?”
“오호단문도가 멀쩡하게 있는데 이걸 왜 또 적어요?”
“그건 특급 비밀이니 당과 하나 주면 가르쳐 주지.”
“…….”
설화는 말없이 당과를 넣어 둔 보따리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바로 고개를 저었다.
“에이, 됐어요. 공자님.”
설화가 보기에 오호단문도와 관계된 정보는 당과 하나도 아까운 정보였다.
가주 팽강위가 이 사실을 안다면 놀라 자빠질 것이었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은 한빈은 붓을 놓고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그때였다.
눈매를 좁힌 한빈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한빈의 시야에 황색 먼지구름이 들어왔다.
누군가 한빈이 있는 곳으로 달려오고 있는 것이다.
말발굽 소리도 들리지 않고 하다못해 발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한빈이 예상되는 인물은 하나였다.
먼지구름이 점점 가까워지자, 한빈이 씩 웃으며 외쳤다.
“여기서 잠시 쉬어 가죠!”
순간 그 말을 당기명이 받았다.
“모두 멈춰라!”
순간 한빈의 행렬이 그 자리에서 멈췄다.
한빈이 마차에서 나와 팔짱을 끼고 먼지구름을 바라봤다.
한빈의 옆에 있는 악비광은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창대를 고쳐 잡고 있다.
그 모습에 한빈이 말했다.
“비광아, 창 치워라.”
“적일지도 모릅니다.”
“적 중에 저런 독특한 냄새를 풍기는 자를 본 적은 없다.”
“냄새라니요?”
“나중에 알게 될 테니 미리 묻지 마.”
“형님, 그럼 아군이란 말입니까?”
“아마도 지금은 아군일걸.”
말을 마친 한빈이 어깨를 으쓱했다.
돌아선 한빈은 묘한 표정으로 앞으로 걸어갔다.
그 순간 황토색 먼지구름이 걷혔다.
옆에 있던 악비광은 코를 씰룩하더니 재빨리 숨을 멈췄다.
한빈의 말대로 앞쪽에서는 악취가 풀풀 풍겨 왔기 때문이다.
악비광은 눈매를 좁혔다.
저런 악취를 풍길 인물이라면 개방밖에 없었다.
악비광의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빈은 손을 휘휘 저어 먼지를 몰아냈다.
그러고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전서구 보낸 지가 언젠데 이렇게 늦게 왔어?”
“켁.”
상대는 대답 대신 가래침을 바닥에 뱉었다.
한빈이 눈매를 좁혔다.
“지금 그건 무슨 짓이지? 나한테 혹시 불만이라도 있는 거냐? 광개.”
먼지구름의 주인공은 광개였다.
광개는 전서를 받고 급하게 달려오는 길이었다.
광개가 원망 어린 눈빛으로 한빈을 바라봤다.
“이 망할 놈아, 먼지를 먹으면서 이렇게 달려왔는데 입에 쌓인 먼지도 내 맘대로 못 뱉냐?”
이것은 광개의 진심이었다.
한빈이 보낸 전서구 때문에 입에 들어오는 먼지도 뱉어 낼 틈 없이 급하게 달려온 것이다.
하지만 한빈의 표정은 시큰둥했다.
“그러니까 수행이 부족한 거라니까. 그렇게 먼지를 일으키면서 오는 게 구걸십팔보의 오의는 아니잖아.”
“누가 몰라서 먼지를 피우는 거냐? 내 실력이 안 되는데 어떡하냔 말이다. 사람을 불러 놨으면 용건부터 말을 해야지.”
“일단 이것부터 받아라, 광개.”
한빈이 뒤쪽에서 대나무 통 하나를 꺼냈다.
순간 광개의 눈빛이 달라졌다.
마치 맑은 연못에 보름달이 뜬 것처럼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냈다.
“그건 대체 무슨 술이냐? 흘러나오는 향기를 보면 보통 술이 아닌 것 같은데…….”
“북해의 화령주다. 몇 병 못 구했는데, 그중 하나를 주는 거다.”
“헉, 북해의 화령주? 한 잔만으로도 북해의 찬바람을 느낄 수 있다는…….”
광개는 화령주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정보를 늘어놓았다.
이런 행동에는 이유가 있었다.
북해의 화령주는 북해빙궁에서 핀다는 꽃들의 영혼을 담아서 만들었다는 명주였다.
