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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256화 (256/621)
  • 256화. 필유아사(必有我師) (3)

    악비광은 잠시 침묵했다.

    그것도 잠시 그는 이를 악물고 말을 이었다.

    “묵사발이 되더라도 저는 가 봐야겠습니다.”

    “뭐, 가도 되긴 해. 도토리묵이 되고 싶으면…….”

    “네, 도토리묵이든 메밀묵이든 상관없습니다. 저들 중 단 하나의 목을 벨 수만 있다면…….”

    “허, 우리 비광이 진심이네. 잘 생각해 봐. 저자가 우릴 죽이려면 언제든 죽였어”

    한빈은 도토리와 밤이 암기가 되어 날아가는 쪽을 가리켰다.

    팅, 팅.

    탕.

    챙, 챙.

    아직도 암기는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고 반대쪽에서는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바닥에 쓰러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것은 악비광이 생각지 못한 상황이었다.

    묘하게 동수를 이룬다라?

    사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장에서 저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악비광은 말없이 한빈을 바라봤다.

    “…….”

    의문을 품은 악비광의 한빈이 말을 이었다.

    “왜 안 죽였겠어? 그리고 저들은 과연 누굴까? 사파가 장악하고 있는 이 산에서 말이야.”

    “사파는 아직 정의맹과 협약을 깨지 않았으니 그들은 아닐 테고…….”

    “그럼 누굴까?”

    “사파가 장악하고 있는 영단산에서 큰일을 벌일 만한 자를, 형님은 아십니까?”

    “대충 알긴 알아.”

    “대체 누굽니까?”

    “궁금하면 철전 다섯 닢.”

    “네, 내겠습니다. 형님.”

    “저 앞에 오는 놈들 봐 봐. 낯이 익지?”

    한빈이 검지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한빈의 검지를 따라 시선을 돌린 악비광의 눈이 커졌다.

    “헉.”

    비명을 지른 악비광은 눈을 비볐다.

    “우리 비광이도 알아보네.”

    “저건 산서삼살 중 막내 아닙니까? 편육랑아라고 불리는 놈 말입니다.”

    “그래. 저놈은 편육랑아고 저쪽에서 소 대주와 대결을 벌이는 놈은 첫째인 흑의살풍이지.”

    “헉, 그런데 산서삼살이라면 그때 형님과…….”

    “돈독한 인연을 맺었던 친구들이지. 지금은 첫째와 셋째밖에 없지만 말이야.”

    한빈의 말에 악비광은 고개를 갸웃했다.

    돈독하다는 말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난번에 산서삼살을 봤을 때만 해도, 한빈은 그들을 하인처럼 부려 먹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는 돈독하다는 말을 쓰다니!

    하지만, 당장은 다른 의문을 푸는 것이 먼저였다.

    악비광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그럼 저들이 사파란 말입니까?”

    “그럼 사파가 아니면 정파겠어?”

    “사파가 왜 우리를…….”

    “아마도 시험해 보려는 거겠지.”

    “사파가 정파인 우리를 왜 시험해 봅니까? 게다가 사파와 정파 사이에는 아직 협약이 유효하지 않습니까?”

    “누가 우리를 시험한다고 했어?”

    “그럼요?”

    “아마도 나를 시험해 보기 위해서 왔을 거야.”

    “그럼 암기를 날리는 절대고수는 누구입니까?”

    “그건 비밀이야.”

    한빈은 씩 웃으며 어둠 속을 바라봤다.

    저런 무위를 보여 줄 자라면 무림삼존에 버금가는 자일 것이다.

    사파 중 무림삼존의 그림자라도 밟을 수 있는 자는 딱 두 명.

    그중 하나가 바로 강남에 있다.

    물론 한빈도 이자를 만나기 위해 영단산에 올랐다.

    설마 했지만, 진짜 나타날 줄은 몰랐다.

    영단산에서 한빈이 얻을 것은 딱 세 가지였다.

    현재 적혈맹호대의 수준을 시험하고 싶었다.

    그 시험을 강남 사도련이 대신해 주겠다니, 사실 고마웠다. 사천당가의 전력에 대한 평가는 덤이고 말이다.

    둘째는 지금 암기를 날리는 고수와 만나는 것이다.

    마지막 셋째는 바로 그 고수와 협상을 하는 것.

    뭐, 첫째 둘째는 현 상황에서 모두 이루어졌다고 봐야 했다.

    문제는 세 번째 과제.

    이건 앞으로 한빈이 하기 나름이었다.

    한빈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옷을 툭툭 털었다.

    한빈이 일어나자 악비광이 물었다.

    “왜 일어나십니까?”

    “이제 슬슬 시험의 마무리를 지어야지.”

    “아까는 저를 말리시지 않았습니까?”

    “그때는 때가 안됐고.”

    “그럼 지금은 때가 됐다는 말입니까?”

