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사해(四海)는 동도(同徒) (1)
한빈의 앞에 선 당기명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팽 공자님,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침착한 당기명의 모습에 한빈은 희미하게 웃음을 보였다.
어제 그 일을 당하고 일어났는데 모두가 쓰러져 있다면?
보통 사람 같으면 오열하며 사람들의 상태를 살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당황한 기색 없이 주변을 먼저 살폈다. 그러고는 깨어 있는 사람이 있자, 감정을 보이지 않고 침착하게 물어보았다.
강호인이 사천당가를 두려워하는 것은 암기와 독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 한빈은 생각했다.
한빈이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행히도 별일 없이 지나갔습니다.”
“허, 어떻게…….”
“제가 해결했습니다.”
“팽 공자가 상대를 물리치신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어제 그 고수는 어떻게…….”
“그분은 사파의 숨은 노고수셨습니다.”
“사파의 고수라고요?”
당기명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암기를 그렇게 살벌하게 던지는 사파의 고수는 들어 보지 못했던 것이다.
당기명의 표정을 본 한빈이 말했다.
“은거 기인이라고 해 두죠.”
한빈이 씩 웃었다.
한빈의 말은 진실이었다. 정마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세상에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당기명의 고개는 한 단계 더 기울어졌다.
마치 의문이 더 깊어졌다는 듯 한빈을 바라봤다.
“은거 기인을 어떻게 물리치신 거죠? 제 느낌으로는 무림 십대고수에 버금가는 고수였습니다.”
“다 방법이 있습니다.”
“그 방법이 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이걸로 해결했습니다.”
한빈은 엄지와 검지를 말아 쥐어 동전 모양을 만들었다.
그 모습에 깜짝 놀란 당기명이 물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돈으로 해결했다는 뜻입니다. 뭐, 세상에 돈으로 해결 안 되는 게 있겠습니까? 은거를 하려면 돈이 많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진짜 돈으로 해결하셨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만, 제가 잘못한 거라도 있나요?”
한빈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되묻자 번뜩 정신이 든 당기명이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 상대가 누군지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앞에 있는 한빈은 단순히 무림세가의 자제가 아니었다. 그는 천하제일의 의술을 가지고 있는 천수장주였다.
거기에 지금 당기명 자신과 수하를 구해 준 자가 아니던가?
은인에게 이렇게 따져 묻는 법이 강호 어디에 있다던가?
자신에 대한 책망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덕분에 한빈과 당기명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그때 당기명의 시야에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무인들이 들어왔다.
“그렇다면 저기 있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저들은 사도련의 인물들입니다. 저와 안면이 있는 자들도 있지요. 저들과의 충돌은 우연입니다.”
“오해라…….”
“생각해 보십시오, 이곳은 강남 사도련이 자리를 잡은 곳이 아닙니까?”
“그야 그렇죠.”
“사천당가 같으면 앞마당에서 싸움이 났는데 팔짱 끼고 구경만 하겠습니까?”
“음…….”
당기명은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
생각해 보면 사천당가 무사들과의 충돌은 괴인과의 사이에서만 일어났다.
“뭐, 어제의 일은 잊으셔도 됩니다.”
“그럼 저기 있는 사도련의 무사들은 어찌하시려고요?”
“일어나면 돌려보내야죠. 아직은 정파와 사파 사이에 협약이 유효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니 어제 일은 잊겠습니다. 하지만, 궁금한 게 있습니다. 대체 얼마를 뜯기신 겁니까?”
“당 공자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입니다.”
한빈은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뭐, 일정 부분은 사실이었다.
한빈의 입장에서는 남아도는 현철로 만들었지만, 현철이 어디 보통 물건이던가?
생각해 보면 독고련에게 건넨 장기짝은 꽤 값이 나가는 물건이었다.
한빈의 말은 당기명의 상상력을 돋웠다.
거기에 더해 당기명은 빚지고는 못 사는 성미였다.
그것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말이다.
당기명이 못 참겠다는 듯 물었다.
“다시 한번 묻지요. 대체 얼마나 들었습니까? 말씀을 해 주셔야 제가 갚을 수…….”
“그냥 마음의 빚으로 남겨 두시죠.”
한빈이 씩 웃었다.
물론 옆에서 대화를 지켜보던 악비광과 설화 그리고 청화는 입을 떡 벌렸다.
