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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259화 (259/621)
  • 259화. 필유아사(必有我師) (6)

    한빈이 장기판 위에 늘어놓은 것은 강호에서 꽤 유명한 문제였다.

    이 문제가 유명해진 이유는 간단했다.

    무림삼존 중 하나라는 소림의 일지 대사가 이름 모를 산을 지날 때 일이었다.

    신선 같은 두 노인이 장기를 두고 있기에, 일지 대사는 슬쩍 장기판을 엿봤다고 한다.

    그 두 노인 중 하나가 계속 구경하려면 일지 대사에게 묘수를 찾으라고 했다.

    문제는 장기짝을 세 번 움직여서 상대를 외통수로 만들라는 것이었다.

    일지 대사는 밤을 새울 때까지 한참을 고민했지만 그 문제를 풀지 못했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두 노인은 없었다고 했다.

    그 당시 일지 대사는 구파일방이 벌이는 영웅 대회에 가는 길이었다고 한다. 일지 대사는 그곳에서 이 문제를 다른 이들에게 전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 문제를 풀 묘수를 찾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처음에는 강호에서 시작되었지만, 민간에까지 퍼졌다.

    그런데도 이 문제를 푼 이는 없었다.

    이것이 이 문제가 유명해진 경위였다.

    덕분에 이 문제는 강호의 십대 수수께끼 중 하나가 되었다.

    독고련이 이 문제를 접한 것은 이 년 전.

    그녀는 이 문제 때문에 장기에 빠져들게 되었다.

    바둑이 신선들의 놀이라고?

    그 말을 들을 때면 독고련은 콧방귀를 뀌었다.

    진정한 신선의 놀이는 장기였다.

    독고련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것도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현철로 된 장기판에 이 문제를 낸 이유가 궁금해진 것이다.

    “이게 선물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냐? 혹시 이 장기판을 주겠다는 것이냐?”

    “아닙니다. 이건 아직 쓸모가 있어서 선물로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럼 선물이 대체 무엇이더냐?”

    “선배님, 이 문제의 해법이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너는 안다는 말이냐?”

    “네, 알고 있습죠. 그러니 선물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흠, 그러면 어서 설명해 보아라.”

    “지금은 안 됩니다.”

    “…….”

    “선물이라는 것은 서로 교환을 해야 제맛 아니겠습니까?”

    “오호라……. 선물로 무엇을 받고 싶은 게냐?”

    “아직 생각해 둔 게 없습니다. 일단 일 얘기부터 하고 다음에 선물을 논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일이라…….”

    “잠시만 기다리시죠.”

    말을 마친 한빈은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 소리에 설화가 나타났다.

    설화의 움직임에 독고련은 눈매를 좁혔다.

    한낱 시녀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독고련은 기가 막힌 듯 한빈을 바라봤다.

    일개 무림세가의 자제가 저런 시녀를 거느리고 있다는 것이 황당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이들에게 강북 오대세가는 거대한 단체였지만, 독고련에게는 그저 강호에 흔한 무가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런데 사도련에서도 찾기 힘든 고수를 시녀로 부리는 한빈이 신기했다.

    한빈은 독고련의 시선에는 신경 쓰지 않고 설화에게 턱짓했다.

    한빈의 시선을 받은 설화는 말없이 보따리를 내밀었다.

    한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설화는 독고련의 앞에 보따리를 내려놨다.

    그 모습에 독고련이 눈썹을 꿈틀댔다.

    독고련은 오늘 한빈을 만나기 전에 철저히 그에 대한 사전 조사를 했다.

    그런 이유로 저 보따리에 들어 있는 것이 뭔지 감이 잡혔다.

    “지금 나랑 계약서를 쓰자는 얘기더냐? 역시 소문에서 한 치를 벗어나지 않는구나!”

    “선배님, 왜 이리 성미가 급하십니까? 자세히 보시죠.”

    한빈이 말을 마치자 설화가 조심스럽게 보따리를 펼쳤다.

    그 안에는 지필묵이 아닌, 다기와 향긋한 찻잎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보통 찻잎과는 다른지, 보따리를 풀어 놓는 것만으로 찻잎의 향기가 사방으로 날뛰고 있었다.

    한빈은 독고련을 바라보며 웃었다.

    “이렇게 야심한 밤에는 풀 내음을 맡으며 차 한 잔을 즐기는 것도 인생의 낙이지요.”

    “허허,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꼭 신선처럼 얘기하는구나.”

    “뭐, 제가 인생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그저 지금 분위기와 차가 딱 어울린다 생각했을 뿐입니다.”

    말을 마친 한빈이 턱짓하자 설화가 찻주전자를 건넸다.

    그 모습에 독고련이 고개를 갸웃했다.