    “네 말이 맞아. 아까는 설익었고 지금은 때가 된 거지.”

    “헉, 형님. 아까와 지금이 무슨 차이입니까?”

    “지금 그 차이를 몰라서 물어보는 건 아니겠지? 진짜 모른다면 난 비광이한테 실망이야.”

    “형님, 그냥 말씀해 주십시오. 혹시 대가가 필요하면 후불로 하겠습니다.”

    “뭐, 그렇다면 얘기해 줄게. 잘 들어 봐.”

    “뭘 잘 들으라는…….”

    악비광은 말끝을 흐렸다.

    생각해 보니 지금 소리가 달라졌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만 들리고 암기 날아오는 소리는 막힌 것이다.

    “소리가 안 들리네요. 이유가 뭘까요?”

    “도토리하고 밤이 다 떨어졌겠지. 무슨 이유가 있겠어?”

    “네?”

    “오늘은 영단산에 있는 다람쥐들이 포식하겠네.”

    “…….”

    악비광이 멍하니 어둠 속을 보자 한빈이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는 여기에 가만히 있어. 움직이면 죽을지도 몰라. 아까부터 날리던 사람의 성격이 좀 괴팍하거든.”

    “네? 괴팍하다니요?”

    “뭐, 그런 게 있어. 그러니까 여기에 가만히 있어. 심심하면 설화나 청화한테 간식 좀 나눠 달라고 하고.”

    “아, 네.”

    악비광은 힐끔 설화를 바라봤다.

    악비광과 눈이 마주친 설화는 재빨리 당과를 뒤로 숨겼다.

    그 모습에 한빈이 말했다.

    “설화야. 하나 주고 나중에 세 개 받으면 되잖아. 아니면 돈으로 받아도 되고.”

    “세 개요?”

    “원래 산에서 파는 음식은 비싼 법이니까.”

    “아.”

    설화가 탄성을 흘리며 눈을 빛냈다.

    마치 삶의 이치를 깨달았다는 듯 눈을 게슴츠레 뜨면서 한빈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악비광을 보며 말했다.

    “드시고 싶으시면 언제는 말씀하세요, 악 공자님.”

    “허, 이 집안은 어떻게 된 게 무조건 돈이야…….”

    악비광은 말끝을 흐렸다.

    옆이 허전했기 때문이다.

    조금 전까지 자신과 대화를 나누던 한빈은 소리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한빈은 천천히 싸움의 중심을 향해 걸어가며 미소를 지었다.

    사실 한빈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허공이었다.

    허공 속에는 비급이 반짝이고 있었다.

    한빈은 영단산에서 얻으려고 했던 세 개의 성과 이외에 특별한 선물을 받았다.

    이전에 비급이 전한 오호단문도의 단서 중 숲을 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은 것이다.

    정답은 간단했다.

    자신만의 대결이 아닌 지금과 같은 집단 전투를 바라보라는 것이었다.

    적혈맹호대와 사천당가의 무위를 냉정한 눈으로 살피자, 그들의 남긴 무공의 흔적들이 머릿속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결과…….

    [오호단문도의 깨달음이 완성되었습니다.]

    [깨달음의 결과가 용린검법에 기록됩니다.]

    [오호단문도 – 하북팽가의 대표 도법. 시전자가 잘 알고 있는 관계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언제든 검법으로 전환 가능. 부창부수의 효과 적용 가능.]

    친절한 설명이 비급에 나와 있었다.

    한빈은 힐끔 자신의 왼손을 바라봤다.

    지금 설명대로라면 오른손으로는 기존의 용린검법을 펼칠 수 있고, 동시에 왼손으로 오호단문도를 펼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부창부수가 이런 의미였다니!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피운 한빈은 다시 한번 자리에서 사라졌다.

    사사삭.

    * * *

    챙, 챙.

    병장기 소리가 소대섭의 귓가에 울렸다.

    장삼과 조호 그리고 새로 들어온 신입을 데리고 상대에 맞서고 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무공 수위에 있어서도.

    머릿수에 있어서도 상대가 월등하지만 묘하게 동수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치 자신을 봐주고 있는 것처럼…….

    소대섭은 바로 의문을 지웠다.

    상대의 검이 빨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챙, 챙.

    상대의 검은 전형적인 쾌검이었다.

    검은 무복에 검은 복면까지 쓰고 펼치는 쾌검은 어둠 속에서는 더욱 가공할 위력을 발휘했다.

    소대섭은 자신이 그동안 자만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자신이 심미호처럼 많이 굴렀던가?

    아니면 조호처럼 부지런했던가?

    적혈맹호대를 관리한다는 핑계로 수련에 소홀했던 것이 뼈저리게 후회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앞에 있는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 먼저였다.

    옆에 있는 조호도 계속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거대한 낭아봉을 피하기에 급급한 것이다.