물론 꽃의 영혼을 담을 수는 없었다.
그 정도로 정성을 다해 빚었다는 뜻이었다.
한빈이 손을 내저었다.
“그래, 그러니 아껴 먹든지 지금 다 먹든지 네 마음대로 해.”
“고, 고맙다.”
화령주를 건네받은 광개의 손이 떨렸다.
한빈은 고개를 돌려 영단산을 바라봤다.
이 화령주는 흑의살풍이 준 것이었다.
북해로 떠난 산서삼살의 둘째 빙혈서생이 한빈에게 전하라 보내온 것이라 했다.
깨달음을 줘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어떤 깨달음을 줬는지 한빈도 알 수는 없었다. 이유야 어쨌든 명주를 마다할 한빈이 아니었다.
한빈은 그중 일부를 대나무 통에 덜어 광개에게 건넨 것이다.
홍칠개 덕분에 광개가 요즘 이리저리 구르고 있다는 것을 한빈도 알고 있었다.
지금은 당근이 필요할 때였다.
감격해서 손까지 떠는 광개를 보며 피식 웃은 한빈은 품속에 손을 집어넣어 서찰을 꺼냈다.
“하북팽가의 행렬은 파악하고 있지?”
“그럼, 당연하지.”
“이 서찰 좀 내 형님께 전해라. 괜히 펴 보지 말고.”
“흠.”
“잘못하면 주화입마에 빠질 수도 있다.”
“그래, 알았으니 걱정하지 말아라.”
고개를 끄덕인 광개는 길가로 가더니 자리에 철퍼덕 앉았다.
그 모습에 한빈이 물었다.
“안 가고 뭐 해?”
한빈이 고개를 갸웃하자 광개가 눈을 끔벅이며 말했다.
“친구, 여기까지 불렀으면 밥이라도 먹여야지. 그냥 보내려고?”
“흠, 이거 좀 난처하게 됐는데…….”
“왜? 밥이 아까워서?”
“밥이 아까울 리가……. 그만큼 굴리면 되는 게 강호의 법칙 아니야?
“헉, 무슨 강호의 법칙이 그렇게 살벌하냐?”
“다른 건 아니고, 이 행렬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뒤에 있는 분이거든.”
말을 마친 한빈은 뒤쪽을 가리켰다.
그곳에서는 당기명이 황당하다는 듯 광개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빈의 말은 진심이었다.
이 행렬의 주인은 사천당가였다.
천수장의 장주인 한빈을 호위해서 무사히 가문까지 돌아가게 하는 것이 당기명의 임무였다.
그런데 영단산을 벗어난 지도 얼마 안 되었는데 갑자기 밥을 먹자니!
이건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었다.
당기명은 재빨리 한빈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한시가 급한데 여기서 지체할 수는 없습니다. 저분은 대체 누구시기에…….”
그가 말을 맺기도 전에 광개가 앞으로 나왔다.
“개방 하남분타의 분타주, 광개라고 합니다.”
“흠.”
광개를 본 당기명이 눈을 가늘게 뜨며 현재 상황을 정리했다.
그가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지금 하남을 벗어나려면 아직 한참 남은 상태였다.
만약 개방의 도움을 받는다면?
당기명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급하게 영단산을 벗어나느라 말들도 지쳤으니, 여기서 쉬어 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듯싶습니다. 일단 그늘로 자리를 옮기시죠.”
그때 악비광이 불쑥 끼어들었다.
“형님, 저도 이 행렬에 지분이 있을 듯한데 제게도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개방의 일개 분타주가 무엇이길래 행렬을 멈추고 음식까지 대접한다는 말입니까?”
악비광의 말에 주변의 공기가 싸늘해졌다.
한빈은 팔짱을 끼고 슬쩍 뒤로 물러났다.
전생에도 이와 똑같은 일이 있었다.
거지답지 않게 돈에 미친 광개나, 생긴 거와 다르게 여자에 미친 악비광은 서로 다르면서도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둘 다 무공에 미쳤다는 점이었다.
전생에도 보자마자 날을 세우며 대화를 시작했었다.
그 끝은 비무였고 말이다.
지금이라고 다를까?
한빈은 그러려니 하고 쪼그려 앉았다.
아니나 다를까, 광개가 타구봉을 앞으로 내밀며 답했다.
“나는 개방의 광개라고 한다. 불만이 있으면 말로 하지 말고 이걸로 얘기하는 게 어때?”