    차도 끓이지 않고 찻잔에 차를 부으려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독고련의 고개가 한 단계 더 기울어졌다.

    찻주전자를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잡은 한빈의 모습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한참을 바라보던 독고련의 눈이 커졌다.

    찻주전자가 김을 뿜고 있었다.

    삼매진화의 수법이 분명했다. 독고련이 확인한 한빈의 경지라면 손에 극양지기를 모아 찻주전자를 덥히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을 터.

    여기서 문제는 어떤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한빈의 손바닥에서조차 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그때 한빈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차 한 잔 받으시죠.”

    독고련은 재빨리 표정을 수습했다.

    “고맙네.”

    조르륵.

    차가 가득 찬 찻잔은 김을 모락모락 내고 있었다.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독고련은 더 이상 한빈에게 물을 수 없었다.

    한빈이 차를 마시는 모습이 너무 해맑았기 때문이다.

    지금 한빈에게서는 어떤 욕심도, 어떤 목적도 찾을 수 없었다.

    자연과 하나가 되어 조용히 차를 즐길 뿐이었다.

    고즈넉한 산자락에 차를 따르는 소리와 차 향기가 은은하게 퍼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산짐승의 발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기 시작했다.

    이 산의 주인인 산짐승은 해가 뜰 때를 미리 아는 법.

    해가 밝아 올 것을 알고 미리 아침을 준비하는 것이다.

    한빈이 찻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선배님과의 대화는 즐거웠습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흠, 네가 그렇다니 그런 줄 알겠다.”

    “아까 나눴던 이야기들은 허락하신 거로 알겠습니다.”

    “누구 맘대로…….”

    “그럼 나중에 답해 주셔도 됩니다. 아까 문제에 대한 해답도 그때 말씀드리겠습니다.”

    “허허, 고얀 놈. 나는 그만 가 보겠다.”

    독고련은 말과는 달리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마지막으로 독고련은 사라졌다.

    한빈은 멀어지는 독고련을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한빈이 계획했던 것 중 구 할을 가져간 것 같았다.

    나머지 일 할은?

    앞으로 천천히 진행하면 되었다.

    강남 사파의 절대자와 꽤 질긴 인연을 만들어 놨으니 말이다.

    웃음 짓던 한빈이 돌아서려는 독고련을 불렀다.

    “선배님,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또 뭘 뜯어먹으려고 부르는 것이냐?”

    “저와 만난 기념으로 장기짝을 챙기시지요.”

    말을 마친 한빈은 장기판 위에 있던 장기짝을 번개처럼 쓸었다.

    쓱.

    그러고는 장기짝을 가죽 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한빈은 그 주머니를 공손히 독고련에게 내밀었다.

    “현철로 만든 장기짝은 흔치 않을 겁니다. 나중에 장기 두실 때가 있으면 저를 떠올리십시오.”

    “허, 낯짝이 흑철만큼이나 두껍구나.”

    말을 마친 독고련을 부채로 한빈의 얼굴을 가리켰다.

    한빈은 해맑은 미소를 피워 낼 뿐, 답하지 않았다.

    독고련은 한빈에게 받은 가죽 주머니를 품속에 넣었다.

    그러고는 더는 말하기 귀찮다는 듯 픽 돌아섰다.

    점점이 멀어지던 독고련의 기척은 이제 완전히 사라졌다.

    독고련이 사라지자 한빈이 한숨을 내쉬었다.

    “휴, 역시 다루기 힘든 인간이야.”

    “아까 보니 즐기시는 것 같던데요?”

    설화가 묻자, 한빈이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그렇게 보였어?”

    “네, 공자님.”

    “그럼 성공이네, 하하.”

    한빈이 웃음을 터뜨릴 때, 바위 위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악비광이 달려왔다.

    “형님, 대체…….”

    “오늘 일어난 일은 너만 알고 있어라, 비광아.”

    “무공은 언제 그렇게 늘어난 겁니까?”

    “그건 비밀이다.”

    “내가 다 후불로 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번 것은 조금 비싸서 그런다. 같은 강북 오대세가인데, 산동악가의 기둥뿌리를 뽑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니냐?”

    “흠, 그럼 저는 안 듣겠습니다.”

    “그래, 그게 좋을 거다. 그건 그렇고 너는 쟤들 좀 정리해라.”

    “누구요?”

    “찬 바닥에서 누워 있으면 입 돌아갈 거 아니야?”

    한빈의 말에 악비광이 휘적휘적 쓰러진 무사들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해혈을 시도했다.

    픽!

    무사 하나의 혈도를 찍어 본 악비광이 고개를 흔들었다.

    “형님, 해혈이 안 됩니다!”

    “누가 해혈을 하라고 했느냐? 고수가 제압한 혈을 풀려고 하면 탈이 나기 마련이니, 그냥 모닥불 주위로 모아 놔라.”

