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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261화 (261/621)
  • 261화. 사해(四海)는 동도(同徒) (2)

    물론 독고련이 남편과 완전히 연을 끊은 것은 아니었다.

    일 년에 한 번쯤은 이렇게 손녀가 찾아오니 말이다.

    손녀가 찾아오기 전에는 아들이 찾아왔었다.

    그 아들의 역할을 손녀가 하는 것이고 말이다.

    강호에 일이 휘말리지 않게 하기 위해 떨어져 지내는 만큼, 그들의 사정은 밖으로는 알려지지 않았다.

    정소연은 볼을 부풀리며 할머니를 바라봤다.

    어디가 그리 좋냐고 했지만, 딱히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한 가지 기억이 났다.

    “음, 그러니까. 오라버니 옆에 있으면 복이 와, 헤헤.”

    “복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소연아.”

    “지난번에 오라버니 때문에 돈도 땄어, 할머니.”

    “그놈이 노름을 가르쳤다는 말이냐?”

    독고련이 눈을 가늘게 뜨자 정소연은 재빨리 손을 흔들었다.

    “그게 아니라 할아버지랑 부탁한 칼 전해 주러 갔다가 내기에서 딴 거야, 할머니. 할아버지도 아는걸.”

    “이 노인네가 얘한테 좋은 걸 가르치는군…….”

    “아니야. 내가 그냥 한 거야. 그래서 내가 시집갈 돈도 벌어 놨는걸, 헤헤.”

    “그래, 이겼다니 다행이구나.”

    정소연의 해맑은 모습에 독고련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독고련은 아직은 손녀의 응석을 받아 줄 때라 생각했다.

    정소연이 말한 것은 당시 맹호사대였던 적혈맹호대를 앞세워 팽무빈의 무사들과 비무를 벌였을 때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정소연이 그때의 일을 회상하며 방긋 웃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독고련은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보며 방금 만난 한빈을 떠올렸다.

    독고련이 한빈을 만나기로 결심한 것은 사실 자의 반, 타의 반이었다.

    여기서 자의란 사도련과 거래하는 한빈을 시험해 보고 싶은 자신의 마음이고, 타의란 손녀 정소연의 부탁 때문이었다.

    자의로 만난 것에 대한 결과는 만족이었다.

    손해 보는 장사도 안 하지만, 상대에게 해를 입힐 자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손녀의 사윗감으로는 의문이 들었다.

    손녀 정소연은 아직 어렸다.

    어린 손녀의 마음은 앞으로도 몇 번씩 변할 것이었다. 지금 손녀의 마음은 날아가는 예쁜 새를 좋아하는 마음과 같을 수도 있었다.

    거기에 더해 손녀가 혼사를 치를 나이가 되려면 아직 까마득한 법.

    그동안 한빈을 철저히 지켜보기로 했다.

    독고련은 진득한 미소와 함께 산 아래를 바라봤다.

    * * *

    같은 시각, 한빈은 어깨를 살짝 떨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 왜 이렇게 오한이 들지?”

    “공자님, 땔감 좀 더 넣을까요?”

    설화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이제까지 한빈이 귀가 간지럽다는 적은 있어도 오한이 든다고 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아, 괜찮아. 그냥 느낌이 으스스해서 그래.”

    한빈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것처럼 손을 내저었다.

    그러고는 아직 잠든 이들을 다시 바라봤다.

    아직 많은 이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차 몇 잔을 마실 때쯤에야 그들이 하나둘씩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편육랑아였다.

    편육랑아가 일어나자 마치 커다란 바위가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몇몇 무인들은 아직도 깨어나지 못했다.

    모두 한빈이 풍지혈을 제압해 잠이 든 이들이었다.

    한빈은 재빨리 그들 사이를 누볐다.

    픽, 픽.

    한빈이 손을 쓰자 여기저기서 신음을 내며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악비광이 물었다.

    “아깐 고수가 제압한 혈도를 풀면 탈 난다면서요?”

    “얘네들은 내가 제압한 거니 괜찮아.”

    한빈의 말에 악비광이 억울하다는 듯 물었다.

    “헉, 그럼 아까는 왜 가만계셨습니까? 형님.”

    “네가 수련 부족인 것 같아서.”

    한빈이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아, 그렇군요.”