특히 청화는 뭔가 깨우쳤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 마음을 빚을 지우고 뜯어낸다라?
배울 것이 많은 공자님이라 생각했다.
청화는 분명히 계약서의 한 부분을 보았다.
사천당가는 한빈을 사천까지 무사히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리고 돌발 상황이 생겨 한빈에게 피해가 간다면 그 열 배를 보상해야 했다.
말은 됐다고 하지만, 언젠가는 몇백 배 부풀려서 받아 낼 것이 뻔했다.
청화는 마른침을 삼키며 한빈의 표정 하나하나를 살폈다.
표정만 보면 진짜 좋은 사람 같았다.
그 내면을 모른다는 가정하에.
독인으로 살며 세상에 대해서 잘 몰랐던 청화에게 한빈의 모든 것은 살아 있는 교재 그 자체였다.
청화가 눈을 빛내자 옆에 있던 설화가 물었다.
“왜 그래? 청화야.”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언니.”
그들이 수다로 시간을 때우며 천천히 차향을 음미하고 있을 때였다.
악비광이 물었다.
“아까 그분하고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습니까? 처음에는 조금 당황하시는 것 같던데.”
“흠…….”
한빈은 헛기침을 하며 독고련이 사라진 자리를 다시 한번 바라봤다.
손녀사위를 삼으려는 의도를 내비쳤을 때는 살짝 당황한 것도 사실이다.
강호의 노고수들과 만나다 보면, 이렇게 돌발 상황이 일어나곤 한다.
전생에도 그렇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한빈이 잠시 상념에 잠겼을 때, 사도련의 인물 중 누군가가 일어났다.
부스럭.
옷자락 구겨지는 소리와 함께 일어난 이는 검은 무복의 사내였다.
그것도 머리가 희끗한 노고수.
한빈은 그를 보며 빙긋 웃었다. 지금 일어난 이는 이전 여행에서 한빈을 적극적으로 도왔던 산서삼살 중 하나인 흑의살풍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흑의살풍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는 듯 두리번거렸다.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던 흑의살풍이 한빈을 발견했다.
흑의살풍은 재빨리 달려와 한빈의 앞에 섰다.
“팽 공자, 어제는…….”
말끝을 흐리며 눈치를 보는 흑의살풍.
산서삼살이라는 명칭에 걸맞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한빈이 적룡대협과 동일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 중 하나였다.
전에 자신을 굴렸던 것은 밉지만, 그날 잔혈마도와의 대결 이후로는 한빈을 보면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피가 뜨거웠다.
거기에 더해 지금 사파가 벌이는 모든 일의 중심에는 적룡대협이 있었다.
적룡대협의 영웅담이 이야기책으로 떠도는 현재.
적룡이라는 이름 두 글자는 사파인 모두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한빈과 적룡대협이 동일인이라는 속사정을 알고 있지만, 이렇게 직접 보니 이야기 속 인물을 직접 본다는 뿌듯함이 있었다.
흑의살풍의 이상한 모습에 한빈이 손을 흔들었다.
“어제 일은 됐고, 뭐 하나만 묻죠.”
“물어보시지요, 팽 공자.”
“혹시 독고련 선배에 대해서 아십니까?”
“선배라니요? 그분과 어떤 사이길래…….”
“뭐, 호칭이 뭔 상관입니까?”
“아, 팽 공자라면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런데 말투가 왜 그러십니까? 말 좀 편하게 하시죠. 우리가 하루 이틀 본 사이인가요?”
한빈의 말에 흑의살풍은 움찔했다.
자신이 너무 이야기책 속 적룡대협에 빠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한빈에게서 적룡대협의 이름을 지운다면?
순간, 흑의살풍의 머릿속에 치가 떨리도록 한빈에게 이용당했던 과거가 생각났다.
힐끔 한빈의 표정을 보니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은 없었다.
외모와 분위기가 조금 달라진 것 같지만, 저 악랄한 미소는 예전과 똑같았다.
살짝 한빈과 시선이 마주친 흑의살풍은 재빨리 눈치를 챘다.
흑의살풍도 강호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고수.
알은체하지 말란 한빈의 눈빛을 읽은 것이다.
그는 재빨리 표정을 지우고 활짝 웃었다.
“허, 역시 팽 공자는 광오하기 이를 데 없네. 궁금한 게 무엇인지…….”