    “누굴요?”

    “전부 다.”

    “헉!”

    악비광의 눈이 커졌다.

    물론 악비광은 한빈이 제압한 무사들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한빈이 직접 풀어 주면 될 것이지만, 늘어난 일거리에 아무 생각도 없었기 때문이다.

    한빈은 악비광의 놀란 표정에 피식 웃은 뒤 청화에게 말했다.

    “너는 모닥불 좀 다시 피워 놓아라.”

    “네, 따끈따끈하게 덥혀 놓을게요. 공자님.”

    청화가 주위에 나뭇가지를 줍기 시작했다.

    한빈과 독고련이 결전을 펼친 덕분에 주변에는 장작으로 쓸 나무 조각들이 널렸다.

    설화가 물었다.

    “도토리 좀 주울까요?

    “무슨 도토리?”

    “악 공자가 지금 사람들을 옮기고 있잖아요. 모닥불 주변에 도토리라도 주워 놓고 낙엽이라도 깔아 놔야 등이 편할 것 같은데…….”

    “괜찮아, 그냥 둬.”

    “괜찮다니요?”

    “지압되고 좋잖아. 이것도 수련이야.”

    한빈이 씩 웃었다.

    동시에 모두가 동작을 멈추고 한빈을 바라봤다.

    한참을 바라보던 악비광의 동작은 더 빨라졌다.

    밉보이면 큰일 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잠시 후.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자 모든 상황이 정리되었다.

    한빈이 모닥불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 이제 좀 쉬자. 잠깐 모닥불 좀 감상하자고.”

    “흔한 모닥불에 감상이라니요? 아무리 봐도 특별한 게 없습니다, 형님.”

    “오늘 같은 밤이 흔하던가? 흔하지 않은 밤에 피운 모닥불이야.”

    “흠, 그건 그렇죠.”

    “좀 있으면 강렬한 불꽃도 사라질 거야.”

    “땔감을 더 넣으면 되죠.”

    “아니, 날이 밝으면 모닥불의 불꽃이 이리 잘 보일 리 없지.”

    “…….”

    “오늘 일이 비광이한테는 공부가 되었을 테지?”

    “무슨 공부 말입니까? 저는 마음만 졸였는데 말입니다.”

    “세상에 스승이 아닌 것은 없다. 공자님이 말씀하셨지. 십장생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고 말이야.”

    “형님, 십장생이 아니라 세 명이 가는 길에는 반드시 스승이 있다는 뜻의 삼인행(三人行)이면 필유아사(必有我師) 아닙니까?”

    악비광의 반박에 한빈이 씩 웃으며 악비광을 바라봤다.

    “그럼 너와 설화하고 청화가 내 스승이겠네. 지금 내 스승 하려는 거야?”

    “헉, 무슨 말씀을…….”

    “그럼 그냥 십장생으로 해 둬.”

    한빈의 진지한 표정에 악비광은 할 말이 없었다.

    탄성과 함께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아.”

    그것도 잠시 악비광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유난히 십장생에서 십에 힘을 준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빈은 악비광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쓰러진 이들을 바라봤다.

    어찌 보면 이들 모두가 스승일지도 몰랐다.

    이들 하나하나가 강호를 구성하는 일원이니 말이다.

    용린검법의 최초 전언이 강호에 흩어진 구결을 찾으라는 것이 아니었던가?

    한빈이 씩 웃었다.

    십장생이 되었든, 삼인행이 되었든 강호에는 스승이 있었다.

    덕분에 오늘도 오호단문도를 복원하고 구결을 얻지 않았던가?

    한빈은 이제까지의 일들을 천천히 곱씹었다.

    물론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설화는 한빈과 독고련의 대결을 떠올리며 자신에게 부족한 점을 찾으려 노력했다.

    그러면서도 계속 당과를 베어 물고 있었다.

    청화는 찹쌀떡을 오물거리며 앞으로 찹쌀떡을 살 돈을 어떻게 구할까를 고민했다.

    그러고는 한빈을 조용히 바라봤다.

    돈을 버는 데에 있어서는 한빈이 최고의 스승이었다.

    많이 벌어서가 아니라 쉽게 벌어서였다.

    청화는 남은 생을 조금 쉽게 살고 싶었다.

    악비광은 오늘 일은 모두 잊고 조용히 산 너머를 바라봤다.

    누군가를 찾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이다.

    모두가 모닥불을 보며 깊은 사색에 잠겨 있을 때였다.

    쓰러졌던 이들이 하나둘씩 깨어났다.

    가장 먼저 깨어난 것은 당기명이었다.

    당기명이 기척을 내자 한빈이 고개를 돌렸다.

    한빈과 시선이 마주치자 당기명은 끙 하는 신음을 뱉어 내며 힘들게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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