    악비광은 포기한 듯 답했다.

    한빈의 표정이 워낙 진지해서 따지지도 못했다.

    대신 고개를 숙인 채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때였다.

    새로 합류한 원경이 깨어나서 주변을 둘러봤다.

    목숨이 오락가락하던 어제와는 상황이 변했다.

    조금 어수선하기는 해도 피비린내 대신 풀잎 향기가 솔솔 풍기고 있었다.

    원경은 침을 꿀꺽 삼키고 한빈에게 달려갔다.

    사실 어제 누가 자신의 혈도를 제압해서 잠이 들게 만들었는지도 몰랐다.

    그저 뒤엉켜 싸우는 중에 어떤 고수가 자신을 제압했겠거니 하는 원경이었다.

    한빈의 앞에 선 원경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주, 주군. 어제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원경아, 지금 남은 아군은 몇 명이지?”

    “그,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동료 중 다친 자가 몇이고 죽은 자가 몇이냐는 이야기다. 조금 더 들어가면 경상이 몇이고 중상이 몇이냐까지 파악해야겠지.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내상을 입은 자도 있을 것이고.”

    “…….”

    “네가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바로 상황 파악이다. 내게 그 상황을 물어보는 것이 아니고.”

    “…….”

    “간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다른 사람이 가르쳐 줄 것이다.”

    말을 마친 한빈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는 흑의살풍이 고개를 갸웃하고 있다.

    한빈과 시선이 마주친 흑의살풍이 물었다.

    “왜 그렇게 보는가?”

    “부탁 하나만 하겠습니다.”

    “자네 부탁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일세…….”

    “정말 언제든 해도 되나요?”

    한빈이 짓궂은 표정으로 묻자, 흑의살풍은 살짝 놀랐다.

    “흠, 그건……. 뭐.”

    “농담이에요. 다름이 아니라 이 녀석 좀 데려가서 어제 일에 대해서 대충 설명해 주시죠. 그리고 사파에 대해서도 확실히 알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뭐, 말귀를 못 알아들으면 좀 굴려도 됩니다.”

    “그거라면 내가 전문가를 한 명 알고 있네, 험.”

    헛기침한 흑의살풍은 누군가에게 손짓했다.

    그곳을 확인한 한빈은 피식 웃었다.

    그것에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편육랑아였다.

    편육랑아는 낭아봉을 어깨에 걸쳐 멘 채 잽싸게 달려왔다.

    쿵, 쿵.

    편육랑아의 무게 때문인지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편육랑아가 물었다.

    “형님, 왜 그러시…….”

    흑의살풍이 불러서 다급히 왔지만, 옆에 한빈이 있자 흠칫한 것이었다.

    한빈이 피식 웃으며 먼저 말했다.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그냥 얘기 나누시죠.”

    “그렇게 말한다면야…….”

    편육랑아는 말끝을 흐리며 흑의살풍에게 시선을 돌렸다.

    “형님, 무슨 일 때문에 부르셨습니까?”

    “귀 좀 대 보게.”

    흑의살풍이 손짓하자 편육랑아가 슬그머니 귀를 갖다 댔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둘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그에 비해 원경의 얼굴을 사색이 되어 갔다.

    대화가 끝나자 편육랑아가 원경의 허리를 잡고는 그대로 어디론가 데려갔다.

    끌려가는 원경이 외쳤다.

    “지,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주, 주군! 살려 주십시오!”

    “영웅이 되는 길이니 수업 잘 듣고 오너라.”

    말을 마친 한빈은 흑의살풍을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친 흑의살풍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그렇게 보나? 해 달라는 대로 해 줬는데…….”

    “쟤들도 부탁합니다.”

    한빈이 멀뚱히 있던 원경과 같이 들어온 무리를 가리켰다.

    흑의살풍이 손을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이지.”

    말을 마친 흑의살풍은 신입 대원을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한빈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한빈은 촉이 좋은 원경에게 강호에 대해 알려 주고 싶었다.

    강호를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많이 부딪치는 것밖에 없었다.

    조금 심하게 부딪친다면?

    그것이 바로 속성 과정이었다.

    흑의살풍과 편육랑아가 사라지자 당기명이 한빈의 곁으로 다가왔다.

    “사도련 분들과 친하신가 봅니다.”