“독고련의 선배의 검을 만든 장인이 누군가요? 그런 장인이 강남 땅에 있었나요?”
“이건 진짜 비밀이네.”
흑의살풍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모습에 한빈이 말했다.
“뜸 들이지 말고 말해 보시지요.”
“남편이 만들어 줬다고 들었네.”
“남편이라고요?”
혼잣말을 한 한빈이 관자놀이를 툭툭 쳤다.
이건 전생에 들어 본 적이 없는 이야기였다.
강남 사도련주 독고련의 누이라는 것 이외에는 알고 있는 사실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한빈은 독고련이 자신을 손녀사위로 삼으려던 일을 떠올렸다.
손녀가 있다면 당연히 남편도 있다는 것이 아닌가?
한빈의 표정을 본 흑의살풍이 말을 이었다.
“젊었을 때 만나고 나서는 가는 길이 달라 떨어져 지냈다고 하네. 독고련주 어르신은 최고의 검술을 찾으려 했고 그 남편이셨던 분은 최고의 검을 만들려고 하셨다네. 거기까지가 아는 얘기네. 가끔 손녀가 오긴 하지만……. 읍.”
설명을 늘어놓던 흑의살풍은 재빨리 입을 막았다.
자신이 너무 많은 이야기를 늘어놨다 생각한 것이다.
한빈이 다시 물었다.
“독고련 선배한테 진짜 손녀가 있나요?”
“전에 한 번 본 것도 같네. 몇 년 전에 열 살 정도 되었으니 지금은 뭐…….”
설명을 이어 나가려던 흑의살풍이 고개를 갸웃했다.
한빈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기 때문이다.
흑의살풍이 살짝 긴장하고 있을 때, 한빈이 마시던 차를 뿜었다.
“푸웁!”
한빈이 뿜은 찻물이 모닥불 위를 수놓았다.
입가를 소매로 닦은 한빈은 독고련이 사라진 곳을 살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심계가 깊은 여고수였다.
분명 독고련에게 얻을 것을 다 얻었다.
그런데 살짝 당했다는 느낌은 왜일까?
* * *
확장 중인 사도련의 무관이 자리 잡고 있는 영단산의 정상.
독고련이 하얀 도포와 희고 긴 머리를 펄럭이며 무관의 정문 앞에 나타났다.
정문을 지키는 경비 무사들이 뭐라 인사를 하기도 전에 독고련은 빠르게 그들 옆을 지나갔다.
경비 무사들은 얼떨떨하게 바람처럼 지나간 독고련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독고련이 도착한 곳은 한적한 별채였다.
별채는 꽃과 연못으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독고련이 도착하자 별채의 작은 문이 열렸다.
스르륵.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고개를 삐쭉 내밀었다.
앙증맞게 생긴 양 갈래 머리의 소녀였다.
그 소녀를 본 독고련은 바람처럼 달려갔다.
“아이고, 내 새끼.”
“할머니, 어디 갔다 왔어?”
양 갈래 머리의 소녀가 활짝 웃으며 팔을 벌렸다.
독고련은 양 갈래 머리의 소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소녀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독고련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네가 말한 아이를 만나고 왔다.”
“정말로요? 할머니가 한빈 오라버니를 만나고 오셨다고?”
“그래. 네가 점찍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헤헤, 할머니도 우리 오라버니한테 반한 거야?”
양 갈래 머리 소녀는 방긋 웃었다.
독고련은 그 웃음이 답하며 되물었다.
“우리 소연이는 그놈의 어디가 그리 좋은 거냐?”
독고련이 소연이라 부른 아이는 한빈도 잘 알고 있는 소녀였다.
그 아이는 다름 아닌 강북 제일의 대장장이인 정철민의 손녀, 정소연이었다.
독고련과 정철민은 젊은 시절 부부의 연을 맺었었다.
하지만, 서로의 길이 달라 별거 중이었다.
장기 별거에 들어갔다고 할까?
독고련도 정철민의 결정에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언제 어디서 목에 칼이 들어올지 모르는 것이 강호가 아니던가?
자신의 남편과 아들 그리고 그 후손이 강호의 일에 휘말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독고련은 자신의 손녀가 태어난 뒤, 이 결정을 잘 내렸다고 생각했다.
강호보다는 손녀의 재롱이 더 좋았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