    장삼은 또 어떠한가?

    세 명을 적을 막고 있다.

    신입으로 들어온 다섯은?

    뭐, 그쪽은 두말할 나위 없이 끝까지 밀리고 있었다.

    조금만 더 밀린다면 사천당가가 펼치고 있는 방어진까지 파훼될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싸움도 끝이었다.

    소대섭은 이 흐름을 끊어야 했다.

    그는 재빨리 한빈에게 배운 파혼검을 펼쳤다.

    칼을 아래에서 쳐올리며 단전에서 기를 끌어올렸다.

    우우웅.

    자신만이 들을 정도의 작은 공명이 일어났다.

    소대섭의 칼이 상대의 검을 막았다.

    쨍!

    검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상대의 검을 밀어 냈다.

    파혼검은 무게에 중심을 둔 초식.

    그 무게에 밀린 상대가 중심을 잃고 휘청이다가 뒤로 넘어갔다.

    소대섭은 이때다 싶어 적의 간격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때 뒤로 넘어갈 듯한 적이 검으로 바닥을 찍었다.

    그 반동 그대로 소대섭에게 파고들었다.

    순간 소대섭은 아차 싶었다.

    파혼검이 먹힌 게 아니라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때였다.

    갑자기 상대가 사라졌다.

    “헉.”

    소대섭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가만히 보니 사라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상대와 소대섭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소대섭의 눈이 커졌다.

    처음에는 경황이 없어서 못 봤는데 익숙한 뒷모습이었다.

    소대섭이 말했다.

    “주군.”

    “우리 소 대주는 수련 좀 더 해야겠어.”

    말을 마친 한빈은 소대섭과 대결하던 상대 복면인이게 눈을 돌렸다.

    한빈과 눈이 마주친 상대 복면인은 뒷걸음쳤다.

    “패, 팽 공자…….”

    상대가 한빈을 부르자 소대섭은 눈을 크게 떴다.

    이 상황이 혼란스러웠던 것이다.

    한빈은 소대섭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흑의살풍을 향해 걸어갔다.

    “잘 지냈어? 흑의살풍 아저씨.”

    “팽 공자가 여기에는 무슨 일로…….”

    “말이 잘 안 들리니까. 일단 복면부터 벗자고.”

    한빈의 말에 흑의살풍은 복면을 벗었다.

    휙.

    복면을 벗어 바닥에 집어 던진 흑의살풍이 말했다.

    “팽 공자가 여기 오는 줄 알았으면…….”

    “그건 됐고 이제 싸움은 멈춰야겠어. 내가 할 일이 있어서.”

    “할 일이라…….”

    흑의살풍은 말을 맺지 못했다.

    한빈의 손이 날아오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픽.

    한빈은 그의 혈도를 찍었다.

    한빈이 제압한 것은 숙면혈이라 불리는 풍지혈.

    귀 바로 아래에 위치한 혈도였다.

    풍지혈을 찍힌 흑의살풍의 몸이 허물어졌다.

    털썩.

    소대섭이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성을 내지르려 할 때였다.

    한빈이 소대섭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게 소대섭의 혈도도 제압했다.

    “소 대주도 잠깐 자고 있어.”

    말을 마친 한빈은 주변을 둘러봤다.

    한빈이 나타난 줄도 모르고 그들은 계속 병장기를 부지런히 놀리고 있었다.

    챙, 챙.

    하지만, 뒤쪽 상황은 전혀 달랐다.

    저 멀리에는 사천당가의 당기명이 누워 있었고 망격진을 펼치던 사천당가의 무사들도 모두 망격산을 팽개친 채 쓰러져 있었다.

    한빈은 재빨리 전광석화에 구걸십팔보의 효용을 더해 싸움터를 누볐다.

    픽, 픽.

    한빈의 손은 적과 아군을 구별하지 않았다.

    소란을 잠재우겠다는 듯 모두를 자리에 눕혔다.

    순식간에 산자락은 적막에 싸였다.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함이 어둠을 지배하자, 한빈은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러고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때를 기다린다는 듯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가끔씩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그때 사내의 목소리가 적막을 깨웠다.

    “내가 먼저 입을 열게 만들다니 대단하군, 대단해.”

    그 목소리는 어느 한쪽 방향이 아닌, 하늘 위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한빈은 그제야 눈을 뜨고 바닥에서 일어났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옷을 털고는 천천히 사천당가 무사들이 있는 자리로 걸어갔다.

    한빈이 멈춘 자리에는 사천당가의 망격산 몇 개가 펼쳐진 채 널브러져 있었다.

    그때 망격산 몇 개가 동시에 공중으로 떠올랐다.

    망격산이 있던 자리에는 한 노인이 활짝 웃고 있었다.

    하얀색 무복에 부채를 든 모습은 마치 신선을 연상케 할 정도였다.

    한빈은 그를 보며 포권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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