광개는 타구봉을 바닥에 내리쳤다.
팡!
순간 바닥에 쌓였던 먼지가 뿌옇게 피어올랐다.
그때 악비광이 장창을 돌리기 시작했다.
휙, 휙.
장창을 바람개비처럼 돌리자 뿌옇게 피어올랐던 먼지가 광개 쪽으로 날아갔다.
조금이라도 손해 보지 않겠다는 행동.
악비광이 입꼬리를 올리며 외쳤다.
“좋지!”
순간,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자신의 병기를 내뻗었다.
슝!
붕!
광개와 악비광은 서로 잘났다는 듯 화려한 초식으로 서로의 급소를 노렸다.
팡, 팡.
둘의 밟는 진각 소리에 한빈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
이건 자신이 말릴 수 없는 문제였다.
한빈의 한숨이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가 어깨를 톡톡 쳤다.
고개를 돌려 보니 당기명이 입 모양으로 묻고 있다.
무슨 일이냐는 뜻이다.
한빈은 당기명에게 그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조금 걸리니까, 잠깐 앉아서 구경하세요.”
“말려야 하지 않을까요?”
당기명은 불안한지 연신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에 한빈이 말했다.
“뭐, 언젠가는 한판 붙어야 할 인간들입니다. 한나절은 가야 할 테니 구경하다가 피곤하면 그늘에서 좀 쉬십시오.”
“아무리 그래도…….”
당기명은 말꼬리를 흐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한빈도 같이 고개를 갸웃했다.
타구봉과 장창이 내던 소리가 멈춘 것이다.
안개가 걷히자 광개와 악비광이 동작을 멈춘 상태에서 황당하다는 아래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래쪽에는 아직 먼지가 뿌옇게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먼지가 사라지자 아래쪽을 향하고 있던 그들의 타구봉과 장창이 드러났다.
그들의 병기는 붉은색 단검에 막혀 있었다.
그들의 싸움을 막아선 것은 설화였다.
먼지가 조금 더 가라앉자 설화가 무엇 때문에 싸움을 말렸는지 알 수 있었다.
설화의 아래에는 청화가 뭔가를 감싸고 있었다.
설화가 아무렇지 않게 장창과 타구봉을 쳐 냈다.
툭.
눈을 가늘게 뜬 설화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둘에게 말했다.
“아무리 싸움이 좋아도 주변은 돌아봐야죠!”
설화의 외침에 광개가 타구봉을 거둬들이고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갑자기 끼어든 저 아이 잘못이지, 왜 우리가 잘못이란 말이오?”
“그건 그렇지. 비무를 벌이는 중 갑자기 난입하는 법이 대체…….”
악비광도 거들었다.
그 모습에 설화가 반문했다.
“비무가 아무리 중요해도 생명보다 더 중요한가요?”
“생명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광개가 고개를 갸웃하자 설화는 청화를 일으켰다.
일어난 청화는 조심스럽게 손바닥을 폈다.
그곳에는 날개에 상처를 입은 듯한 비둘기 한 마리가 파닥거리고 있었다.
모두가 입을 벌리고 비둘기를 바라보고 있을 때, 설화가 말을 이었다.
“이게 생명이 아니면 뭐예요?”
“아무리 그래도 비둘기 한 마리 때문에…….”
“비둘기하고 거지 아저씨하고 뭐가 다르죠? 똑같은 생명이잖아요. 생각해 보세요. 불경에서도…….”
설화는 한바탕 설교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옆에 있는 청화는 상처 입은 비둘기를 쓰다듬고 있었고 말이다.
그 모습에 한빈은 입을 벌렸다.
전생과 많이 바뀐 설화의 성격 때문이다.
천하제일 살수를 목표로 하는 설화가 측은지심을 느끼고 있다고?
게다가 청화 또한 낯설었다.
청화의 근본은 독인이었다.
그녀는 독을 써서 상대를 한 줌 핏물로 만들어 버리던 집단의 책임자.
공독지체로 바뀌면서 성격도 바뀐 것일까?
독인으로 살아오며 독으로 상대를 해친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닐 텐데, 비둘기 하나를 구하려고 고수들의 비무에 끼어들다니!
공독지체가 완성되면 천하제일의 독인이 될 텐데, 그 독인이 생명을 저렇게 소중히 여긴다고?
한빈은 설화와 청화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