    “사해는 동도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어차피 다 같은 칼 밥을 먹는 처지 아닌가요?”

    “흠, 그래서 사파인들과 친하게 지내라는 말씀인가요? 이번 무가지회 자체가 사파에 대항하기 위해 열리는 행사인 것은 아십니까?”

    “물론 알지요. 그러니 더 친하게 지내야죠.”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죠?”

    “그런데 방금은 사해는 동도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럼 사파는 우리의 친구가 아니라는 말 아닙니까?”

    “그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겁니다. 적과 나보다 먼저 알아야 하는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

    “그건 적입니다. 나는 천천히 알아도 됩니다. 밥을 먹으면서 알아 가도 되고 잠을 자면서 알아 가도 됩니다.”

    “적 다음에 알아야 할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적 다음이라고 하면 바로 자신이겠죠.”

    “아닙니다. 다음에 알아야 할 건 친구입니다.”

    말을 마친 한빈은 빙긋 웃었다.

    조금은 의미심장한 말에 당기명은 자신도 모르게 침음을 삼켰다.

    “음.”

    “그건 강호의 역사가 말해 주고 있죠. 역사적으로 유명한 천하제일인들이 적에게 쓰러졌습니까?”

    “…….”

    당기명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한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적에게 쓰러졌다면 어찌 천하제일인의 칭호를 얻었겠습니까? 천하제일인은 항상 친구에게 쓰러지는 법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사파와…….”

    “어차피 공동의 적이 나타나면 등을 맡길 사람들입니다. 그때까지는 우리에게 적이지만 말입니다. 뭐 지금은 적이기에 뒤통수 맞을 일이 없는 관계이기도 하죠.”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적이라니요?”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사천당가의 가주님이 실수로 주화입마에 걸리실 분입니까? 친구 중에 의심 갈 만한 분을 찾아보시죠.”

    한빈의 말에 당기명은 시선을 돌려 어딘가를 바라봤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곳은 사천당가가 있는 서남쪽 방향이었다.

    * * *

    한빈 일행이 그 자리를 떠난 것은 그다음 날 아침이었다. 그들은 한 번도 쉬지 않고 영단산을 가로질렀다.

    어찌 보면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당기명만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

    정상에 있는 사도련의 무관을 지나칠 때는 사실 조금 긴장했었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사파의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흑의살풍과 편육랑아가 이끄는 사도련 무사들은 돌아간 후, 묘하게 영단산에는 정적이 감도는 듯 보였다.

    가끔 들리던 늑대 울음소리까지 멈췄다.

    지금은 덜그럭거리는 마차 소리가 산중을 울릴 뿐이었다.

    이렇게 한가해지자 당기명의 머릿속에서는 한빈에 대한 온갖 의문이 싹트기 시작했다.

    천하제일의 의술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모자라, 성격 더럽기로 소문난 산서삼살 중 둘을 어린애 다루듯 한다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다.

    더 이상한 것은 산서삼살이 마치 한빈을 우러러보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는 점이었다.

    생각해 보면 천수장의 아랫마을 사람들도 천수장주라고 하면 껌뻑 죽지 않았던가?

    하지만, 당기명은 그 이유가 뭔지는 알 수 없었다.

    당기명은 의문 때문에 행렬에서 가장 뒤로 처졌다.

    자신도 모르게 멈춘 것이었다.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는 당기명을 발견한 당독대가 달려왔다.

    “공자님, 무슨 근심이 그렇게 많으십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팽 공자가 사천당가에 도착하면 가주님도 일어나실 겁니다.”

    “과연 그럴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연히 쾌차하실 겁니다.”

    말을 마친 당독대는 다시 행렬이 있는 쪽으로 뛰어갔다.

    당기명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때 다시 의문이 들었다.

    조용해도 너무 조용한 것이, 꼭 누군가가 행렬을 호위하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기 때문이다.

    당기명의 왠지 모를 느낌에 뒤를 힐끔 돌아봤다.

    순간 당기명의 눈이 커졌다.

    산등성이에서 사도련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마치 행렬을 배웅하는 듯한 느낌으로 말이다.

    * * *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자 한빈 일행은 영단산을 완전히 벗어났다.

    한빈은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옆에서 먹을 갈고 있던 설화가 물었다.

    “지금 그게 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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